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삶(wholehearted living)의 10가지 특징–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의 불완전함의 선물(The Gifts of Imperfection)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부정적인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은, 우리의 감정이 전체적으로 무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브라운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견디기 힘들어서 그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무뎌지게 만들면, 우리는 점차적으로 긍정적인 감정 또한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정에 무뎌지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도 무뎌지게 됩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게 되는거죠. (서평 중에서)
온전한 삶(wholehearted living)이란 어떤 삶일까요? 온전하다는 것은 나뉘어짐이 없이 통합된, 우리 삶에서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우리의 내면에 모순이나 불일치가 없는 (혹은 점점 그런 모순이나 불일치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가는), 겉과 속이, 내가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과 내 진정한 모습이 하나로 통합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삶의 반대 개념은 무엇일까요? 흥미롭게도, 목회 상담 학자이자 임상 심리 연구가인 Chuck DeGroat는 자신의 책 Wholeheartedness에서 영성 지도가이자 수도사인 Steindl-Rast 형제를 인용하면서 온전한 삶의 반대 개념이 고갈(exhaustion)이라고 답합니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직관에도 반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삶의 반대는 분열된 삶이거나 혹은 망가진 삶일 텐데, 고갈(exhaustion)이라는 단어는 그런 느낌보다는, 상당한 노력을 무언가를 위해서 퍼부은 후에 찾아오는 나른함과 지침을 표현하는 단어라는 느낌이 강할 뿐, 온전한 삶의 반대일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갈의 반대는 휴식이나 놀이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은데, DeGroat는 Steindl-Rast 형제와의 대화를 통해서 고갈이 단지 피곤하거나 지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드러냈을 때 그걸 그 자체로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들과의 풍성한 관계를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는, 즉 나의 내면과 외면이 통합될 여지가 전혀 없는 삶의 상태에서 무언가를 위해서 계속적으로 에너지를 소진해야 할 때 찾아오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런 경우의 가장 흔한 예가 될 만한 사람들이 소위 “감정 노동자”분들일 겁니다. 자기의 진심과는 아무 관계없이 항상 웃어야 하고, 항상 즐거운 표정을 지어야 하는, 손님이 화를 내도 웃어야 하고, 자기 감정 표현 또한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오래 살다보면 저절로 고갈이 찾아옵니다. 만약 이런 노동자분들이 자신의 내면을 솔직히 표현할 기회를 일터에서 전혀 얻지 못한채 계속적으로 자기 감정을 억압하고 억누르는, 진짜 자기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도록 계속해서 강요받는다면 분명히 부작용이 생길 겁니다. 일터에서 억지 모습을 강요받는다면 집에 가서 그런 억압으로 인해서 눌린 감정을 풀게 되겠고, 그 말은 곧 우리가 가족과 친구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게 될 것이고, 어쩌면 우리를 멀리 하게 되겠지요. 결국 우리는 누구에게도 우리의 진짜 속내를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는, 외로운 사람들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게 바로 고갈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에너지가 점점 바닥 나게 되는 상황이지요. 고갈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번아웃 증후군이 될 수도 있겠고, 대인기피 증후군이 될 지도 모르겠고요. 또 다른 여러 형태의 개인적, 관계적 문제를 불러 일으킬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하지만 비단 감정 노동자분들만 이런 문제를 겪을까요? 당장 신학 전공자인 제 입장에서만 봐도, 목회자들 또한 이런 문제를 흔하게 겪습니다.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길 때 정말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바를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표현할 용기를 가진 목회자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왜냐고요? 자신이 정말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드러낼 경우에 갈등이 더 격해질까봐 두렵고, 그 때문에 교인들이 행여 교회를 떠나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스스로 깎아내리고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아예 목회를 떠날 생각까지도 하게 되는 경우 또한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의 현실 속에서 굳이 온전한 삶을 추구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저런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말입니다. 굳이 일터에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했다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거나 팽당한다면, 목회자로서 교인들의 인정 대신 버림을 받게 된다면, 저런 개인적 + 사회적 비용을 치르면서 온전한 삶을 추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첫번째로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미 앞에서 얘기한대로 우리는 우리의 내면과 외면이 하나로 통합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 반드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장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함께 그 여파를 고스란히 겪게 됩니다. 애초에 우리가 온전한 삶을 추구한다면 겪을 필요가 없는 아픔을 피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서 굳이 온전한 삶을 추구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비록 온전한 삶을 추구하는 일이 처음에는 녹록치 않을 뿐 더러, 상당한 정도의 개인적 +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지만, 온전한 삶을 계속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바라던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이 따라오는 경향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일관된 방향을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비록 우리를 좋아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우리를 신뢰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내면에 대해서 이전보다 조금 더 솔직해진다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런 모습이 우리의 진심임을 보여준다면, 우리 스스로가 겪는 내적 분열과 억압이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편안함이 사람들에게 왠지 모를 매력으로 다가오게 될 겁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인이신 분들을 위한 대답을 더한다면, 온전한 삶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일관되게 사랑하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의 모습이라면, 그런 삶은 내면과 외면이 분열된 삶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삶을 지향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내면과 외면이 분열되지 않은 삶이 온전한 삶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들 대다수는 도대체 그런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지 감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 큰 그림이 머리 속에 들어 있어야 온전한 삶을 살아내려고 시도라도 해볼텐데, 아예 그런 그림이 없다면 온전한 삶은 요원해집니다. 오늘 서평하는 브레네 브라운의 책 불완전함의 선물(The Gifts of Imperfection)은 도대체 온전한 삶이 어떤 삶인지,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에게 큰 그림을 그려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브라운은 그런 온전한 삶의 특징을 10가지로 요약합니다. 브라운이 찾아낸 온전한 삶의 10가지 특징은 단지 그가 책을 읽고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빌려와서 요약한 것이 아닙니다. 브라운은 오직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답을 들을 뿐만 아니라 답 속에서 묻어나오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온전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된 패턴을 찾아내고, 그 패턴들을 기반으로 온전한 삶의 특징 10가지를 찾아냅니다. (이것은 사회과학 방법론의 하나로, 근거 이론(grounded theory)이라고 부릅니다. 이 방법론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외부의 이론을 끌어들여와서 그들의 삶을 그 이론을 통해서 규정짓고 패턴화하려는 대신, 오직 그들의 삶의 이야기만을 원재료로 사용해서 그걸 기반으로 어떤 이론을 만들어내는 연구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방법론이 근거 이론이라고 불립니다. 선행적으로 만들어진 이론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의 체험을 해석하는 대신, 그들의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론을 만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브라운이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으면서 찾아낸 온전한 삶의 큰 그림을 살펴보기 전에,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삶을 추구하지 못하게 방해하는지를 알아야 할 겁니다. 모든 이들이 삶에서 부딪히는 현실, 온전한 삶을 방해하는 현실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감춘 채 사람들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런 현실은 우선 기준이 되는 시선 자체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입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은 온데 간데 없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기준이 온통 나를 규정지어 버립니다. 그것도 도대체 그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내가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차지해버린 것이죠. 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을까요. 브라운은 그 까닭이 우리 안에 있는 (우리가 마음대로 머릿 속에서 꾸며낸) 완전함을 향한 끝없는 갈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책의 제목이 “불완전함의 선물”인 까닭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내면화하면서 우리의 본 모습을 억압할 때 우리가 감추려고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느끼는 우리의 불완전함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 스스로를 꾸미고 노력할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완전함(perfection)이라는, 어느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브라운의 연구에 의하면,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선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브라운은 그들이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기 위한 방식으로 공통적으로 용기, 긍휼, 그리고 연결(courage, compassion, and connection)이라는 세가지 덕목을 삶에서 규칙적으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이 용기를 내고, 긍휼을 발산하며, 관계의 연결을 추구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은 사랑, 소속감, 그리고 자신의 존재 가치(love, belonging, and worthiness)입니다. 즉 삶의 불완전함을 선물로 받아들이기 위한 방식은 용기, 긍휼, 연결이며, 그를 통해서 지향하게 되는 온전한 삶의 세가지 열매는 사랑, 소속감, 존재 가치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얘기하면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용기가 무엇인지, 긍휼이나 연결은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면, 그리고 그를 통해서 얻게 되는 사랑은, 소속감은, 그리고 존재 가치는 어떤 상태인지를 알지 못하면 브라운이 말하는 온전한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브라운은 이런 세가지 덕목과 세가지 열매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런 덕목이나 열매는 우리가 흔히 듣거나 말하고 지나가지만, 딱히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들입니다. 만약 이런 덕목이나 열매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우리 삶의 이야기라는 정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우선 세가지 덕목 중 용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브라운은 용기(courage)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이 cor라는 사실을 통해서 용기의 원래 의미가 “마음에 있는 것들을 모두 밝힘으로써 생각을 전부 털어놓다” (12)라는 사실을 조명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브라운의 연구에 의하면, 용기란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직하고 솔직하게 밝히는 것” (12)입니다. 수업 중에 모르는 질문이 있을 때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 마감 기한을 채우지 못했을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우리와 대화하는 상대방이 우리의 어떤 면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밝힐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그렇다면 긍휼은 어떤 걸까요? 긍휼(compassion)이란, 그 라틴어 어원 pati(고난)와 cum(함께)에서 드러나듯이 함께 고난 받다(to suffer with)는 뜻이고, 앞의 단어 용기와 연결해서 생각한다면 긍휼이란 누군가가 자신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표현할 때 그런 솔직함과 정직함을 기꺼이 받아주고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13). 이런 긍휼은 ‘회복된 사람-회복되어야 할 사람’(healer-hurt)이라는 일종의 우열 관계에서는 실행될 수 없다고 브라운은 말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어둠과 아픔을 깊이 겪어낸 사람만이 다른 이들의 어둠과 아픔 또한 함께 겪어낼 수 있기 때문에, 긍휼이란 항상 상처입은 치유자들 사이의 관계에서의 덕목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브라운은 긍휼한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경계선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바운더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예스맨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노’(no)를 말해야 할 때, 비록 상대방이 언짢아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스맨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우선 순위에 두는 사람들이지만, 그렇게 해서는 진정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항상 예스맨의 위치에 있을 경우, 우리를 이용하고 부려먹는 상대방을 향한 내적 분노만 쌓일 뿐입니다. 긍휼함은 저 멀리 날아가게 되고요. 그러므로 상대방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그 경계가 명확할 때에만 내 어둠을 내 어둠으로, 상대방의 그것 또한 상대방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어둠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긍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연결(connection)은 어떨까요? 브라운의 연결에 대한 정의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연결이란,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을 봐주고 들어주고 가치 있다고 여겨주는 누군가와의 관계가 형성될 때 생기는 에너지”(19)입니다. 현대 과학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연결되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연결(connection)과 교류(communication)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교류가 많다고 항상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연결이 늘어날 때 교류가 늘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인간 관계에서의 교류를 늘려 감으로써 연결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연결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드러낼 용기를 가지고,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했을 때, 또 다른 이들이 그렇게 할 때 긍휼을 베풀 수 있을 때 경험하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결의 경험을 자주 하는 이들에게는 수치심이 덜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라이징 스트롱 서평에서도 얘기했듯이, 브라운은 수치심을 “관계의 끊어짐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수치심은 연결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감정입니다. 앞의 두가지 덕목과 함께 생각해 보면, 스스로에 대해서 용기를 내어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이미 받아들이고 긍휼하게 여긴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긍휼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수치심이 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이런 용기와 긍휼은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결을 불러오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용기, 긍휼, 연결을 실천할 때 얻게 되는 온전한 삶의 열매들인 사랑, 소속감, 그리고 자기 존재 가치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우선 알아야 할 점은, 브라운이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사랑과 소속감 사이에 긴밀한 연결 고리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우리의 가장 취약하면서도 강력한 자아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바라봐지는 순간, 드러나게 되는 순간이 사랑이 성장하는 순간”(26)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연결과도 관련이 깊을 뿐만 아니라, 연결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키워갈 수 있습니다. 소속감(belonging)의 경우, 인싸(=인사이더(insider)의 속어)가 되는 것(fitting in)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물론 소속감 또한 당연히 연결이라는 경험을 전제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연결이 없이 소속감은 없겠지요. 브라운은 소속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소속감이란, 우리 자신보다 거대한 무언가에 속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원적 갈망이다” (26). 사람들은 흔히 소속감은 인싸가 되면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인싸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나를 맞춰가는 일의 일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소속감을 누리는 것과 인싸가 되는 것은 확연히 다른 경험입니다. 인싸가 되는 일에 관심이 많은 한국 사회가 오늘날 다시 한 번 들어야 할 메세지는 과연 어떻게 해야 진정한 소속감을 누릴 수 있느냐일 겁니다. 브라운은 우리가 사랑을 키워가며 소속감을 누리는 일의 정점에는 우리의 존재 가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실한 존재 가치에서 시작하라” (36). 이런 면에서 우리의 존재 가치는 우리가 누리게 되는 온전한 삶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온전한 삶이 시작되는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용기가 생기고, 긍휼을 실천하게 되며, 다른 이들과의 연결을 경험합니다. 또한 그를 통해서 사랑을 누리며 소속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삶의 절정에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깊은 확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온전한 삶의 방편인 용기, 긍휼, 그리고 연결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사랑, 소속감, 존재 가치를 누리게 해주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서평의 남은 공간에서는 이런 큰 그림을 바탕으로 브라운이 말하는 온전한 삶의 10가지 특징을 각각 간략하게 살펴보고, 책에 대한 평가를 마지막으로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온전한 삶의 첫번째 특징은 진정성(authenticity)입니다. 진정성의 대척점에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인정해주는 내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진정성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모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진정성을 드러내려면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깊은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특징은 자기 긍휼(self-compassion)의 실천입니다. 자기 긍휼의 대척점에는 완벽주의(perfectionism)가 있습니다. 완벽주의는 자기 긍휼을 불가능하게 하고, 계속해서 자기 스스로를 몰아치게 합니다. 혹자는 이런 완벽에 대한 갈망 없이 성장이나 진보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브라운이 말하는 완벽주의는 건강한 자기 성장이나 진보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완벽주의는 그 기준 자체가 다른 이들의 인정과 칭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벽주의는 수치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건강한 자기 성장과 진보는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와는 상관 없이, 우리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가 원하는 성장과 진보를 말합니다. 완벽주의에 기반한 성장과 진보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경멸하고 싫어합니다. 하지만 건강한 자기 성장과 진보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긍휼하면서도, 더 나은 자기 자신을 꿈꿉니다. 즉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바라보느냐, 긍휼을 베푸느냐, 아니면 혹독하게 몰아치느냐가 중요한 차이를 만듭니다.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쳐서 성장과 진보를 이루어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혹독하게 몰아치는 경향이 있고, 수치를 줌으로써 성장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이루어낸 성장과 진보는 결코 애초에 자신이 이루어내고자 했던 목표인 만족스러운 자기 모습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내가 꿈꾸는 “완벽한 나”는 아무도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자기 긍휼에서 진보와 성장을 향해서 달려간다면, 수치심과 불만족 대신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존재 가치에 대한 확신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삶의 세번째 특징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 관계를 잘 견뎌내고 프로세스하는 일입니다. 브라운은 이런 것들을 잘 견뎌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1. 희망을 키워가며, 2. 비판적으로 깨어 있고자 하며, 3. 감정을 무뎌지게 하거나, 스스로의 취약성, 스스로가 느끼는 불편함, 고통 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세가지 모두가 부정적인 상황, 감정, 관계를 잘 견뎌내고 프로세스하는데 있어서 중요하지만, 특별히 마지막 사항인 외부에서 닥쳐오는 부정적인 것들을 무뎌지게 하지 않고 그대로 취약성, 불편함, 고통 등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일이 특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브라운은 모든 이들이 어느 정도는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걸러서, 둔감하게 만들어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브라운에 의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 중 하나가 중독입니다. 외로움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은 알코올 중독에 빠집니다. 자존감이 낮아져서 견디기 어려운 사람은 게임 중독에 빠집니다. 비교 당해서 자신의 자아가 무너진 사람은 성중독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중독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부정적인 것들을 잘 견뎌내고 프로세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브라운에 의하면 이런 것들에 잘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그런 감정, 상황, 관계들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신뢰할 만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성찰하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그런 감정, 상황, 관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에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자기 존재 가치에 대한 확신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부정적인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상은, 우리의 감정이 전체적으로 무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브라운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견디기 힘들어서 그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무뎌지게 만들면, 우리는 점차적으로 긍정적인 감정 또한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정에 무뎌지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도 무뎌지게 됩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게 되는거죠. 다른 이들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사회적으로 성공할 확률을 크게 떨어뜨립니다. 예를 들면 비즈니스는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의 필요와 감정에 민감한 능력을 요구하며, 언론의 경우 대중 여론의 향방에 민감해야 하고, 학자들의 경우 다른 이들의 말을 잘 들을 줄 알아야 사회적 흐름을 잡아낼 수 있고, 마지막으로 목회자들의 경우, 회중들의 갈등과 고민을 알아야 그들을 복음으로 잘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 상황, 관계를 반드시 잘 다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삶의 네번째 특징은 세번째 특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와 기쁨을 잘 키워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상황, 관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프로세스하는 만큼이 감사와 기쁨 또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잘 느끼는 만큼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 회로는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브라운은 여기서 행복과 감사/기쁨을 구분짓습니다. 행복은 외적인 환경이나 여건과 연관되어 있는 반면, 감사/기쁨은 외적인 환경과는 관련이 없는 삶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이것은 특히 신앙인들의 삶과 관련이 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은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런 삶의 태도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선물로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에 대한 깊은 확신이 어떤 외적인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삶의 태도는 쉽게 터득되지 않습니다. 브라운 또한 이런 삶의 태도는 하루 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계속적으로 연습하고 습관화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다섯번째 특징은 삶을 확실하게 만들고 내 마음대로 조절하려는 성향을 뛰어넘어 신뢰와 직관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삶이 불안하고 조절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가진 안전과 안정에 대한 욕구는 계속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삶을 더 안전하게, 안정적으로 만들라고 유혹합니다. 마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듯한 메세지를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보내고, 우리들 중 많은 수가 그 유혹에 넘어갑니다. 하지만 삶을 정직하게 바라볼 때 우리는 삶을 어떤 식으로 다룬다고 해도 조절 가능하거나 안전하게, 확실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브라운은 여기서 우리가 무엇 혹은 누구에 대한 신뢰가 필요한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지나간다는 점입니다. 종교에 대한 얘기를 하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종교적이 되지 않으려는 작가의 우려가 엿보이는 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상이라는 현실 앞에서, 직관과 신뢰를 키워 나가려면 누구 혹은 무엇에 대한 직관과 신뢰인지가 명확해야 합니다. 이 점은 이 책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번째 특징은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브라운은 특히 온전한 삶은 각 개인의 창의성이 온전히 발현되는 삶이라고 규정 지으면서, 비교는 창의성을 죽이는 길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와 비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고정된 틀 안으로 밀어넣고 그 틀 안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가 비교하는 그들에게 순위를 매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은 우리가 비교하는 그 기준만으로는 절대로 설명될 수 없으며, 그렇게 비교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완벽주의를 추구하도록 이끌고, 수치심에 사로잡히게 하며, 불안하게 만들 뿐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성향을 왜 넘어서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가 가진 창의성을 제대로 발현시키기 위해서라는 브라운의 설명이 앞으로 절대 내 상황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지켜 나가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일곱번째 특징은 휴식과 놀이를 즐기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휴식과 놀이의 대척점에는 일 중독과 성취 중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과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내고자 하는 것은 불확실한 삶의 현실 속에서 이미 앞서 설명했듯이 확실성을 획득하려는 성향이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노력과 성취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성향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일할수록, 더 많이 성취할수록 우리는 스스로 더 안정적인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연관지어, 현대 문화는 놀이와 휴식을 은근히 (대놓고가 아닌) 터부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불완전함을 선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놀이와 휴식이 주는 유익을 잘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취와 노력을 통해서 더 나은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성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덟번째 특징은 차분함(calm)과 고요함(stillness)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브라운이 말하는 차분함이란, 복잡하고 불확실한 삶의 현실을 성찰하고 돌아보는 일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겁니다. 고요함이란, 차분함을 통해서 얻어낸 성찰을 기도나 명상같은 영적인 활동을 통해서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꿔내는 일입니다. 이 지점 또한 브라운이 충분히 종교적이 될 수 있음에도, 아니 사실 충분히 종교적이 되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홉번째 특징은 우리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직업을 포함하지만, 단지 직업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관심사와 재능이 단지 우리가 생업으로 삼는 일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특정한 재능과 관심사에 더 많은 크레딧을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아무 능력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처럼 치부됩니다. 직장을 잡으면 직무에 능하지 않으면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치부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적어도 한가지 이상의 재능과 관심사를 가지고 있고, 그런 재능이나 관심사는 꼭 사회에서 크레딧을 주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일을 통해서 사회와 이웃을 이롭게 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삶은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마지막 열번째 특징은 노래와 춤, 웃음을 생활화하는 일입니다. 온전한 삶은 항상 진지하게 굳어 있는 삶이 아닌,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는 삶이기에 그렇습니다. 노래와 춤, 웃음 중에서 브라운은 특히 춤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춤은 여러 압박과 스트레스 때문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말랑말랑하게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자신을 삶이라는 선물에 다시 내던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항상 춤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오던 차에, 브라운이 이런 것들을 얘기해서 상당한 도전이 되었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브라운이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온전한 삶(wholehearted life)에의 프로젝트에서 수치심이 삶에서 저항하고 맞서야 할 부분이라면, 취약성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 삶의 불완전함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삶은 어떤 모양인지를 알아가는데 큰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교리 연구자로서 브라운이 이 책에서 잘 설명한 세가지 덕성과 세가지 열매가 어떻게 기독교 교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서 형성될 수 있는지 다시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책 자체가 오직 브라운의 사회과학 연구 방법론을 통해서 나온 결과에 대한 담담한 개인적 회고와 보고라는 점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은혜가 일반 계시라는 차원에서도 상당히 드러나 있다는 점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구독자 여러분들에게 꼭 브라운의 책들을 실제로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브레네 브라운 읽기 프로젝트는 3권의 책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과연 진정한 소속감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본 Braving the Wilderness의 서평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