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그리고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의 죽음을 대신해서(Instead of Death)
윌리암 스트링펠로우의 책을 벌써 세 권째 서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서평할 스트링펠로우의 책은 그가 원래는 중.고등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좀 넓게 보면 대학교 1, 2학년 정도의 청년들까지를 생각해서 그들이 삶에서 겪는 주요한 이슈들을 가지고 신앙으로 다루려고 했던 “죽음을 대신해서”(Instead of Death)입니다. 책 제목 자체가 흥미로운 질문 두가지를 던집니다. 우선 죽음이란 뭘까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죽음학(thanatology)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을 정도로 죽음 자체에 대한 인간의 사고는 상당히 깊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개신교 개혁주의에서는 죽음 자체에 대한 묵상이 죄에 대한 묵상에 가려서 성경이 말하는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개신교 개혁주의는 죽음보다는 죄를 인간 존재가 당면한 핵심적인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방 정교의 경우 죽음을 죄보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고 신학화를 펼쳐 왔습니다. 때문에 두 전통을 비교하는 일은 상당히 흥미로운 통찰을 전해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앞으로 이런 비교를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저 또한 개신교 개혁주의 전통에서 자라고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에 (죄 말고) 죽음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직 많이 낯선데, 스트링펠로우의 이 책을 통해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얻게 되었고, 앞으로도 죽음에 대한 신학적 탐구를 계속해서 이어가 보려고 합니다.
두번째로 책 제목을 보고 떠오르는 질문은 ‘무엇이 죽음을 대신하는가’일 겁니다. 스트링펠로우의 이 책은 사실 이 두가지 질문에 만족할 만한 정도의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책의 내용이 흥미롭지 않거나 통찰의 깊이가 얕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트링펠로우가 책에서 이미 얘기하고 있듯이 책 자체가 죽음을 할 수 있는 한 깊이 다루려고 했다기 보다는, 청소년 나이대의 학생들이 겪는 삶의 여러가지 이슈들을 통해서 죽음이 그 가공할 능력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살펴보고, 또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어떻게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켜주는가를 간략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스트링펠로우는 세가지 영역-1) 성과 섹스, 2) 일과 경제, 그리고 3) 기술 발전—에서 죽음이 가진 가공할 파괴력을 보여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서평에서는 스트링펠로우의 전반적인 논지를 따라서 죽음 자체에 대한 스트링펠로우의 이해를 간단히 살펴보고, 죽음이 앞에서 언급한 세가지 영역에서 어떻게 그 능력을 드러내는지를 살펴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이런 죽음의 능력을 어떻게 패배시키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죽음이란 뭘까요. 스트링펠로우는 죽음의 가공할 능력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합니다.
여기서 제안하는 바는 죽음의 능력은 널리 퍼지며, 결정적일 뿐만 아니라, 지배적인 최후의 힘이며, 이 힘을 다른 곳만큼이나 미국 사회 안에서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의 삶 그리고 누군가의 삶처럼 한 개인의 삶에서 죽음은 가장 직접적이고 개인적이며 일상적인 중요성을 가진 실재이다. 이생에서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이 죽음에서 의미를 찾고 있는 듯이 보인다. (15-16)
“The suggestion here is that the power of death can be identified in American society—as well as elsewhere for that matter—as the pervasive, decisive, reigning, ultimate power. Therefore, for an individual’s own small life—yours or mine or anybody’s—death is the reality that has the most immediate, personal, everyday significance. In this life, it seems that everyone and everything finds meaning in death” (15-16).
여기서 제가 스트링펠로우가 이해하는 죽음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가 이해하는 죽음이란, 사람을 살리는 길로 이끌지 못하는 가공할 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이 죽음에서 의미를 찾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건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결국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살아갈 수 있는데, 기껏 살아보겠다고 의미를 발견하는 그 원천이 결국 자신 혹은 남을 죽음의 길로 이끄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스트링펠로우는 1) 성과 섹스, 2) 일과 경제, 그리고 3) 기술 발전이라는 세가지 영역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우선 성과 섹스가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에서 의미를 찾게 할까요. 스트링펠로우는 성과 섹스가 특별히 현대 미국의 문화에서는 자신의 자아와 정체성을 찾는 수단으로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꽤나 설득력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성과 섹스는 누군가가 우리를 전적으로 받아준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누군가의 몸을 완벽하게 소유할 정도로 상대방이 나를 받아준다는 경험은 오직 섹스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상대방의 입술과 몸의 구석구석, 그리고 마침내 성기까지 소유해도 될 정도로 상대가 나를 허락했다는 느낌은 나 자신이 상대방에게 완전히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주는 걸 넘어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데 상당히 큰 힘과 용기를 제공합니다. 만약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을 때, 도대체 내가 이 세상에서 왜 살아가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때 누군가가 나를 너무나 사랑해주고, 또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내 것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나를 받아준다면 나의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상대방이라는 답을 얻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곧바로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분쟁이 시작되고, 우리는 상대방이 내 자아와 정체성의 답을 제공해 줄만큼 충분히 우리를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걸 깨닫습니다. 더군다나, 상대방과의 로맨틱한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을 우리의 자아와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상대방을 도구로 이용하게 만드는 경향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나의 유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죽이는 길입니다. 그래서 결국 성과 섹스는 죽음이라는 실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스트링펠로우가 하는 얘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너무나 자주 섹스는 성례전적인 존엄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섹스가 이미 자아를 찾은 사람,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서 광적으로 섹스에 의존할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 스스로를 표현하고 소통하는 방식이 아닌, 자아를 찾는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섹스가 그 자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증명한다거나 자아를 찾아 헤매는 일을 해결해 줄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다른 사람과의 성 경험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아를 찾지도 못할 것이며, 섹스를 나누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지도 못하게 된다. 너무나 자주, 섹스를 통한 정체성의 탐구 자체가 가지는 허무함은 자신의 자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자아 또한 더욱 학대하게 만들 것이다. 섹스를 통해서 정체성을 탐구하는 일은 그렇게 정체성을 탐구하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그런 자아 탐구의 수단으로 이용 당하는 상대방에게도, 이런 저런 형태의 파괴로 끝을 맺는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못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54).
“Too often sex does not have the dignity of a sacramental event because it is thought to be the means of the search for self rather than the expression and communication of one who has already found oneself and is free from resort to sex in the frantic pursuit of identity. It is wrong to assume that sex is in itself some way of establishing or proving one’s identity or any resolution of the search for selfhood. One who does not know oneself and seeks to find oneself in sexual experience with another will neither find self nor will he respect the person of a sexual partner. Often enough, the very futility of the search for identity in sex will increase the abuse of both one’s own self and one’s partner. The pursuit of identity in sex ends in destruction, in one form or another, for both the one who seeks oneself and the one who is used as the means of the search. No one may show another who he or she is; no one may give another life; no one can save another” (54).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성과 섹스를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결국 빗나갈 것이며, 스스로와 상대방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 것입니다. 여기에 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찾은 사람은 더 이상 성과 섹스를 통해서 상대방에게 자신이 갈구하는 것들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과 섹스를 말 그대로 상대방에게 나를 나눠주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줄 알게 됩니다. 더 이상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것들을 찾는 도구로 이용하지도 않습니다. 내 필요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과 섹스가 이끄는 죽음의 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일과 경제는 어떻게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 넣을까요?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일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키는 가장 흔한 수단”(the common means by which human beings seek to justify their existence)(57)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시키는 방식이 거대한 사회 체계로 자리잡게 되면 반드시 그 체계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 사회가 가치 있는 존재 (즉 의인)로 인정하는 사람들과 가치 없는 존재 (즉 악인)로 멸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전자는 그 사회의 도덕적 기준에 합한 사람들이며, 후자는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악한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심각한 문제는, 이런 방식에서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이 누군가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되며,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돈을 못 버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열등한 존재로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지요. 결국 자신들 또한 그런 정당화를 통해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똑같이 죽음으로 내몰릴 것을 마치 전혀 보지 못하는 듯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스트링펠로우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이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보상을 주는 것에 한정된다면, 보상을 받는 이들은 (소위 부유층) 어쩌면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도덕적 열등감을 부여받아야 할, 의존적 계층을 필요로 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78).
Where work is supposed to offer moral justification and is confined to the incident of compensation, those who are compensated (the so-called affluent classes) perhaps need dependent classes to whom they can ascribe moral inferiority in order to fortify their fragile claim to moral superiority. (78)
돈이 보상과 도덕적 우월성의 기준이 될 때 생기는 또 다른 죽음의 결과는 돈으로 보상 받지 못하는 모든 일들이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를 키우는 일, 집안 일, 일자리를 찾는 일 등은 이런 기준에서 보면 별 가치 없는 일이며,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가 돌아가는데 꼭 필요한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경제적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알게 모르게 경시당하며 차별받게 된다는 것이 스트링펠로우의 통찰입니다. 여기서도 죽음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작동합니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정당성을 돈으로 부여받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경시하게 되며,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죽음의 논리에 이미 매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맞서,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공동체는 돈이 모든 일의 기준이 되는 이런 경향성에 저항하도록 부르심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돈에 따라서 줄세우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입니다. 다른 기준, 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기준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빈부격차에 따라서, 성별에 따라서, 인종에 따라서 더 가치 있거나 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나누지 말라고 말합니다. 내가 가치 없게 취급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가치 있다고 해주셨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가치 없다고 하는 사람들 또한 가치 있음을 알고 그렇게 대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진정으로 죽음에 맞서는 저항 공동체이며, 교회가 이 은혜를 제대로 알고 살아갈 때에만 죽음의 엄청나나 힘에 맞서는 저항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술 발전은 어떻게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까요?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기술 발전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기술의 노예가 되게 만듦으로써 인간의 비인간화를 불러 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기술의 발전에 인간이 제동을 걸 여지가 당연히 줄어들 뿐만 아니라, 기술은 마침내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홀로 움직이며 인간의 성찰이나 반성에 아랑곳하지 않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이렇게 발전하는데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은 편리와 이기심입니다. 기술은 계속해서 더 편리한 방향으로, 더 이기심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인간이 이런 발전 방향에 제동을 걸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결국 기술의 발전 또한 인간에게 인간이 원하는 것들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이며, 인간의 노예화를 급속화시킬 것이라는게 스트링펠로우의 진단입니다. 아쉽게도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앞서 얘기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계속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이런 경향에 저항하는 공동체로 남아 있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저항한다고 해서 몰려오는 죽음의 힘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유이며,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속히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스트링펠로우는 이 짧은 책에서 비록 속 시원하게, 아주 자세히 죽음과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다루지는 않지만, 독자분들이 이미 읽어보신대로 짧은 분량의 책에서도 상당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스트링펠로우의 저작을 읽어나갈 것이며, 죽음의 힘이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며 멸망시키는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부활의 역사가 우리를 어떻게 해방시키는지를 더 밝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서평 쓰는 남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