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몸, 습관, 예배, 그리고 사랑/욕망—제임스 스미스의 습관이 영성이다
제임스 스미스의 습관이 영성이다 (You Are What You Love)는 동일 저자의 문화적 예전 시리즈 중 1부인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와 2부인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Imagining the Kingdom)의 대중판입니다. 문화적 예전 1부와 2부에서는 모리스 메를로퐁티나 피에르 부르디외, 마크 존슨,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거스틴같은 학자들의 논의를 대중적인 차원에서 실천 가능한 수준으로 녹여내는데 집중하면서도, 여전히 이같은 학자들의 이름과 논의가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되는 것에 비해서, 이번 책인 습관이 영성이다는 그런 학자들에 대한 언급을 가능한한 자제하면서도, 좀 더 실제적인 면이 강조된, 일반인들이 읽기에 버겁지 않은 책을 지향하는 듯 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여전히 이 책도 일반인들이 읽고 소화하기에는 많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가 문화적 예전 시리즈 1, 2부를 쓰면서 이론적인 면에 치중한 것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그래도 확대된 가족으로써의 교회, 그리고 교회 내에서의 가정의 위상(5장), 혹은 미국 내 중고등부 사역 문화에 대한 반성(6장) 등이 담겨 있어서 실제적인 도움을 어느 정도는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런 류의 책을 쓸 때 사실 가장 필요한 것은, 어차피 저자인 스미스 자신이 이런 류의 책을 쓸 때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논의를 학자적 논조로 논하는 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면 (스미스는 이 책들이 철학자인 자신이 학자로서 쓴 학문적인 책들은 아니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하고 들어야 하는 메세지인 복음이 도대체 제임스가 이야기하는 것들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를 명확하여 보여줄 수 있어야 정말로 사람들의 삶에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비록 학문적인 책이 아니라 대중적인 책이지만, 학자의 습관, 즉 가능하면 관찰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정하고, 그 위상 안에서 자신의 논의를 펼쳐가려는 습관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고, 그래서 사실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복음 메세지가 어떻게 스미스가 이야기하는 것들과 구체적으로 연관이 있는지 거의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앞으로도 스미스의 문화적 예전 3부작과 이 책 습관이 영성이다를 자주 참고할 것 같습니다. 아니, 자주 참고하는 것을 넘어서 스미스가 언급하는 학자들과 그들의 저작들을 차근차근히 읽어 나갈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들은 과연 사람이 어떻게 해야 변하는가라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차대한 질문에 대해서 아주 설득력 있는 그림을 그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 습관이 영성이다는 그 그림의 간결한 요약판이자 대중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책인 까닭에 더더군다나 아주 자주 참고할 것 같습니다.
스미스의 논지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깊습니다. (물론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괜히 위화감을 조성하는 철학자들 이름을 모두 빼고 나면 (이미 말한대로 적어도 이 책에서는 철학자들 이름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변하는가에 대한 그의 대답이 이 책 전체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스미스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나름의 그림을 그립니다. 이 그림을 보면, 사람이란 존재는 그 부분부분과 마디마디가 아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유기적 연결이 거의 유일하게 끊어진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입으로 얘기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과 우리가 정말로 믿고 바라며 살아가는 것들 사이의 간극입니다. 이 간극을 제외하면, 사람은 그를 이루는 각각의 부분들이 꽤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일단 누구나 좋은 삶에 관해서 가지고 있는 나름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사람 안에서 욕구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그로 하여금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결국 자신이 바라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사람을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듭니다. 이런 움직임이 반복되면 습관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규정짓는, 그 사람의 존재의 일부가 됩니다. 이렇게 특정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의 배후에는 욕망이 있지만, 스미스는 그 욕망은 궁극적으로 그가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한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스미스가 말하는대로 “You are what you love, because you live toward what you want”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향하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3).
그런데 이미 얘기한대로 우리의 삶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 추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이 반드시 우리가 정말로 꿈꾸는 삶의 그림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스미스는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 대신 우리가 가진 습관들, 그 배후에 있는 욕망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우리가 꿈꾸는 좋은 삶에 대한 그림을 성찰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2장 제목은 “You might not love what you think”(당신은 당신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가 됩니다.
그러면 해답은 궁극적으로 결국 우리가 가진 욕망을 바꾸는 것이 되며, 그 욕망 너머에 있는 우리가 꿈꾸는 좋은 삶을 바꾸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 몸의 습관을 바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 신앙의 제자도는 궁극적으로는 욕망을 바꾸는 일이라는 스미스의 논지는 아주 정당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욕망은 어떻게 해야 바뀔까요?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들은 어떻게 우리의 이기적 욕구를 채우는 것들에서 멀어져서 하나님과 이웃으로 바뀌는 걸까요? 스미스는 그 답으로 내러티브를 제시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몸이 젖어든 습관, 그 습관이 반영하는 욕망, 그리고 습관과 욕망을 비추어내는, 우리가 정말 간절히 바라는 좋은 삶에 대한 꿈을 통해서 형성되는데, 여기에는 이미 어떤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나름대로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는 우리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고, 현재는 어떤 존재이며, 미래에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큰 그림을 그려주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정해 줍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구원 서사 또한 이야기라는 것이 여기서 우리 삶의 이야기를 도전하는 대척점이 되기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대안이 된다는 것이 스미스의 논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복음 이야기 안에서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의 욕망도, 습관도, 우리가 바라는 좋은 삶에 대한 꿈도, 모두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미스의 이런 논지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이나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참인 것은 아닙니다. 일전에 제가 서평했던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에서도 이와 동일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저의 서평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맨슨은 구체적으로 이런 가치관의 차이가 어떤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를 미국의 대중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인물, 즉 데이브 머스테인(Dave Mustaine)과 피트 베스트(Pete Best)의 가치관의 비교를 통해서 그 둘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면서 효과적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달합니다. 우선 두 인물의 공통점은 둘 다 전설적인 록밴드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머스테인은 메탈리카(Metallica)에서, 그리고 베스트는 비틀즈(Beatles)에서 쫓겨난 멤버들입니다. 하지만 이후 두 인물의 삶의 궤적은 크게 달라집니다. 머스테인은 재기에 성공해서 메가데스(Megadeth)라는 그룹을 이끌게 되었고, 2500만장의 앨범을 파는 대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베스트의 경우 이후의 삶은 머스테인처럼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틀즈 멤버들과의 소송에 연루되었고, 우울증에 걸려서 알콜 중독 단계까지 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머스테인과 베스트가 이후 자신들의 삶에서 성공/실패를 무엇이라고 이해했고, 어떤 기준에서 그렇게 했는지입니다. 머스테인의 경우 이미 얘기했던 것처럼 메가데스를 통해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지만, 메탈리카의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고, 그 때문에 평생 자신을 메탈리카에서 쫓겨난 사람이라는 피해 의식 속에서 자신을 실패자로 규정짓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거둔 놀라운 성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채 말입니다. 따라서 그는 계속해서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 둘러싸여서 살았고, 자신의 감정과 가치관을 성찰할 기회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피해 의식 속에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베스트의 경우, 비틀즈에서 쫓겨난 이후 일반인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 행복했다고 고백합니다. 오히려 비틀즈에서 쫓겨난 것을 계기로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들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렇게 일반인으로서 평범하게 사는 삶을 통해서 알게 된 인생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맨슨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머스테인과 베스트의 삶은 결국 그 두 사람의 가치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결판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삶 또한 독자 여러분의 가치관, 즉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무슨 기준으로 그렇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에, 독자 여러분 또한 여러분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가치관이 어떤 것이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감정이 달라지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이 달라지며, 여러분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기서는 가치관으로 표현했지만 (그리고 그 용어를 쓰는 것도 정당하지만), 좀 더 큰 그림을 보게 해주는 것은 데이브 머스테인과 피트 베스트가 각각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를 어떻게 보았느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학자 폴 리쾨르가 말한대로, 우리의 삶은 궁극적으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봐야 (즉 우리가 우리 삶을 이해하는 이야기틀 안에는) 우리 삶을 실제로 움직이고 지배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독자 여러분은 스미스가 이 책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어느 정도 보이실 겁니다. 진단이 나왔으니 구체적인 대안이 있어야 하겠지요? 스미스는 욕망과 습관, 이야기, 몸 등의 얘기를 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제자도의 이야기를 우리의 몸이 알아들을 수 있게,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장이 바로 교회의 예배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예배에는 복음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교회 공동체의 체험으로, 또한 오감의 체험으로 잘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제는 어떤 예배가 복음 이야기를 정말로 공동체적으로, 몸의 차원에서 잘 녹여내는지에 관한 고민일 겁니다. 스미스는 여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문화적 예전 1, 2부의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예배라는 말 자체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사용된다”는 비판도 동일하게 이 책에 적용된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신론자 영문학자인 포모나 칼리지(Pomona College)의 데이비드 포스터 월레스(David Foster Wallace)가 “이것이 물이다(This is Water)”에서 얘기했던대로, 우리의 삶에서 예배를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미스가 말하는 예배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국한시키기만 하지도, 또 그렇다고 너무 넓게 볼 필요도 없을 것 같고, 그냥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월레스의 “이것이 물이다”를 일부 여기에 인용합니다.
또한 또 다른 사실이 하나 있는데, 바로 여러분은 경배해야 할 대상을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직장인의 하루하루 전쟁터같은 삶에 무신론같은 건 없습니다. 경배하지 않는다는 건 없습니다. 모두가 무언가를 경배하고 있죠. 우리는 경배할 무언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이든, 알라이든, 야훼이든, 위카의 여신이든, 사성제이든, 어떤 불변의 진리이든간에 어떤 경배할 신이나 영적 존재를 선택해야 하는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외의 다른 것들을 경배하면 우리는 그 경배 대상에게 산 채로 잡아 먹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배 대상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경배할 대상이 돈과 물질이라면, 그래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돈과 물질에 둔다면, 결코 만족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나의 육체와 외모, 성적 매력이 경배의 대상이라면 항상 불만족할 것이고, 시간이 흘러 얼굴에 주름이 보이기 시작하면, 진짜 죽어서 땅에 묻히기 전까지 아마 백만번은 더 죽게 될 것입니다. 권력을 경배하면 나약함과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두려움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평생 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 할 것입니다. 지식을 경배하면 똑똑해 보이겠지만, 결국 사실 나는 무식한데 남을 속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들통나진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할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해서 스미스가 이 책에서 하는 얘기를 어느 정도 정리했습니다. 정말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에게 신앙이 있든 없든, 여러분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데 정말 도움이 되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비판하고 싶은 한가지는, 대안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스미스는 진단을 참 잘하고, 대안에 대한 큰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큰 그림이 어떻게 우리의 습관과 몸, 사랑과 욕망을 바꾸는 이야기인지 실제적으로, 독자들이 스미스의 글을 읽고 실제로 변화를 경험하도록 이끄는 깊이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자 여러분에게 복음 메세지가 어떤 메세지인지를 실제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가들의 책을 스미스의 책과 꼭 함께 읽으시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이나 내가 만든 신, NT 라이트의 이것이 복음이다 정도의 책을 함께 옆에 놓고 이 책과 같이 읽으신다면 정말 큰 도움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