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는 성공에 몰두하기보다는 가치관을 계발하라—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
지난 번 제임스 스미스의 3부작 중 첫번째 책인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에서, 스미스는 문화적 예전과 습관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생각으로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고, 믿음으로 움직이는 존재도 아니며, 오직 그가 근본적으로 바라고 욕망하는 것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바라고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느냐,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바라고 욕망하는 것이 좀 더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되게 하느냐가 되는데 (신앙인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바라고 욕망하는 것이 하나님이 되고 그 분의 피조계를 사랑하는 것이 되게 하느냐이겠지요), 그 단초를 어떻게 찾아내느냐에 대해서 스미스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고 있고, 그런 면이 아쉽다고 제가 서평한 바 있지요.
그런데 오늘 서평할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은 어느 정도 우리의 근본적인 욕망이 어떤 것인지 온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살짝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서 여러 면에서 스미스의 책과 상보를 이루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었는데요. 왜 그런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로 세가지에 대해서 얘기할 텐데요. 첫번째는 감정과 가치관 사이의 관계, 두번째는 인간의 구원 프로젝트로써의 가치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 책이 가진 중산층적인 한계입니다.
감정과 가치관 사이의 관계
스미스가 우리의 근본적인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아무런 근거가 없는 동물적인 욕구가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몸일 뿐만 아니라 합리성이며, 의지이며, 감정입니다. 그 모든 것의 총합체가 인간이며, 따라서 이들 각각은 서로 계속해서 교류를 주고 받습니다. 이렇게 합리성과 감정과 의지가 사람의 삶에서 여러가지 사건과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어 가면서, 장기적으로는 합리적인 것으로 정당화되며, 감정적인 측면에서는 가장 추구할 만 하다고 느끼게 되며, 또한 의지적인 측면에서는 계속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가치관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 바로 스미스가 말하는 근본적인 욕망입니다. 다만, 맨슨은 이것을 우리의 가치관이라고 부릅니다. 그 둘은 사실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치관 역시 우리의 삶을 합리적인 차원에서 정당화시켜주고, 그러한 삶을 가장 추구할 만한 것이라고 느끼게 만들며, 그러한 삶을 향해서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가치들의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스미스와 맨슨이 다른 점은, 스미스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름으로써 인간이 주체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인상을 남기지만 (물론 스미스의 책은 교육에 관한 책이고, 근본적으로 욕망을 바꾸는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합니다.), 맨슨의 경우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서부터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찾아나가는 법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미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맨슨의 방식을 더 선호하고요.
일단 맨슨이 문제로 삼는 것은 긍정적인 감정에 대한 선호,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외면이 주로 지배하는 미국의 사회 분위기입니다 (사실 한국도 이런 면이 어느 정도는 있는 것 같고요). 맨슨의 분석에 의하면, 이런 분위기는 성공이라는 목적과 연결되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감정을 계속해서 유지할 필요가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제껏 자기 계발에 관한 많은 책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 버려야 할 것, 그리고 긍정적인 감정을 계속해서 키워야 할 것으로 표현해 왔지요. 하지만 맨슨은 여타의 자기 계발에 관한 서적들과는 달리 이 책에서 부정적인 감정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가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선 우리의 진짜 가치관은 우리가 입으로 말하고 주장하며 믿는다고 얘기하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들과 그 이면에 우리가 그렇게 느끼도록 도와주는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말이 되는) 생각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신앙 조차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긍정적이 되는 것을 신앙적이 되는 것으로,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은연 중에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이 가진 진짜 가치관을 찾도록 도와주지도, 그리고 그러한 가치관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 지에 대해서도 별 도움이 못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고요.
맨슨은 4장에서 내가 진짜 붙잡고 있는 가치관을 찾는 세가지 단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런 단계를 맨슨은 자의식 양파(self-awareness onions)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우리의 자의식은 아무리 까고 또 까도 계속해서 껍질이 나오는 양파같은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자의식 양파의 핵심은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단계는 내가 느끼는 감정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관찰하고, 인지하는 것입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 상황이나 순간에, ‘그런 감정을 내가 느끼고 있구나’ 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그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왜 내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난다면, 왜 내가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단계는 앞의 두 단계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나의 가치관의 핵심을 짚어볼 수 있는 단계인데, 이 단계에서 내가 던져야 할 질문들은 내가 어떤 것을 성공/실패로 여기는지, 그리고 그렇게 판단할 때 쓰는 기준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들입니다.
맨슨은 구체적으로 이런 가치관의 차이가 어떤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를 미국의 대중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인물, 즉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과 피트 베스트(Pete Best)의 가치관의 비교를 통해서 그 둘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면서 효과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달합니다. 우선 두 인물의 공통점은 둘 다 전설적인 록밴드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머스테인은 메탈리카(Metallica)에서, 그리고 베스트는 비틀즈(Beatles)에서 쫓겨난 멤버들입니다. 하지만 이후 두 인물의 삶의 궤적은 크게 달라집니다. 머스테인은 재기에 성공해서 메가데스(Megadeth)라는 그룹을 이끌게 되었고, 2500만장의 앨범을 파는 대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베스트의 경우 이후의 삶은 머스테인처럼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틀즈 멤버들과의 소송에 연루되었고, 우울증에 걸려서 알콜 중독 단계까지 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머스테인과 베스트가 이후 자신들의 삶에서 성공/실패를 무엇이라고 이해했고, 어떤 기준에서 그렇게 했는지입니다. 머스테인의 경우 이미 얘기했던 것처럼 메가데스를 통해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지만, 메탈리카의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고, 그 때문에 평생 자신을 메탈리카에서 쫓겨난 사람이라는 피해 의식 속에서 자신을 실패자로 규정짓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둔 놀라운 성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채 말입니다. 따라서 그는 계속해서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 둘러싸여서 살았고, 자신의 감정과 가치관을 성찰할 기회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피해 의식 속에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베스트의 경우, 비틀즈에서 쫓겨난 이후 일반인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비틀즈에서 쫓겨난 것을 계기로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들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렇게 일반인으로서 평범하게 사는 삶을 통해서 알게 된 인생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맨슨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머스테인과 베스트의 삶은 결국 그 두 사람의 가치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결판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삶 또한 독자 여러분의 가치관, 즉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무슨 기준으로 그렇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에, 독자 여러분 또한 여러분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가치관이 어떤 것이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감정이 달라지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달라지며, 여러분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성취나 명예를 얻는 것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맨슨은 어떤 가치관이 좋은 가치관인지, 어떤 가치관이 나쁜 가치관인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풀어갑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책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자세히 관찰하다보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붙잡고 있는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는 점,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가치관 성찰에의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바로 그 점입니다.
인간의 구원 프로젝트로써의 가치관
제가 맨슨의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흥미로웠던 점 중 하나는, 맨슨이 계속해서 구원(salvation)이나 구속(redemption)과 연관된 단어들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데이브 머스테인과 피트 베스트의 얘기를 할 때 맨슨은 굳이 redemptive story, 즉 구속의 이야기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81). 머스테인이 어떻게 자신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구해내고자 했는지의 이야기가 그의 구원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서, 즉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기 위해서 사용하는 두가지 전략 중 한가지가 자신을 지나치게 고통과 고난을 많이 겪은 피해자인 것처럼 드러내는 것이고 (주변에 인간 관계에서 계속해서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표현하면서 은근히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보셨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한가지가 자신의 업적이나 성취를 드러내면서 자신이 특별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맨슨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두가지 방식 중 한가지를 따르고 있습니다 (178). 그리고 이런 자기 존재 가치 높이기 게임은 누군가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자신이 처한 현 상황에서 (즉 스스로가 느끼는 자기 존재 가치가 낮다는 인식에서) 구원해내고자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맨슨은 마지막 챕터에서 죽음으로부터의 회피(Denial of Death)라는 책의 저자인 어네스트 베커(Ernest Becker)를 자세히 인용하면서 결국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가치관이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문화라는 차원에서도, 스스로를 구원해내고자 하는, 곧 영원히 죽지 않고 살려는 시도로서의 자기 구원 프로젝트(immortality project)에 다름 아니라고 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팀 켈러 또한 베커의 죽음으로부터의 회피 를 자주 인용하는데, 켈러가 베커를 인용하면서 주장하려는 바와 맨슨이 베커를 인용하면서 주장하려는 바가 거의 동일해서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반드시 이렇게 구체적이고도 자세한 방식으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어야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구원의 메세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맨슨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불교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책 전체에서 드러내고 있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원과 구속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불교의 구속이나 구원관에 대해서 궁금해지게 되기도 했고요.
맨슨의 중산층적인 한계
마지막으로는 맨슨의 책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그 한계란 사실 맨슨의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으로 제가 보았던 것이기도 한데요. 즉 주체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왜 주체성에 대한 강조가 맨슨의 한계가 되느냐?를 물으신다면, 저는 얼마 전 제가 서평했던 J.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를 그 한계를 보여주는 예로 들고 싶습니다. Vance에 의하면, 주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도 주체성을 키워주는 성장 환경 속에서 자라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Vance는 자신이 주체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책임을 지면서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성장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런 까닭에, Vance가 자란 것과 유사한, 미국의 전형적인 백인 노동자들의 문화적 배경은 맨슨이 자랐던 텍사스의 풍족한 문화적 배경 (맨슨은 자신이 굉장히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남부럽지 않게 성장했다고 책에서 몇 번 언급합니다) 과는 달리, 주체성에 대한 의식을 별로 키워주기 어렵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의 노력이나 의지력을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이 그렇게 노력하고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토양이 되어준 문화적 배경이 중요한 까닭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국 맨슨은 자신과 같이 어느 정도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난 이들을 위해서 책을 쓰고 있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먹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이 책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저 자신의 중산층적인 배경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Vance의 책에 관한 제 서평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일단 당신이 어떤 전형적인 힐빌리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의 삶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무직에, 마약쟁이이고, 이혼했으며, 3학년부터 9학년까지 (미국 학제 기준), 7년 동안 당신을 데리고 7명의 남자 친구와 동거를 시작했다가 깨지기를 반복합니다. 평균 1년에 한 번 꼴이죠. 당신은 “이번에는 이 사람을 내 아버지처럼 여길 수 있을까”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합니다. 그 사이에 어머니가 남자 친구들과 싸우느라 밤마다 소리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보냈던 시간 속에서 망가진 당신의 정서적 친밀감은 누가 보상해 줄까요. 이제는 누구를 아버지로 삼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150). 게다가 당신은 이미 그런 일을 겪기 전에 당신의 친 아버지가 고작 양육비를 아낄려고 당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이 부분은 친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서 오해였음이 드러나긴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경험을 ACE(Adverse Childhood Experience) 라고 부릅니다(226). ACE라는 말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의 학문적 표현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 안정감을 키워야 하며, 평생 밑거름이 되어 줄 정서적 자원을 채워가야 할 어린 시절에 바로 그 부모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은 것이죠.
그 뿐이 아닙니다. 당신이 사는 동네에서 당신과 어울리는 친구들, 그들의 부모들 또한 당신의 집과 사정이 비슷합니다. 아무도 대학에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의 부모 중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없습니다. 동네에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도 일주일에 20시간도 일하지 않고, 허구헌날 아내를 패고 술에 취해 아이들을 학대하는 놈팽이들이 가득합니다. 거기에 이전에 당신이 살던 동네를 거의 먹여살리다시피 했던 철강 회사는 인건비 탓을 하면서 당신 동네에서 철수했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당신의 동네를 떠났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떠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청소년기의 많은 부분을 당신이 보고 자란 것이 이런 것들 뿐이라면 당신의 내면은 어떨까요. 당신의 마음 상태는 어떨까요. 패배감이 가득하겠죠. 하지만 심각한 것은 당신이 느끼는 패배감이 당신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는 동네의 지배적인 문화가 되어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잠식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게 무서운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게 잘못된 것인지 조차도 모르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런 문화적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는 어떤 동기도 얻을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밴스는 자신이 자라난 동네의 지배적 정서, 힐빌리들이 가진 지배적 정서를 “무슨 선택을 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느낌”(feelings our choices don’t matter)이며, 심리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말한다면, 학습된 절망(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말합니다 (163, 177). 쉽게 말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지금의 절망적인 상태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느낌, 그 느낌이 문화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굳이 노력을 할 이유도 없죠.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냥 그렇게 살다 가는 겁니다. 이 책이 소설이 아니라는게 중요합니다. 밴스는 자신이 겪었던 엄연한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극적이라서 더더군다나 슬픈 현실 말이죠.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Vance가 그랬듯이 일단 그런 문화적이고 심리적인 무기력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된다면 이 책의 메세지가 굉장히 큰 도움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 서평을 마치기 전에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치명적인 한계는, 맨슨의 이런 책이 엄연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가치관 계발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가치관의 변화나 변혁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는 겁니다. 복음 메세지가 이 책의 메세지를 비판하면서도 또 보완해줄 수 있는 면이 바로 그런 면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맨슨이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나, 논의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기존에 제가 익숙해져 있는 신학 서적이나 기독교 서적과는 다른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맨슨이 기독교 문화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고, 나름대로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서 얻게 된 지혜를 이 책에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기독교가 가진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y: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을 상상하는 방식, 주로 이미지와 이야기, 전설 등으로 표현됨. 미국 기독교의 사회적 상상은 아마도 대중 문화가 기독교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드러나지 않을까 함)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계속적으로 기독교 바깥의 문화와 교류하는 것이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기독교 진리를 표현해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겠다는 점도 느꼈습니다. 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성경과 교회 공동체만이 신학을 하는 재료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더욱 어렵게 되기도 했고요. 하나님은 성경 안에 계시며, 기독교 공동체 안에 계시지만, 그 안에 갇혀 계신 분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마크 맨슨의 책을 필두로 해서 저는 자기 계발에 관한 책들을 좀 더 읽어볼 계획입니다. 그리고 신앙과 자기 계발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 더 연구할 계획입니다. 차후에 이 주제에 관한 시리즈를 해볼 계획이니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