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러 신학 살펴보기(Engaging with Keller)는 현재 나와 있는 유일한 팀 켈러 신학 관련 비평서입니다. 이런 류의 책이 앞으로 또 나오게 될 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서평자 개인의 바램으로는 켈러 신학에 대해서 좀 더 본격적이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비평을 가하는 책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래봅니다. 그 까닭은 이 책이 두가지 중요한 이유에서 켈러 신학에 대한 제한적인 비평을 가하고 있기 때문인데, 첫번째로 이 책의 저자들이 모두 보수적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속한 교회 개척 목회자들 혹은 신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애초부터 켈러의 신학이 기독교 세계 전체에 끼칠 수 있는 영향보다는, 좀 더 좁은 차원에서 켈러 신학이 장로교의 전통적 신조와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책을 쓰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일곱명의 저자들이 켈러의 죄론, 심판/지옥론, 삼위일체론, 교회론(1. 교회의 사명과 사회 정의 사이의 관계 / 2. 장로교 성찬과 교회론), 과학-신앙의 관계, 해석학, 이렇게 총 7가지 분야로 나누어서 비평적 에세이를 쓴 모음집입니다.) 따라서 장로교 전통에 속하지 않은 독자들 중에서 켈러 신학이 가진 긍정적이고 잠재적인 기여 가능성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일견 편협한 시각으로 켈러 신학을 제단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는 이 책을 그다지 좋게 바라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7명의 저자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호혜적인 대화를 추구한다는 것을 책머리와 말미에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에, 또 실제로 그런 모습들이 보이기도 하기에, 이 책 자체보다는, 이 책의 저자들이 가진 정신에 집중하면서 읽는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 책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교리의 본질과 성격에 대해서 (즉 신학에서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라고 불리우는 작업에 대해서) 먼저 명백하게 밝히고 시작했어야 했습니다. 그런 작업의 부재 속에서 단순히 보수적인 신학 전통에 속한 사람들이 가정하듯이 교리와 신조를 절대적인 것이며, 변하지 않는 것으로 (특별히 장로교 신학 전통의 중요한 신조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같은) 가정하고 켈러 신학이 그러한 절대적 기준에 잘 맞아 떨어지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비평.평가하는 작업이 이 책의 저자들이 주로 행하는 작업인데, 그렇게 해서는 켈러 신학을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켈러가 그의 책 센터 처치(Center Church)에서 이미 밝히고 있듯이, 그의 신학화 작업은 철저하게 미들웨어(middleware)적인 작업입니다. 즉, 켈러는 기존의 교단/교파적 가르침을 컴퓨터의 하드웨어(hardware)로, 특정 목회자 (이 경우 켈러 자신)가 속한 목회적 상황을 소프트웨어(software)로 비유하면서, 그 사이에서 목회자가 양쪽을 잘 어우르면서 양쪽 모두에 충실한 창조적인 신학적 비전을 일구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그러한 창조적인 신학적 비전을 미들웨어(middleware)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켈러의 이러한 도식화 작업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꽤나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이 서평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깊은 내용이어서 아마도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다시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미들웨어는 기본적으로 특정 상황에 교단/교파적 가르침을 적용시키려는 시도이기에 이 책의 저자들이 켈러 신학의 비교 잣대로 삼고 있는 교단적 신조와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되는 것인데, 이 책의 저자들은 그러한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그렇게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 책의 저자들이 행하는 작업이 켈러의 미들웨어가 보수 장로교 신학이라는 하드웨어에 충실한지에 대해서 조사하려는 시도라고 본다고 해도, 켈러가 처한 상황적 요소에 대한 배려가 그다지 없기 때문에, 켈러 신학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서평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했던 얘기를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런 류의 서평이 좀 더 생산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비평을 하는 쪽에서도, 또 켈러 자신도, 서로 간에 신학에서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라고 부르는 부분에 대한 작업이 먼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프롤레고메나는 본격적인 교리화/신학화 작업에 앞서서 그러한 교리화와 신학화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은 어떠하며, 신학적 지식의 본질은 무엇이며, 신학함의 성격과 의미는 무엇인지와 같이 신학을 한다는 것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고자 하는 분야입니다. 켈러가 센처 처치에서 이런 부분에서 어느 정도 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는지, 이 책의 저자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켈러가 목회자이기에 좀 더 깊은 신학 작업을 통해서 프롤레고메나를 할 만한 위치에 있지는 않기에 생기는 소통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겠고, 또는 이 책의 저자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서 몰이해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한계를 가정하고라도, 이 책에는 분명히 켈러 신학에 대해서 제대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잘못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더 많지만요. 이 서평에서는 특별히 앞에서 언급한, 이 책이 가지는 두가지 한계에 비추어서 서평자가 저자의 견해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에세이(켈러의 삼위일체론 평가), 한가지 부분에서만 동의하고 다른 한가지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는 에세이(켈러의 죄론/심판론 평가), 두가지 한계 모두에 비추어서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에세이(켈러의 해석학), 이렇게 세가지로 나누어서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나중에 언급했던 켈러의 해석학에 대한 에세이를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석과 주해의 혼동: 켈러의 해석학 평가
이 책에서 켈러의 해석학에 대한 비평을 하는 저자는 Richard Holst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야기한 두가지 한계를 모두 고려한다고 해도, 이 저자의 켈러 신학 평가는 정말 봐주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성경 주해와 성경 해석을 같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성경 주해를 성경의 본문 자체가 가진 의미를 파악하는 작업이라고 했을 때, 성경 해석이란 그러한 주해를 통해서 발견한 의미를 현대 사회와 문화의 흐름 속에서 읽어내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 저자는 기본적으로 해석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너무 심하게 얘기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습니다만, 계속해서 성경 주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서 켈러가 성경 주해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기에 에세이의 제목인 켈러 해석학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또 하나, 더 안타까운 것은, 이 저자가 성경 주해를 방법론적인 것으로 환원해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현대 해석학의 논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현대 해석학자 중 어느 누구도 의미를 찾는 작업을 한가지 혹은 두 세가지 방법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데 동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대체 공부를 제대로 한 건지 의심스럽습니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서평자 머리 속에 반복적으로 떠올랐던 생각은 “이 챕터는 정말로 trash(쓰레기)하고 똑같이 봐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해석에 대해서 이렇게 근본적으로 무지하다보니, 켈러 해석학의 또 다른 기둥인 문화 해석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습니다. 해석이라 하면 단순히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지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자신이 물려 받은 전통, 자신이 그러한 환경 속에서 가지게 된 관점의 특수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켈러 신학이 가진 최대 장점이 문화에 대한 민감성이며, 현대 문화 속에서 어떻게 성경을 제대로 읽어내느냐 하는 질문인데, “현대 문화”에 대한 켈러의 관점을 바라보는 평가가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이렇다보니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올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심하게 얘기하면서도 이 저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는 것은, 제가 공부했던 고든콘웰 또한 어느 정도 이러한 무지에 기여했다고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모교이기에 너무 심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고든콘웰을 비롯한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교들에서 “성경 주해 (biblical exegesis)= 성경 해석” 이라는 공식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목회학 석사 커리큘럼 안에 기본적인 해석학 개론 수업이 들어 있어야, 그것도 성경 주해와 해석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들어 있어야 이런 무지에 기초한 오해가 없을텐데, 적어도 제가 졸업했을 때 까지는 이런 부분이 매우 많이 부족했습니다. 조금씩 달라지고 있기를 바래 봅니다.
죄를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 켈러의 죄론/심판론 평가
켈러의 죄론/심판론에 대한 비평은 Ian Campbell과 William Schweitzer라는 저자들이 썼습니다. 이 두 명이 기본적으로 켈러의 죄론/심판론에 가하는 비평은 그의 신학화 작업이 기존의 죄론/심판론이 가진 법정적(forensic) 측면을 무시하고, 관계적(relational)인 측면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장로교 전통 신조를 왜곡하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상적으로는 이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습니다. 켈러의 죄론/심판론은 법정적 측면에 대한 강조가 거의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이야기를 하긴 합니다만, 좀 더 관계적인 차원에서의 죄의 이해가 더 크게 강조되며, 법정적 측면에서의 죄 이해는 그러한 관계적 차원에서의 죄 이해를 보조하는 정도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켈러에게는 인간의 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상 숭배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켈러 스스로가 고백하는 그의 목회 상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켈러의 죄론은 지극히 미들웨어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뉴욕의 맨하탄이라는 도시, 세계적으로 가장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장로교의 전통적인 법정적 죄 이해를 먼저 강조했다면 그의 교회는 지금처럼 복음을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없었기에, 그는 적어도 장로교 전통에서는 죄론의 일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우상 숭배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즉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이웃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들의 유익과 이해 관계를 추구하는 것에 더 마음이 가 있다는) 사람들에게 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소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상 숭배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죄를 소통하는 방식이 가지는 강점은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고, 또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현대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고, 해결하고 싶어하는 주제들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강점들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켈러가 죄의 법정적 측면에 대해서 충분히 강조하는 않는 것은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를 이해하는데 더 근본적인 부분은 법을 어겼다는 측면이며, 관계적인 측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까요? 실제로 저자들이 계속해서 인용하는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의 핵심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이 구절은 죄의 법정적 측면을 관계적 측면으로 잘 풀어낸 구절입니다. 법을 어긴다는 측면에서의 죄의 본질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의 관계적인 죄의 본질과 어긋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법정적인 측면을 뉴욕 맨하탄이라는 맥락에서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서평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죄를 관계적으로 풀어내는 신학화가 뉴욕 맨하탄이라는 환경에서 발휘하는 강점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한편으로, 서평자가 생각하는 것은 이 책의 저자들이 법정적인 죄 이해를 좀 더 성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서구 기독교 문화의 산물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성장한 기독교 (예를 들면 동방 정교의 죄 이해)는 법정적 측면의 죄 이해를 그만큼 강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서평자가 한국인으로서 생각한다면, 법정적 측면의 죄 이해보다는 관계적 측면의 죄 이해가 켈러가 소통하고자 하는 포스트 모던 세대 만큼이나 한국인의 정서에도 더 잘 호소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은 장로교 신조가 과연 (심지어 장로교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특별히 서구 문화권이 아닌, 한국과 같은 나라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란 장로교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면이 있습니다. 한국 장로교 신자들에게 서평자가 가진 안타까움은 서구 문화 속에서 생겨난 신조를 비평적으로 우리 문화 속에서 소화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신앙적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장로교 신자들 가운데 (심지어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 가운데에서도)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평자의 직관적 판단은 저자들이 서구 문화권에서 바라보는 기독교 이해에 갇혀 있는 면이 크다는 것이며, 켈러가 풀어내는 관계적인 죄 이해가 저자들이 바라보듯이 성경적인 내러티브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관계적인 차원에서 죄를 이해하는 성경 구절들은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또한 켈러가 강조하는 “마음”에 대한 이해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판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켈러의 심판론에서 독특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께서 법정에 선 재판관으로서 가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욕심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필연적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도 주지하다시피 켈러는 이런 심판론 이해를 자신의 멘토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C.S. Lewis에게서 가지고 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난 번 서평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루이스는 장로교 전통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로마 카톨릭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성공회 전통에 속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켈러의 심판 이해가 장로교 전통에 천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족해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서평자 개인은 켈러가 루이스의 심판 이해를 차용해서 소통하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평자가 켈러의 죄론과 심판론 이해가 장로교라는 신학적 관점에서 부족해 보일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켈러가 사역하는 문화적 맥락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즉 서론에서 언급했던 첫번째 한계라는 차원에서 동의하지만, 두번째 한계라는 차원에서는 동의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켈러의 삼위일체론 이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평자는 개인적으로 이 에세이가 이 책에 실린 7개의 에세이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춤: 켈러의 삼위일체론 비평
켈러의 삼위일체론 비평에 대해서는 Kevin Bidwell이라는 저자가 쓰고 있습니다. 이 저자가 켈러의 삼위일체론을 바라보는 논지는 단순합니다. 켈러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의 많은 부분을 “하나님의 춤”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설명이 전혀 충분하지도, 또 신학적으로 근거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켈러의 “하나님의 춤” 메타포는 켈러 자신에 따르면, 그리스 교회의 삼위 일체 개념인 perichoresis를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합니다만, Bidwell은 그러한 켈러의 신학화가 별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반박합니다. Bidwell에 의하면, 어떠한 종류의 삼위일체 이해에서도 세가지 기준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첫번째로 하나님의 한 분 되심, 그리고 두번째로 하나님의 세 인격 되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분 하나님의 세 인격 되심 사이에 놓인 인간적 이해가 가지는 한계로 인한 긴장입니다. 하지만 켈러의 하나님의 춤 이라는 메타포는 이런 세가지 기준을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대해서 별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고려해야 할 점은 켈러의 삼위일체 이해가 미들웨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덧붙여서 삼위일체 신학이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융성기를 맞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무리 켈러라고 해도 목회자라는 입장에서 견고한 삼위일체론을 세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거라는 점입니다만, 그러한 고려를 하고서라도 “하나님의 춤”이라는 메타포가 어떤 차원에서 도움이 되는지 켈러가 제대로 설명해내고 있지 못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켈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춤 메타포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 간의 역동적 사랑의 주고 받음이 춤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설명되는 것인 듯 싶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삼위 하나님을 이해하는 충분한 신학화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보기에는 미약합니다. 그래서 Bidwell은 자신의 비평을 마치면서 켈러가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개혁 신학의 최고봉에 올라 있는 인물의 삼위 일체 신학과 좀 더 깊이 소통하면서 그에 뿌리내린 상태에서 자신의 목회적 상황을 잘 반영하는 미들 웨어적인 삼위일체 이해를 만들어내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호혜적으로 글을 끝맺고 있습니다. 서평자가 보기에 이 에세이가 그나마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장로교 전통의 기준에서 보아도, 또 켈러의 목회적 상황이라는 요소를 고려해 보아도, 켈러의 하나님의 춤 이라는 메타포가 여러 면에서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평자가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켈러가 이런 정당한 비평들을 잘 받아들여서 좀 더 충분한 연구와 숙고 위에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세웠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켈러와 계속적으로 소통하면서, 가능하면 켈러가 이 책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응답하기를 요청했지만, 켈러의 바쁜 스케쥴 탓에 그런 면이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좀 더 건설적인 차원에서 장로교 신학의 전통 안에서만 켈러 신학을 비평하는 책이 아닌, 역사적 정통 기독교의 견지에서 여러 교단과 교파에 속한 학자들이 켈러 신학에 대해서 비평하는 책이 나오기를 바래봅니다. 켈러가 그 정도로 비중이 있는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구심이 있습니다만, 서평자 개인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부터는 요한 계시록 읽기를 시작합니다. 첫번째로 읽게 될 책은 요한 계시록 자체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묵시적인 종말론이 어떻게 대중 문화에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관점에서 분석한 책인 How to Survive the Apocalypse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