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관계를 가꿔 나가는 일이다—마이클 세인트 클레어(Michael St. Clair)의 인간 관계와 하나님 경험 (Human Relationships and the Experience of God)
기독교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이 복음이 어떤 메세지인지 잘 알지 못하고 저지르는 많은 실수나 오해들을 살펴보면, 자신들의 신앙을 하나님이라는 완전히 다른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대신,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같을 거라고 아무 근거 없이 은연 중에 상정하고는,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거야” 혹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겠지”라는 식으로, 굉장히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정작 내가 새롭게 관계를 맺게 된 하나님이라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려는데 에너지가 집중되는 대신,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혹은 싫어하시지 않게 하려고) 여러가지 일을 하고 종교적 성취를 이루는 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가 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 생활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꿔가는 것이며, 관계를 가꿔가려면 내가 관계를 맺는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이 그 존재를 기쁘게 하려는 노력에 선행합니다.
필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꿔가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그 분을 무조건 내 방식대로 기쁘게만 하려고 하다가 당면했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래 관계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이러이러한 일들을 하고 봉사를 하고 헌신을 했으니 당신도 내가 인생에서 원하는 것들을 당신께 기도드리면 들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관계를 내 방식대로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로!) 풀려고 하다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화를 내고 하나님과 관계를 끊으려고 하기도 했다는 거지요. 만약 필자가 인간 관계에서 이렇게 했다고 생각해 본다면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무책임한 관계 맺음의 방식인지 금방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대화해 본 경험도 없으면서 무작정 그 사람과의 관계를 내 방식대로 생각하고 무조건 그렇게 관계를 풀어가려고 하다가 안 풀리면 화를 내고 관계를 끊으려고 한다? 아주 미성숙한 관계 맺음의 방식이지요.
문제는 우리의 관계 맺음에서 우리가 과연 상대방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느냐, 관계를 가꿔가고자 하느냐일 겁니다. 우리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주변의 친구들, 가족들, 동료들을 우리는 정말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런 관계 맺음의 노력, 상대방을 알아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채 상대방을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우리가 나름대로 만들어낸 어떤 틀에 그들을 끼워넣고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관계의 의무와 권리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으로 관계를 가꿔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내포하고 있지요. 독자분들 또한 스스로가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지, 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지를 절감하신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관계를 맺는 상대방을 우리 나름대로 단순화시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섣불리 우리가 단순화시켜서 이해하는게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실 쉬운 일은 아니지요.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라는 그림 속에서, 우리와 관계 맺는 사람들이 가지는 의미나 위상이 모두 다른 것은 당연지사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상대방을 일종의 대상(object)으로 바라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현대 심리 분석의 한 학파인 대상 관계론(object relations theory)은 바로 이런 통찰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 세인트 클레어(Michael St. Clair)의 책 인간 관계와 하나님 경험 (Human Relationships and the Experience of God)은 바로 이런 관계의 복잡성에 대해서 다루는 책입니다. 이 서평에서 필자는 세가지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대상 관계론을 간단히 정의하고, 대상 관계론이 개인의 하나님 상을 이해하고 추적할 때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분석합니다. 두번째로, 그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아이가 태어나서 가지는 하나님 상이 어떻게 발달하고 성숙하는지를 추적합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의 삶을 살펴보면서 대상 관계론의 입장에서 어거스틴의 하나님 상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우선 대상 관계론에 대해서 정의해 보겠습니다. 대상 관계론이란 우리가 관계 맺는 물건이나 사람을 일종의 대상(object)으로 상정하고, 그 대상과의 관계 맺음의 경험이 우리의 내면 세계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이론 체계입니다. 독자들 중에는 사람을 대상으로 상정하는 것은 비인격적인 처사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 책의 저자인 세인트 클레어는 다음의 예시를 통해서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합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현재의 위치에 올라선 운동 선수가 미인 아내를 얻었다고 했을 때, 그 미인 아내는 물론 그 선수가 사랑하는 여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아내를 자기의 노력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영어에는 트로피 와이프 (trophy wife)라는 용어가 있지요. 남자가 자신의 노력과 성취의 보상으로 얻게 된 아름다운 여인을 약간 조롱하는 투로 가리키는 말인데요. 여기서 핵심은, 우리의 내면 세계에 새겨진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나 위상이 항상 대상화된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것이 바람직하냐 그렇지 않냐에 대한 가치 판단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관계 맺을 때 그렇게 한다는 관찰의 표현일 뿐입니다.
대상 관계론은 특별히 어린 아이들이 부모와 맺는 관계를 관찰함으로써 아이들이 부모를 안정감과 존재 가치를 제공해주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점점 성장하면서 그러한 안정감과 존재 가치를 부모에게서 독립적으로, 다른 대상으로부터 발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상(God-image)을 대상 관계론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일은 어떤 유익을 줄까요? 일단 우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상 관계론 연구자들을 비롯한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각 개인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진 이미지, 즉 개인의 하나님 상은 그 사람의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발견이 첫번째 유익일 것입니다. 즉 적어도 사람의 어린 시절 동안에는, 그 사람의 하나님 상(God-image)은 그 사람이 바라보는 부모 상(parental images)과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하나님 상은 부모 상과 같은 상태로 그대로 평생을 가기도 하고, 또는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성장하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는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한 나름의 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앞으로 논문 복습 서평 코너에서 다루게 될 애나 마리아 리주토(Ana-Maria Rizzuto)같은 정신과 의사는 무신론자들을 자신이 가진 하나님 상을 거부한 사람들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 상이 없는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나님 상을 거부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된다는 것이지요. 사실 대상 관계론이 속한 심리 분석이라는 학파는 잘 알려진대로 지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가 개척했는데요. 프로이트는 종교와 하나님을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게서 끌어낸 허상, 즉 아이가 어린 시절 자신의 욕구나 바램을 채워줄 만한 지니(genie) 정도의 꾸며낸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상(God-image)은 아이가 성숙하게 되면서 (즉 아버지가 예전처럼 거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저절로 버리게 되는 것으로 보았지요. 이런 면에서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성인이 된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상은 퇴행적인 것, 미성숙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개인의 하나님 상이 성숙하고 발전하는 일은 없는 걸까요? 앞서 언급했던 정신과 의사인 애나 마리아 리주토(Ana-Maria Rizzuto, 1932-)는 프로이드의 이런 퇴행적 종교 이해를 넘어서서, 개인의 하나님 상을 대상 관계론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했고, 그 결과 종교와 심리 분석의 관계를 적대적인 차원에서 좀 더 호혜적인 차원으로 한단계 격상시킨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리주토에 의하면, 개인의 하나님 상은 다른 모든 관계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사람들에 대한 상(image)이 좀 더 성숙한 것으로 발전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는 것처럼, 하나님 상 또한 좀 더 성숙한 것으로 발전하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이 만나서 교류하고 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게 됩니다. 서평 쓰는 남자는 리주토의 대표작인 살아 있는 신의 탄생(The Birth of the Living God) 을 서평할 계획이니까 기대해 주시고요. 하나님 상 연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리주토의 이 책은 거의 필독서가 되었기 때문에, 독자분들도 이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이 책은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두번째로, 그렇다면 아이가 태어나서 가지게 되는 하나님 상이 아이가 가지는 부모 상과 거의 대동소이하다면, 이런 하나님 상은 어떻게 발전하게 되는 걸까요? 세인트 클레어는 이 과정이 크게 5단계로 나뉜다고 보았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아이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어머니와 자신을 일체화하면서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아이가 처음으로 가지게 되는 하나님 상은 어머니의 모습인 경우가 많다고 많은 대상 관계론 연구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두번째 단계는 아이가 어머니와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하면서 독립성을 획득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동시에 아이는 어머니와는 또 다른 제 3의 인물(아버지)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아버지를 어머니를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하는 잠재적 투쟁 대상(인 동시에 동경과 갈망의 대상)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드가 말한 오이디푸스적 갈등(oedipal conflict)의 시초가 됩니다. 이 시기에 아이가 가지는 하나님 상은 어머니의 그것과 아버지의 그것이 혼합된 것일 확률이 당연히 높아집니다. 그 다음, 세번째 단계에서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자아상을 서서히 획득해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상 또한 점점 더 복잡성을 가지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얻어낸 하나님 상이 이 시기부터는 점점 더 독립적인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이 염두에 두셔야 할 것은, 비록 아이가 이런 단계를 거쳐서 발달을 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하나님 상 또한 계속적으로 성숙한 발달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자신이 경험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생긴 하나님 상, 그리고 이후의 경험 속에서 생긴 하나님 상을 거부하고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렇게 생겨난 하나님 상을 그다지 개의치 않고 살아가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신앙 경험—즉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서 자신의 하나님 상을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성숙한 단계로 발전시키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상의 발달 단계가 자동적이고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각 개인의 삶의 내러티브에 따라서 상당히 다양한, 거의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 만큼의 가짓수를 가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번째 단계 이후 이어진 네번째 단계에서는 아이가 사춘기를 경험하게 되는데요. 세번째 단계에서 시작된 관계 맺음의 방식이 성숙하게 되기 시작하는 단계가 바로 이 단계입니다. 하나님 상 또한 좀 더 보편적인 모습으로, 아버지나 어머니와는 독립된 존재로 보이기 시작하는 하나님이 점점 더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단계에서 사춘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면서 사람은 비로소 부모를 통해서 형성된 자신의 가치관이 부모의 그것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상 또한 부모의 그것과는 독립된 경향을 보이며 (물론 어린 시절 부모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발전하게 될수도 있고, 멈춰 있을 수도 있으며, 혹은 아예 퇴행을 경험하기도 하는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 상을 알지 않고는, 이렇게 일반적으로 하나님 상이 어떻게 발달하느냐의 얘기를 일관성 있게 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다만, 아이의 하나님 상이 아이가 가지는 부모상에서 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으며, 점차적으로 아이가 성장하면서 아이의 하나님 상은 부모상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궤적을 가진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 합니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이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좋은 경험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부모를 의지하고 따를 만한 분으로, 존경할 만한 분으로 인식하면 할수록 그 아이의 하나님 상 또한 긍정적인 것, 사랑에 기반한 그것이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유년기와 성장기에 이런 좋은 부모님 밑에서 성장했기에 좋은 하나님 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신앙이 저절로 성장할 것라는 것을 담지하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애나 마리아 리주토는 자신의 연구에 참가했던 피오렐라 도메니코(Fiorella Domenico)라는 여인의 경우를 통해서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피오렐라는 유복한 가정에서 좋은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성장해서 좋은 남자를 만났고, 열여덟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됩니다. 피오렐라는 두명의 자녀를 가지게 되었고, 성인기를 별 탈 없이 잘 보내게 됩니다. 여기까지 보면, 피오렐라의 하나님 상은 굉장히 잘 세워져 있을 거라고 보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실제로 피오렐라 또한 자신이 이 시기까지 믿었던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다가 그녀가 서른 여덟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고, 2년 후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 이듬해에 그녀의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딸이 결혼을 했습니다. 딸이 결혼하자마자 피오렐라의 남편은 신장 결석에 걸리게 되고, 피오렐라는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리주토에 의하면, 바로 이 시점부터 피오렐라는 공포 증상을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에 가서는 앞자리에 앉는 것에 병적인 공포를 느끼게 되고, 남편이 병상에 있으면서 그녀는 남편마저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동시에 피오렐라는 폐소공포증을 경험하게 되고, 사람들이 자기를 쫓아온다는 식의 병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계기가 되서 피오렐라는 리주토를 만나게 되고, 리주토는 피오렐라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 후에, 비록 피오렐라가 어린 시절과 성장기 좋은 부모님과의 관계를 통한 좋은 하나님,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상을 형성했지만, 그 이후에 부모님으로부터 심리적 독립 및 분리에 실패하면서 이후에 자신에게 닥쳐올 세상의 험한 것들에 맞서게 해줄 수 있는 하나님 상을 형성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오렐라는 일종의 인지부조화를 경험하게 되었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왜 자신의 부모님을 앗아가시고, 심지어 남편까지 빼앗아가려고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끊임없는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린 시절에 사랑이 많으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 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그런 하나님 상에 머물기만 해서는 인생이라는 혹독한 현실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되며, 오히려 그런 무조건 받아주기만 하고 보호해주시기만 하시는 하나님 상 때문에 심각한 병증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도, 또 성경이 말하는 그 분의 사랑도 이런 것이 아니라는 점은 성경을 조금만 읽어도 명확해 집니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에 생긴 하나님 상은 사람들이 현실에 대처하게 해주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이런 하나님 상은 반드시 부모로부터 벗어난 이후에 독립적인 나만의 하나님 상으로 재형성되는 과정을 거쳐야 온전한 신앙 성장의 잣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면에서 히포의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통해서 살펴본 어거스틴의 하나님 상에 대한 고찰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이 피오렐라의 하나님 상이 가진 문제점을 어거스틴의 그것과 비교하시면서 남은 서평을 읽어보신다면 아마 상당히 흥미로우실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의 저자인 세인트 클레어는 어거스틴 외에도 성녀 데레사(St. Therese of Lisieux)의 자서전인 소화(Little Flowers)를 통해서 데레사의 하나님 상에 대한 분석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만, 이 서평에서는 상대적으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어거스틴의 하나님 상에 대한 분석만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의 경우, 피오렐라와는 달리 계속적으로 부모님을 통해서 형성된 하나님 상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청소년기부터 그의 삶 전반을 지배한다고 세인트 클레어는 말합니다. 고백록에 나오는 바에 의하면, 어거스틴의 아버지는 이교도(pagan)였던 패트리시우스(Patricius)였고, 어머니는 잘 알려진대로 그리스도인인 모니카(Monica)였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가지는 흥미로운 점은, 어거스틴이 자신의 남동생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식으로 딱 한 번 언급하고, 그의 이름도 (내비기우스) 밝히지 않을 뿐 아니라, 여동생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 자체를 안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부모님에 관해서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아버지인 패트리시우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어머니인 모니카와의 관계에 할애합니다. 학자들은 이런 경향성은 어거스틴의 삶에 아버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머니였던 모니카의 영향이 컸다는 반증이라고 보며, 우리가 이제껏 분석한 바와 같이 이런 경향성은 어거스틴의 하나님 상 형성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모니카가 어거스틴의 삶에 차지하는 이런 비중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나를 당신 곁에 두는 걸 너무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긴 하겠지만, 우리 어머니의 경우는 다른 어머니들보다 훨씬 더 그랬다.” (고백록 5권 8, 9)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하나님 상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머니인 모니카가 아들인 어거스틴과의 관계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모니카가 상당히 강한 여성이었다는 점입니다. 고백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어머니도 우리와 함께 계셨다. 성별로는 여성이었지만, 남성의 믿음을 가진 분, 연수(years of age)와 함께 침착함,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건이 늘어가시는 분” (고백록 9권 4). 이렇듯 어거스틴은 자신의 삶 속에서 어머니의 지대한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이 그렇게 어머니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만큼이나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건강한 성인이라면 사실 성장하면서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이미 언급했듯이, 대상 관계론 또한 그러한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정상적이며 필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거스틴은 어머니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 두가지 일을 한다고 세인트 클레어는 말합니다. 첫번째는 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하셨던 첩을 들이는 일이었고, 두번째는 마니교를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분석은 아마 그다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어거스틴이 첩을 들이고 마니교를 받아들였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반항이었을 겁니다. 굳이 첩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가치 판단을 통해서, 혹은 마니교에서 어떤 탁월하게 좋은 점을 발견해서 마니교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분명히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과 독립의 의지가 이런 행동들에 담겨 있었다는게 세인트 클레어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판단입니다. 하지만 어거스틴 또한 나이가 들고, 지혜가 자라고, 점점 더 성숙하게 되면서 자신이 어머니를 통해서 배웠던 것들, 예를 들면 자기 성찰하는 습관이라든지—이것이 바로 고백록을 쓰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관계에 대한 통찰을 어머니로부터 배웠다고 인정해도 괜찮을 정도가 되었고, 고백록에서 볼 수 있듯이, 어거스틴이 그리는 하나님은 이미 상당히 복잡하고 다면적인, 성경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어머니와 연결해서 이해했다는 사실이 고백록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내 몸이 자라고 내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나는 여인의 모유를 먹었다. 하지만 나에게 젖을 준 분은 단지 나의 어머니나 유모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 당신이셨다… 그들 안에 당신께서 심어두신 사랑이 나를 키웠고, 자라게 했다”(고백록 1권 6). 이외에도 고백록을 읽어본 독자들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머니와 떨어뜨려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심을 보게 될 겁니다.
서평을 마치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독자들에게 그 생각을 질문 형식으로 나누고 서평을 마치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피오렐라의 하나님처럼 사랑이 많으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시지만, 여전히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주시는 분은 아니신가요? 독자 여러분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습을 주로 어디서 발견하십니까? 삶의 경험에서,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말하는 목회자들이나 신앙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니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이 모든 질문들은 독자 여러분들이 건강하고 온전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상을 그려나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 주제를 가지고 서평을 쓸 계획인데, 함께 여러가지 생각과 지혜를 키워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번 서평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