미국 교회의 무비판적인 국가/문화 이데올로기 흡수에 대한 신랄한 비판-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의 사적이고 공적인 신앙(A Private and Public Faith)
교회가 세상의 공적인 삶에서 가장 분리된, 가장 적게 연결되어 있는 시점과 지점은, 교회가 세상을 가장 잘 따라갈 때,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을 가장 닮아 있는 바로 거기입니다. 교회의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하나님의 말씀이 평범한 일상의 삶과 나뉘어질 수 있다는 미신(superstition), 교회가 세상을 섬기기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보전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로부터의 분리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지는 그 곳이, 교회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지는 곳입니다. (사적이고 공적인 신앙, 75)
여러분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 이데올로기, 문화, 정치와 어떤 면에서 닮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모 목사 때문에 한국 사회 전체가 벌집 쑤셔놓은 듯이 정신 없어진 요즘, 상식적인 신앙인들은 얼굴 들고 다니기가 어려워진 때가 바로 요즘이 아닐까 합니다. 그저 신앙인들은 한국 사회 전체에 사과하고 목을 조아려야 하는 때가 지금인 것 같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계기를 통해서 교회가 세상과 관계 맺는 기존 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점검 또한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한국 교회 전체가 전 모 목사와는 구별되는 집단임을 국민들에게 명확히 밝혀야 하긴 하지만, 동시에 전 모 목사가 한국 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극대화된 모습이라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물론 거기에 대해서 제대로 다루고자 한다면 이 공간에서는 절대로 충분히 논의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원인 분석, 비판적 성찰, 그리고 대안 제시가 필요하겠습니다만, 우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점은 이 모든 것의 뿌리에 한국 교회의 무비판적인 한국 사회 모방이 있다는 겁니다. 무비판적인 모방이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속한 곳이 한국 사회이고, 한국 교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니 이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현상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섬기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대신 오히려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를 닮아갈 때, 전 모 목사와 그 교회가 일으킨 것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건 당연하고요.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까요. 우선 한국 교회는 근원적으로 한국 사회가 “남한”으로 태동할 때, 사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데 필수적이었던 반공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흡수했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는 스스로의 정체성 확인을 위해서 맞서 싸울 적이 필요했고, 그 적을 넘어서는 일을 과업으로 삼아서 발전했습니다. 개인이든 사회 공동체든, 자기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을 때 자기가 적으로 삼을 대상을 규정하고 그 대상을 넘어서는 것보다 에너지를 확실하게 공급해주는 방식은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공산주의는 가장 손쉽게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받아들일 만한 적이 되었고, 한국 사회 전체의 목표는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한 주적인 북한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경우, 공산주의는 무신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또한 교회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게 만들었고요. 무엇보다도, 남한에 기독교를 전해준 미국 기독교가 미국 사회의 판박이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양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 또한 한국 교회가 닮아가야 할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렇게 사회를 닮아가는 일은 어쩌면 한국 교회의 태동기와 성장기에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거기에 대해서 이제껏 교회 전체적인 비판적 성찰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그 동력에 의지해서 성장하려고 한다면 그건 분명 문제일 겁니다. 왜냐면 그건 한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을 포기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노력할 때 교회는 진정으로 한국 사회를 섬길 수 있으며, 그 첫걸음은 교회가 한국 사회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한국 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든, 성장 제일주의든, 물량주의나 물신주의든, 교회는 한국 사회의 병폐를 지적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거기에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서평할 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 1928-1985)의 책 사적이고 공적인 신앙(A Private and Public Faith)은 한국 교회가 지금 물어야 할 질문을 묻는데, 그리고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입니다. 우선 저자인 윌리암 스트링펠로우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평신도 신학자로, 평생 성공회(Episcopalian) 교단에 속해서 신앙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버드 법대 졸업 후, 변호사로서 미국에서 가장 힘들고 어렵다는 뉴욕의 할렘가에 들어가서 그 지역의 주민들과 평생을 함께 지냈으며, 또한 평신도로서 그 지역을 복음으로 섬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평생을 고민하며 그 고민을 삶으로 살아내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요. 스트링펠로우의 책들은 많은 지적 탐구와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나온 책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할렘이라는 지역적 배경 속에서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고자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깨달은 것들을 일필휘지처럼 써내려간 느낌이 그의 모든 저작에서 강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학적인 탐구에 게을렀다는 말은 아닙니다. 스트링펠로우는 칼 바르트(Karl Barth), 자끄 엘룰(Jacques Ellul) 등 당대의 기독교 지성을 써내려갔던 인물들과 끊임없이 대화했으며, 철저한 지적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란 어떤 것인지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사적이고 공적인 신앙(A Private and Public Faith)은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책 자체는 미국 기독교가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모방해 왔는지, 또한 어떻게 하면 그 길에서 돌이켜서 다시 예수를 닮아감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스트링펠로우 나름의 성찰입니다. 책은 4개의 짧은 에세이—종교의 어리석음(The Folly of Religion), 개신교의 유령(The Specter of Protestantism), 그리스도인의 삶의 단순함(The Simplicity of the Christian Life),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The Fear of God)—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각각의 에세이가 담아내는 통찰은 그 짧은 길이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깊습니다. 이 네 개의 에세이는 비록 따로따로 나뉘어져 있지만, 공통적으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같은 생각의 궤적을 통해서 하나로 꿰어질 수 있는 구슬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서평에서 각각의 에세이를 자세히 소개하는 대신, 각각의 에세이가 스트링펠로우가 가진 생각의 흐름에서 어떤 조각을 차지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스트링펠로우가 그리는 전체 그림을 보실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우선 스트링펠로우는 미국 기독교가 가진 본질적 문제는 미국 사회를 그대로 따라갔다는 점이라는데서 출발합니다. 마치 한국 교회가 오늘날 처한 문제점이 한국 사회를 그대로 따라갔다는 것과 비슷하지요. 그의 첫번째 에세이인 종교의 어리석음(The Folly of Religion)에서 종교란, 미국 사회를 그대로 모방한 미국 기독교를 가리킵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비록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에 의해서 세워졌지만, 그 청교도들은 국가 종교의 폐해를 직접 몸으로 경험한 이들이었고, 그래서 종교를 개인의 사적인 선택 사항으로 남겨두고자 했습니다. “지난 한세기하고도 반세기가 넘도록, 개신교는 자율적이고 개별적인 종교성을 권장해왔고, 이 개념은 다른 어떤 개념보다도 미국 기독교의 괴상망측한 분열과 분리, 격리 뿐만 아니라,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숨막히는 종교적 에토스를 잘 설명합니다” (19).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기독교를 사적인 영역에 남겨 두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말하듯이 순순히 사적인 영역에 자신을 가두어둠으로써 복음을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를 섬기는 일을 포기했다는 것이 스트링펠로우의 주된 비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사적인 영역에 남겨지게 될 때 교회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넘어서 세상 가운데 계시며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 사적이고 공적인 신앙(A Private and Public Faith)인 까닭입니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거기에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영역의 구분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은 세상이며, 단지 사적인 영역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종교란 “오직 종교 자신과만 관련이 있고, 세상과도, 생명과도 관련이 없는 기관” (18, 19)입니다. 책의 세번째 에세이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단순함(The Simplicity of the Christian Life)”은 교회가 종교가 되어갈 때 어떤 모습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 교회들은 점점 더 자기들 속으로 후퇴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안으로 파고 들어갔고, 내부 유지와 절차에 완전히 매몰된 나머지, 비루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오직 스스로만 섬길 뿐인, 공식적이고, 자기 만족적이며 흐물흐물한 교단적 구조를 보전하고 키우는데 완전히 갇혀 버린 나머지 세상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쉽게 되어버렸습니다 (74).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교회를 사적인 영역에 국한시켰을 때 어떻게 미국 교회들이 거기에 순응했고, 또 교회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일에, 오직 자신들의 성장에만 집중하는데 편한 구조로 바뀌어갔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이런 교회는 미국의 중산층이 다니기 좋은 교회입니다. 고객이 되어버린 성도들을 위해서 여러가지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좋은 교회, 비록 사회 봉사를 하지만, 여러가지로 교회 주변의 지역과 주민들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러한 섬김마저도 오직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정당화를 제공하는 근거로 사용될 뿐인,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섬기시기 위해서 세상의 멸시와 모욕을 견디시면서도 죽도록 세상을 사랑하셨던 모습하고는 전혀 다른, 중산층의 입맛에 맞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이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기준이 얼마나 자주 중산층 사회가 공유하는 도덕이 되는지 생각해보라.” (69)
이제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디 계시는지에 대해서 스트링펠로우의 얘기를 들어볼 차례입니다.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해서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며, 그 분의 말씀에는 거침이 없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또한 그 자유를 따라서, 그 자유를 닮아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쳐놓은 함정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곳이라면 그 곳이 사적인 영역이든, 공적인 영역이든 아무 거리낌 없이 뛰어들 수 있어야 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the presence of the Word of God)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 결과 미국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게 줄 수 있는,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최고의 사역이며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만, 특별히 미국 교회 안에만 갇혀 있지 않으시며, 교회의 영향력이 전혀 없는 곳에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특혜나 특권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34). 저는 개인적으로 특히 이 부분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분은 이스라엘 민족도 아닐 뿐만 아니라 심지어 창녀였던 라합에게도 나타나신 분이며, 그 분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은 그가 누구든지 받아들이고 사랑해주시는 분이시지만, 단지 자신들이 교회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잊을 때 교회가 필요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외친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 3:8-9) 교회가 단지 자신들이 교회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특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듯이 버림받게 될 것이며,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일하시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닮아가지도 못하는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궤를 같이 해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행하심이 뜻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언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언가는 단순한 추측이나 때려맞춤이 아니라, 훨씬 더 구체적이고 확실하며, 더 직접적이고 가까우며 진정으로 인격적인 무언가입니다” (17). 스트링펠로우에게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곳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 갇혀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들에게 드러났고, 어떤 엘리트적인 지식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 같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에세이인 개신교의 유령(the Specter of Protestantism)에서 스트링펠로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있는 것들 중 가장 보통의, 가장 덧없는, 가장 교만한, 가장 훌륭한, 가장 괴로운, 천박한, 경솔한, 영웅적인, 빛나는 모든 면들을 극단적으로, 결정적으로, 포용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40)
여기에는 어떤 엘리트 주의도 없습니다. 레슬리 뉴비긴이 말하듯이,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드러난 비밀(the Open Secret)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다는 사실 때문에 섣불리 자랑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에 묶이지 않습니다. 특히나 교회가 다른 무언가, 예를 들면 미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나 한국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을 때는 더더욱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로우심과 함께 스트링펠로우가 찾아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또 하나의 귀한 통찰은 바로 철저한 현실주의(realism)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사적이거나 공적인 어떤 영역에도 묶이시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어떤 특정한 측면으로부터 보호받으실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의 모든 영역에서 거침이 없으시며, 현실의 어떤 측면도 모두 담아낼 수 있으십니다. 이것은 현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지옥문이 열렸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지옥에 내려가셨던” 분이십니다 (벧전 3:19). 또한 그 분께서는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경험하셨던 분이시기도 합니다 (마 17).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현실과 최상의 현실을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며, 스트링펠로우의 철저한 현실주의는 바로 여기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함께 교회로서 송축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 속에 이미 임재하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라 함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말하며, 누군가가 바라는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얼굴을 붉히거나, 물러서거나, 얼버무리거나, 무시하거나, 숨어 버리거나, 부인하거나, 무언가 아닌 척 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세상에는 빛 뿐만 아니라 어둠 또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는 평화와 건강과 안전과 평안과 사랑과 용서뿐만 아니라 전쟁과 질병, 가난과 고통과 정욕 또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하거나 부인해야 할 정도로 잘 알지 못하는 인간의 극단적인 경험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58)
바로 이런 까닭 때문에 스트링펠로우는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단지 교회에서의 활동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고 기꺼이 감싸 안으신 현실 속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일하심을 따라서 움직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닮아감을 스트링펠로우는 “성육신에 대한 존중”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화되심으로써 피조계의 현실 전체를 하나님께서 긍정하셨다는 표지가 바로 성육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구별되는 것은 그의 정치적 견해로도, 도덕적 결정으로도, 습관적인 행동으로도, 개인 경건으로도, 그리고 결코 교회 활동으로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온 피조계에 드러나신 성육신—전통적 용어를 쓰자면—에 대한 급진적인 존중을 통해서, 특히나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죄의 진통 속에 있는 피조계에 대한 그런 존중을 통해서이다 (43)
그렇다면 이런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걸까요. 흥미롭게도 여기서 스트링펠로우는 신학함이라는 주제로 돌아갑니다. 즉 이것은 미국 교회의 잘못된 신학 탓이라는 것이 스트링펠로우의 진단이며, 이런 잘못된 신학함은 근본적으로 신학교 교육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왜일까요. 신학함(doing theology)을 실제로 모델로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집단이 바로 신학교이며, 신학교에서 교육이 일어나는 방식은 교회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믿고 따르고 생각하는지를 예측하는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외부인으로서 신학교를 관찰합니다. 신학교가 교회들에 미치는 파급 효과,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실제로 맺는 관계가 보여주는 함의, 그리고 그 결과 교회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공통 생활과 사회에서의 공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이미지 등을 관찰합니다” (37). 물론 스트링펠로우가 신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가 신학교 교육에 아주 이방인은 아닙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수차례에 걸쳐서 강의를 했으며, 신학교의 생리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학생이거나 교수인 적은 없었지만, 그의 이런 관찰은 신학교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아차리는데 크게 도움을 줍니다. 스트링펠로우가 바라보는 현대의 신학교 교육의 진단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흐름은 신학이 오직 목회자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는 관찰입니다. 평신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삶의 현실에서 신학을 적극적으로 나름대로 펼쳐가는 존재들이 아닌, 목회자들이 떠먹여 주는 신학함, 평신도들의 삶의 현실에는 어쩌면 부적합할 수 있는 그런 신학함에 만족하게 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 신학은 교회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스트링펠로우가 보기에 이런 경향은 미국 교회가 오직 스스로의 운영과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그저 “종교”가 되어버린 맥락과 일맥상통합니다 (38). 신학이 거침이 없고 자유로우시며, 모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세상 속에서 세상의 모든 현실과 맞닿은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학함은 비록 목회자의 역할이 일부 있을 수 있지만, 많은 부분 자신들의 현실에서 신학함을 감당해내야 하는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스트링펠로우는 오늘날 미국의 교회가 종교로서의 지위에 만족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평신도들에게 신학을 할 수 있는 도구를 쥐어주고,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삶의 현실 속에서 신학함을 배워갈 수 있게 해주어야 교회는 그런 야성적인 본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스트링펠로우가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만인 제사장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회복에 다름 아닙니다. 이 시점에서 미국 교회의 현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현실 또한 돌아봅니다. 전 모 목사의 교회 성도들은 목회자의 신학함에, 그것도 완전히 잘못되고 왜곡된 신학함에 완전히 노예가 되어버린 나머지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고 무엇이 목회자가 말하는 바인지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되면 타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평신도들은 스스로 신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 작업은 모든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진 일이다”(47)라는 스트링펠로우의 주문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종교 개혁의 주문일 뿐 아니라, 오늘의 한국 교회가 회복의 길을 걷기 위해서 꼭 새겨 들어야 할 통찰일 것입니다. 스트링펠로우 읽기 시리즈는 다음에도 계속되며, 다음 시간에는 영성의 정치(The Politics of Spirituality)를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