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현장 연구』(Fieldwork in Theology)의 저자 크리스천 샤른(Christian Scharen)은 요즘 한창 떠오르고 있는 소위 신학적 민족지학(theological ethnography)의 선두 주자이자, 기독교 교리, 특히 교회론을 접근하는 데 현장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Ecclesiology and Ethnography Network라는 그룹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학생, 연구자, 학자, 목회자를 대상으로 자신의 신학적 민족지학에 큰 영감이 되어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민족지학적 연구를 살펴봅니다. 이 책은 부르디외의 사회 과학적 현장 연구가 어떻게 신학적으로 차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부르디외라는 사상가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소개를 원하는 분들에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샤른이 이야기하는 신학적 현장 연구를 실행하기에 가장 적합하면서도 그러한 연구가 주는 열매를 가장 달게 누릴 사람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결국 지역 교회의 목회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의 지역 목회자들은 현장 연구에 대한 관점과 이론적 도구를 조금만 갖추게 된다면 굳이 학자들이 진행하는 식으로 연구를 하지 않더라도, 그 본질적인 취지를 살린다는 의미에서 매우 효과적인 신학적 현장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샤른의 책이 주장하고자 하는 흐름을 따라가 보면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샤른의 책이 시작하는 지점은 기존의 교회론이 가진 이상주의적 성향입니다. 특히 샤른은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이 쓴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Resident Alien, 복있는 사람 역간)을 대화 상대로 삼고 논의를 진행합니다.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의 책은 교회의 교회됨을 강조하면서 교회가 그 신앙적 정체성에 있어서 확고해지면 해질수록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우어워스는 실제로 자신의 이런 주장 때문에 종종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곤 했습니다. 샤른이 하우어워스의 교회론에 있어서 문제로 지적하는 점은 그의 교회론이 정말로 분리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느냐와는 별개로, 미국의 교회가 여전히 문화적, 사회적으로 다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교회가 소수가 되어버린 것처럼 그려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묘사하다 보니 교회의 교회됨이라는 말을 통해서 은연 중에, 어쩌면 무의식적으로(혹은 의식적으로) 세상을 향한 교회의 태도를 약간은 전투적이 되도록 조장했다는 점입니다.
필자 또한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를 하던 시절 하우어워스의 책들을 읽으며 열광했었던 적이 있었기에, 샤른의 이런 비판이 수긍할 만한 부분이 분명히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샤른이 바라보는 하우어워스의 교회론이 가진 치명적 약점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그의 교회론이 이상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미리 그림을 그려놓았지만, 실제로 그가 그려놓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는 데는 실패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죠. 하우어워스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모범이 되는 사람 몇 명(예를 들어 메노나이트 신학과 평화주의의 선구자인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혹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외에는 별다른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 이런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결국 하우어워스가 가진 교회론은 교회의 실제 모습에 대한 관찰과 실제로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대한 귀 기울임에 바탕을 둔 교회론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실제 모습을 무시하고 현실과는 별 관련이 없는, 다시 말해 그가 미리 자신의 교회론의 기초로 삼기로 마음먹은 철학적 신학에 바탕을 둔 이상적인 교회의 비전을 덧입혀 버리는 교회론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샤른이 하우어워스를 비판하는 점은 교회론에 있어서 철학적 신학이나 비전의 무용함이 아니라, 그러한 철학적 신학적 비전이 언제든지 철저하게 현실과의 대화 속에서 나와야 하는데, 하우어워스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 자세하게 관찰하고 살피지 못한 채 지나치게 이상적인 (또한 전투적인) 교회론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공동체
샤른이 하우어워스의 교회론이 보여주는 치명적 약점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만한 신학적 파트너로 택한 인물은 성공회 주교이자 탁월한 신학자로 알려진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입니다. 특별히 샤른은 윌리엄스가 제시하는 케노시스 신학에 바탕을 둔 ‘내어줌의 실천’(practice of dispossession)을 좀 더 현실과 세상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도와주는 신학적 비전으로 제시합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신학자 중 한 명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의 케노시스 기독론에 깊은 영향을 받은 윌리엄스는 교회의 교회됨이란 세상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듯이 내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케노시스 기독론의 배경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당신을 내어주셨기에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되실 수 있었음을 주장하며, 성령과의 관계 또한 그러한 내어줌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주장하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의 케노시스적인 삼위일체론이 깔려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논의는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교회론적 비전이 하우어워스의 교회론과 비교해 볼 때 딱히 현실에 처한 교회가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 있어서,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더욱 귀 기울일 수 있게 해주는데 있어서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해 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가 세상과 현실을 만나는 태도에 있어서 조금 더 열린 자세, 그리고 교회 또한 많은 경우 세상 앞에서 회개가 필요하며 완벽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고 알고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인식적 측면을 포함한 여러 면에서 깨어지고 부서진 공동체라는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셔야 했던 공동체였다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은 하우어워스나 윌리몬의 교회론이 은연 중에 풍기는 자기 확신적이고 충족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교회로 하여금 조금 더 쉽게 자신들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할 수 있게 해주고, 교회 또한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게 해준다는 면에서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른 또한 이런 신학적 비전이 직접적인 신학적 현장 연구에의 동기를 제공해주지 않음을 알고 있었던 까닭인지, 윌리엄스가 이런 신학적 비전을 주창했으면서도 딱히 현장 연구에 뛰어들고 있지는 않음을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 니콜라스 힐리(Nicholas Healy)가 윌리엄스를 언급한 것을 들어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아비투스’를 통한 현장 참여의 신학
궁극적으로 샤른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현장 연구 이론과 방법론이 신학적 현장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은 부리디외의 사상적 계보를 이루는 인물 일곱 명(샤르트르, 레비-스트라우스,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 가스통 바슐라르, 메를로-퐁티)을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면서 지나가는데, 필자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몸 철학을 주창하다시피 했던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구조주의의 선구자였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라우스에게 부르디외가 받았던 영향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부르디외의 현장 연구론의 핵심을 설명하는데 이들의 사상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들의 이론을 간단히 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만, 샤른은 전체 100쪽이 약간 넘는 책에서 그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나름 해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에 따른 단순화의 폐해는 피할 수 없는 약점이 될 것 같긴 합니다.
샤른에 따르면, 메를로-퐁티의 경우 인식의 주체는 데카르트가 얘기했듯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단이 가능한 의식(consciousness)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몸으로서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따라서 몸이 가진 위치적, 역사적 한계가 그대로 인식에 반영되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점이 부르디외의 현장 연구론입니다. 특별히 연구자 자신이 현장 연구를 진행하면서 자신이 가진 관점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건설적일 수 있어야 한다는 부분(이것을 self-reflexivity라고 부릅니다)이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언급합니다.
메를로-퐁티가 부르디외에게 끼쳤던 영향이 긍정적인 것이었다면, 레비-스트라우스의 구조주의는 부르디외가 자신의 현장 연구론을 정립하면서 반면교사로 삼았던 사상가입니다. 초기에 부르디외는 레비-스트라우스의 구조주의에 동의했지만, 구조주의에 바탕을 둔 현장 연구는 인식적인 측면에서 마치 연구자가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보다 그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즉 연구자가 연구 대상과의 관계에서 상대적 특권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구조주의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그에 대한 반박으로 현장 연구론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아비투스’(habitus)와 ‘장’(field) 개념을 내놓게 됩니다. 이 두 개념은 모두 연구자가 연구 대상과 연구자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식적 한계, 그리고 그에 따른 비판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부르디외는 축구 경기를 들어서 이 두 개념을 설명하는데, 일단 일반적 정의를 내려보면 이렇습니다. ‘장’(field)은 사회의 특정 영역에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관계들의 총칭입니다. ‘아비투스’(Habitus)는 ‘장’을 구성하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관계들이 인식 주체의 인식과 행위에 녹아 들어 인식 주체의 몸을 이루게 된 것을 말합니다. 축구 경기를 통해서 보자면, ‘장’이란 축구 경기의 규칙, 경기장의 범위, 목표, 경기를 통해서 가능한 행위 등을 총칭하는 것이며, ‘아비투스’란 축구 선수가 이러한 ‘장’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여서 알고 인식하게 되어 실제 축구 경기 속에서 보여주는 모든 경기 행위 및 관계를 가리킵니다. 이런 까닭에 부르디외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몸은 사회적 세계 안에 존재하지만, 사회적 세계도 몸 안에 존재한다”(The body is in the social world but the social world is in the body). 이렇게 볼 때, 연구자는 연구 대상의 인식에 대해서 자신의 연구로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연구자가 연구 현장 속에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 녹아 들어갈 때, 연구자 또한 어느 정도 연구 대상의 ‘장’을 알게 되고 그들의 ‘아비투스’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연구 대상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합니다.
신학이란? 현실과 세상에 귀 기울이기
전체적으로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부르디외의 현장 연구론이 어떻게 신학적 현장 연구론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샤른은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윌리엄스라는 좋은 신학적 파트너를 통해서 부르디외의 현장 연구론을 신학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고 하더라도, 윌리엄스는 샤른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현장 연구를 전개하는 신학자가 아니라는 점과 윌리엄스의 신학이 어떻게 부르디외의 현장 연구론과 끈끈하고도 치밀하게 연결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가 많이 부족합니다. 둘째, 비록 이 책이 가진 목표가 부르디외의 현장 연구론을 신학적 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함을 주장하는 것이기에 그의 사상을 간략하게 소개한 것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신학적 현장 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독자들에게 별다른 답을 주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차치하고라도, 궁극적으로 부르디외가 자신의 현장 연구론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태도는 현실과 세상에 대한 주의 깊은 귀 기울임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과 그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하는 모든 행위와 관계들, 이 모든 것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바로 현장 연구자들입니다. 샤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신학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주의 깊은 귀 기울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굳이 어떠한 학문적 체계나 방법론을 엄격하게 따르지 않더라도, 이런 류의 세상과 현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깊은 귀 기울임을 통해 신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결국 지역 교회의 목회자들이 될 것입니다. 목회 성공을 위해 특정 교회에서 성공했다는 프로그램이나 강사를 찾아다니는 일이 일상화된 한국 교회의 현장에서 샤른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교회의 신학함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울러 신학적 현장 연구론을 통한 신학함이라는 신학적 비전에 대한 교육이 전무한 한국의 신학교 교육 현장에도 부르디외의 현장 연구론과 샤른의 신학적 현장 연구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샤른과는 약간 다른 스펙트럼에 서 있지만, 역시 동일한 필요성을 주창하는 목회자로 팀 켈러(Tim Keller)가 떠오릅니다. 켈러 또한 『중심 교회』(Center Church)라는 책에서 신학적 비전이 목회자의 “현장 연구”에서 나와야 함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교리는 각 목회자가 처한 현장에서 사역 대상들과의 충분한 교류를 통해서 번역되어야 하며 치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교리도 무용지물이 되며, 결국 목회자는 잘된다는 프로그램이나 잘한다는 강사들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샤른의 『신학적 현장 연구』는 목회자들이 명심해야 할 중요한 자세의 변화를 역설하고 있으며, 신학교 교육에도 반성의 여지를 남기는 중요한 책으로 판단됩니다.
LIKEELL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