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는 나쁜 감정이기만 할까-이창일 교수의 수치
“부끄러움, 사람을 완성시키는 최소한의 마음,” “수치, 인간을 파괴하는 가장 어두운 감정”
이 두 어구는 이창일 교수의 새 책 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의 뒷표지에 실린 어구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 두 어구의 대비만큼 이 책의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서 이 두 어구의 대비만큼 이 책의 최대 장점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을 것 같고요.
수치는 두 얼굴을 하고서 그림자 속에 숨어 있지만, 어느 얼굴을 들이밀지 모른다. 하나는 파멸로 이끄는 얼굴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처지가 오히려 위험하다는 경고와 함께 분심을 돋우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얼굴이다. 그런 뜻에서 그림자는 모든 사악함과 추함의 총체가 되지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지금보다 더 위에 있는 자신으로 이끄는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193)
저는 이제껏 서양에서 나온 수치에 관한 책들을 주로 탐독해 왔습니다. 특히 가장 대중적으로 수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브레네 브라운의 책들은 한 권도 빠짐 없이 모두 다 읽었습니다.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을 유해하고 해로운 감정으로 읽어냅니다. 브라운은 자신의 질적 연구(qualitative research: 특정 주제에 관해서 사람들과 인터뷰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에서 패턴을 읽어내거나 공통점을 찾아냄으로써 연구를 시도하는 연구 방법)를 통해서 내면화된 수치심이 얼마나 유해한 감정이며, 얼마나 관계를 망치며, 얼마나 자신을 망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블로그의 브레네 브라운 서평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 밖에도 서구권에서 나오는 수치에 관한 책들은 거의 수치를 유해한 감정으로 그려내는 경우가 많고, 그런 책들이 현대 문화 안에서 상당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존 브래드쇼(John Bradshaw)의 수치심의 치유(healing the shame that binds you)나, 거셴 카우프만(Gershen Kaufman)의 수치심: 돌봄의 능력(Shame: the Power of Caring)등은 수치의 부정적 측면을 잘 드러내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들입니다. 저 또한 수치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만을 접하면서 이제껏 수치는 우리에게 안 좋기만 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요. 그러다가 제가 수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기존의 관점으로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대화를 친한 분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들이 갈수록 수치스러운 걸 모르고 세상이 점점 수치에 무감해지고 있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는데요. 그 말을 듣고 저는 약간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제껏 생각했던 수치에 대한 관점으로는 그 분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분이 하신 말씀이 대체로 흔하게 통용되는 말이다보니 어떤 의미인지는 알았지만, 제가 이제껏 공부했던 수치에 대한 관점에서 그 분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감을 잡는데 좀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창일 박사의 이 책을 읽고 그 분이 하신 말씀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창일 박사는 이 책에서 수치는 두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래쪽 얼굴과 위쪽 얼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박사는 이 책에서 아래쪽 얼굴을 기존의 서구 문화에서 유해한 감정으로 분류된 수치심이라고 말하며, 위쪽 얼굴을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이창일 박사는 수치와 구분되는 부끄러움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양 전통을 끌어옵니다. 이창일 박사는 황태연 교수의 수오지심(羞惡之心: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에 대한 설명을 인용하면서 부끄러움이 수치와 어떤 면에서 다른지 이해하기 쉽게 도와줍니다.
수오지심은 자신의 잘못을 타인이 알게 되어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수치심이고 남의 잘못된 행동을 알고 미워하는 정의감이다…. 수치심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나의 도덕적 평가는 남이 잘못하는 경우에 즉각 남에 대한 미움으로 바뀌고, 역으로 남에 대한 도덕적 미움에 담긴 나의 평가는 내가 잘못하는 경우에 즉각 나에 대한 수치심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잘못과 관련된 부끄러움과 미움, 즉 수치심과 정의감은 상화 대응하고 상호 전환한다. 이런 까닭에 맹자가 일찍이 수치심과 미움을 수오지심이라는 하나의 복합 감정으로 묶은 것은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240)
맹자는 수치심을 정의와 하나로 묶고 있다고 황태연 교수는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맹자에게 부끄러움은 내면화된 수치심이 인간을 좀 먹고 병들어 죽게 하는 것과는 달리, 잘못된 곳으로 가지 않게 방향을 잡아주는 내비게이션 같은 역할을” (241)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면화된 수치심, 유해한 감정으로서의 수치심은 이런 의로움의 방향타가 되어주는 부끄러움과는 다릅니다. 이창일 박사는 이미 언급했던 존 브래드쇼가 수치심에 대한 자신의 책에 남긴 헌사를 인용합니다.
(아내에게)… 당신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에 나는 나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소.
(친구와 아들딸에게)… 내가 그동안 나의 수치심을 너희에게 전가시키며 괴롭힌 것을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이 책을 내 아버지에게 바칩니다. 아버지, 당신은 당신의 수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삶까지도 망쳐 놓았습니다. (221)
여기서 말하는 해로운 감정으로서의 수치란, 의롭지 못한 일 앞에서 스스로를 다잡아주고 방향타가 되어주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나는 부족해. 나는 못났어. 나는 살 가치가 없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이게 만드는 감정, 결국 앞에서 브래드쇼가 고백했듯이 계속 자신을 그렇게 학대하다보니 그 학대가 자신에게서 멈추지 않고 주변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까지 망쳐놓게 되는 감정을 가리킵니다.
그 밖에도 이창일 교수는 이 책에서 여러 학문을 넘나들면서 수치가 어떤 기제를 가지고 작동하는지, 어떻게 해를 끼치며 어떻게 유익하게 하는지를 잘 설명합니다. 책의 뒷표지에 나와 있는 수치의 두 얼굴에 대한 여러 사상가들의 명언은 이 책의 주된 메시지가 바로 그런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을 완성시키는 마음으로서의 부끄러움이란?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윤동주-
- 홀로 있을 때에도 부끄럽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할지니 -위 무공-
-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더 이상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맹자-
- 덕으로 인도한다면 누구나 부끄러움을 깨달을 수 있다 -공자-
- 나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바탕으로 삶의 앞으로 나아갔다 -카를 융-
사람을 파괴하는 감정으로으로서의 수치란?
- 수치는 불명예에 대한 고통이자 두려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수치는 죽을 수 밖에 없게 된 인간의 육신에 남은 죄의 법이다 -아우구스티누스-
- 수치는 벌거벗었다는 자의식을 전제로 하며, 곧 죄책감으로 흡수된다 -에릭 에릭슨-
- 시스템에 의해 내면화된 수치는 인간을 괴롭히는 가장 위험한 악마다 -존 브래드쇼-
이제껏 서구 학문에서는 수치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창일 교수는 그 까닭을 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이 쓴 유년기와 사회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수치심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감정인데, 이는 우리의 문명에서 그것이 너무나 일찍 그리고 쉽게 죄책감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개인이 그것을 의식하는 상태, 즉 자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치 밤에 잠잘 준비를 하며 “바지를 내리고 있을” 때 누군가 우리를 쳐다보는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215)
그렇다면 왜 수치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을까요? 일단 현대 심리학의 두 기둥인 프로이트와 융이 수치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수치라는 감정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후예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왜 프로이트나 융은 수치를 말해야 할 곳에서 정작 수치를 말하지 않았는가? 프로이트는 수치 대신에 죄의식에 관심을 경주했고, 융은 수치는 덜 말하고 그림자를 많이 말했다.” (183)
프로이트와 융이 수치심을 말해야 할 곳에서 말하지 않았던 것은 크게 보면 서구 신학의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스테파니 파렐은 최근 낸 자신의 책 Affect theory, Shame, and Christian formation이라는 책에서 어거스틴 또한 수치심에 대해서 분석하기를 거부했었으며, 그런 영향이 계속해서 서구 전통 안에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을 자세하게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간의 한계상 여기서 파렐의 책을 자세하게 분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파렐을 비롯해서 여러 학자들, 특히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 가운데 수치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대표적으로 에모리 대학교에서 루크 티머시 존슨 박사에게 사사하고 현재는 시카고의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중국계 미국인인 테-리 라우 (Te-Li Lau)교수는 자신의 박사 논문을 책으로 펴낸 Defending Shame: Its Formative Power in Paul’s Letters에서 바울이 수치심을 유익한 쪽으로 (즉, 맹자가 바라보았던 식으로) 바라봤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형성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했었다는 점을 자세한 주해와 역사적 분석을 통해서 분석합니다. 또한 바이올라 대학의 그렉 텐 엘쇼프(Gregg Ten Elshof) 교수는 2021년 9월에 For Shame: Rediscovering the Virtues of a Maligned Emotion이라는 책에서 역시 라우 교수와 마찬가지로 수치가 단순히 해로운 감정이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한 양태를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 복잡한 감정이라는 점을 자신의 전공인 철학으로 접근해서 보여줍니다.
저는 이런 흐름 속에서 계속해서 앞으로도 수치에 관한 중요한 저작들을 읽어 나가면서 이 블로그에서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왜 기독교 복음 안에서 수치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글을 쓰려고 합니다. 앞으로 기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