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예고드린대로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책 진정성의 윤리(The Ethics of Authenticity)를 서평합니다. 제가 이 책을 접근하는 관점은 이 책에서 테일러가 그려내는 현대 문화의 지평 속에서 과연 칭의론 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입니다. 1. 일단 서론에서는 기존의 칭의론에 대한 논의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간단하게 지적하고, 2. 그 이후에 테일러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요지를 그려냅니다. 그리고 3. 그 이후에는 제가 좋아하는 팀 켈러의 책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에서 켈러가 그려내는 복음 이해를 테일러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진정성이라는 주제에 큰 무게를 두는 현대 문화에 대한 고민을 그나마 좀 반영했음을 평가하고, 그와 함께 칭의론을 현대 사회 속에서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결국 칭의론이 소명론이라는 맥락 속에서 펼쳐져야 하지 않나 하는 저 나름의 제안을 하고 마칩니다. 이 공간이 서평을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자세한 논의를 펼치거나 세밀한 논지를 깊이 파고들지는 않습니다만, 서평을 읽으시는 독자들이 제가 가진 고민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족할 것 같습니다.
- 일단 조금 도발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제 주장을 충분히 이 제한된 공간에서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일단 논지를 던져 놓고 계속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제 스타일이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들도 저와 같이 생각해 보신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적어도 제가 아는 한 기존의 칭의론에 대한 논쟁이나 이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칭의론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교리에 대한 대부분의 논쟁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리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 옛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2) 새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소위 3) the New Finnish interpretation of Luther(루터의 칭의론을 단순히 법정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고, 루터 칭의론 안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점이 분명히 있다고고 주장하는, 핀란드의 신학자 Tuomo Mannermaa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학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1, 2, 3은 서로 완전히 배타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 밖의 모든 칭의론에 대한 학문적 논쟁은 안타깝게도 전통적 텍스트를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서 다시 해석하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고, 그러한 재해석을 소통해야 하는 현대성과 현대 문화에 대한 고찰은 거의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과거의 텍스트를 과거 상황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새로운 고찰을 어떻게 현대 문화 속에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그게 과연 해석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과거의 전통/텍스트와 현대적 상황이라는 두 축을 모두 고려할 때에만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현대 철학적 해석학의 중론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정말 아쉬운 점은, 현대적 상황에 대한 고려는 마치 설교자들과 목회자들만이 해야 할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고, 사실 칭의론처럼 중량감이 있는 교리를 제대로 소통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현대 문화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함에도 그걸 신학자들이 놓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칭의론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현대인들에게 유의미한 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학문적인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유희가 될 뿐이죠. 얼마나 도발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 진정성의 윤리를 현대의 칭의론 이해를 돕는 맥락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것이 저의 의도입니다.
- 이 책의 주된 논지는 책이 짧은 만큼이나 단순하긴 합니다만 (책은 100쪽이 약간 넘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논지를 펼쳐내는 과정은 그다지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주된 논지는 1) 현대 문화는 진정성이라는 테마를 이해하지 않고는 제대로 알 수 없는 문화이며, 2) 이러한 진정성이라는 주제가 문화의 중심축을 차지하게 된 것에 대해서 비관적인 예측을 하는 학자들과 긍정적인 예측을 하는 학자들이 모두 존재하지만, 테일러는 어느 쪽에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3) 그 대신 진정성 자체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회적 사실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런 문화 속에서 윤리적인 삶이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마지막에 아주 아주 짧게 다룹니다 (그래서 사실 제목이 과연 책의 내용에 잘 어울리는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했습니다.)
책은 현대 문화의 세가지 병폐를 지적하고 묘사하는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 세가지 병폐는 첫번째로 도덕적, 형이상학적 공통 지평의 붕괴와 동시에 나타나는 개인주의입니다. 테일러의 내러티브에 크게 색다른 것은 없습니다. 사회를 지탱해오던,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던 전통적 형이상학 및 도덕과 공통선(하나님의 뜻, 공동체와 전통에 대한 존중 등등)에 대한 지향이 개인주의로 대체되면서 그 빈 자리를 대체할 무언가가 결국 개인에게 넘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적 형이상학의 붕괴는 보통 disenchantment라고 불립니다.) 두번째는 이런 disenchantment와 함께 나타나는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 어떤 일의 궁극적 의미보다는 효율성과 손익 추구를 먼저 따지는 합리성의 한 종류)의 지배입니다. 도구적 이성의 지배는 개인주의가 자리하게 된 배경인 동시에, 개인주의를 통해서 더욱 촉발된 현상입니다. 어떻게 보면, 도구적 이성이 전통적 형이상학과 도덕을 대체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현대 사회는 도구적 이성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첫번째와 두번째의 당연한 귀결인데, 개인주의와 도구적 이성으로 운영되는 사회 속에서 개인은 모순적으로 자유를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구적 이성의 표현인 기술의 지배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더 이상 개인에게 다르게 살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가 스마트폰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회, 더욱 더 발전하는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이 세번째 병폐에 대한 강력한 증거입니다. 테일러는 이 세가지 병폐 중에서 첫번째에만 집중하겠다고 서두에 밝힙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의 지면 한계상 적합한 설정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두번째와 세번째 병폐에 대해서 테일러가 이후에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주 짧게 스치듯이 언급만 하고 지나갑니다. 아마 이후의 저작들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리라 생각합니다.)
테일러가 이 책에서 말하는 진정성은 루소와 같은 낭만주의자들에 그 연원을 두고 있습니다. 진정성의 초기적 양태는 각 개인은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봄으로써 자기 자신이 될 때에만 자연이 그에게 준 본원적 사명(도덕적, 공동체적 등등)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독자들께서도 쉽게 파악하실 수 있으시다시피, 자연과 개인 사이의 이러한 본원적 연결은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둘 사이를 연결해주던 형이상학적 세계라는 질서가 무너졌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도구적 이성이 차지했고, 개인의 자유는 제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각 개인이 스스로 자신이 되어가는 것은 오직 개인에게만 달려 있고, 오직 각각의 개인만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점은 테일러가 사람들의 이러한 “진정한 자기 되기”의 추구를 “부르심(called)”이라는 말로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그 대목을 옮겨보겠습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하게 사람들이 사랑을 포기하고, 자녀 양육을 포기하고 그 대신 커리어를 추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런 현상은 어쩌면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요는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일에의 추구를 부르심이라고 느낀다는 것, 그것이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느낀다는 것,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을 망치게 되고 낭비하게 된다고 느낀다는 것에 있습니다 (17).
테일러에 의하면, 이러한 진정한 자기 되기에의 추구가 가진 함의는 두가지입니다. 1) 누구나 각자 자기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명제가 현대 사회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다는 것이며, 동시에 2) 이러한 자기 되기에의 추구가 극단적으로 펼쳐질 경우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위해로 작용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결국 진정성의 문화가 가진 한계가 이런 부분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테일러의 이런 주장에 대한 요약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진정성이 수반하는 것들은 (A) (i) 자기 발견인 동시에 자기 창조와 자기 구성이며, (ii) 많은 경우에 독창성이며, (iii) 사회적 규칙에 대한 반발, 혹은 우리가 도덕으로 인정하는 것들에 대한 잠재적 불인정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정성이 요구하는 바는 (B) (i) 사회적 가치의 지평에 대한 개방성이며, (ii) 개인이 자신을 규정하는 데에는 개인 바깥의 존재들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66-67)
B 항목의 (i)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자면, 개인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어떤 것들이 가치 있다고 인정받는지, 그렇지 않다고 인정 받는지에 대한 수긍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개인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인정이라는 지평에 반하는 것들을 추구하지는 않으니까요. 이렇게 보면, A 항목과 B 항목 사이에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테일러가 지적하는 진정성의 문화가 가진 한계이고요. 하지만 이 책이 가진 한계는 대안 제시가 약하다는 점입니다. 이미 얘기한대로, 테일러는 진정성의 문화 자체를 결국 인간 사회가 망하게 되는 이정표가 된다고 보는 학자들과, 그 정반대에서 그러한 진정성의 문화가 가진 순기능만을 보려고 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변증법적인 정-반-합의 결론을 도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대안이 너무 약해서 어떤 것이 그가 말하는 진정성의 윤리인지를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이 25년 전에 나온 책 (1991년 초판 발간)이어서 그 이후에 테일러가 어떤 보강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이 책은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이런 현대 문화라는 지평, 진정성이라는 지평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제시하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에 관해서 현대인들과 소통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일단 저는 테일러가 바라보는 관점에 동의합니다. 진정성 자체를 문화적 망조라고 보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해서 진정성이 어떤 장미빛 미래를 가져다 줄 문화적 징조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다만 진정성이라는 주제가 변하지 않는 사회적 사실임을 받아들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중요하게 보는 점은 테일러가 이미 지적한대로 사람들이 진정성을 따르는 것을 “소명”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소명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이 깊고, 각 개인이 누구인가, 또 신자의 경우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와 관련이 깊습니다. 즉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 저는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 에서 나타나는 두 형제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이런 개인의 정체성과 관련지어서 풀어낸 것이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켈러는 이 책에서 형과 동생 모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창조하고 구성하며 표현하기 위해서 형의 경우 종교적 열심, 동생의 경우 아버지에 대한 반항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형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아버지의 사랑보다는 자신이 아버지의 말씀을 모두 지키고 있다는 사실로 규정했고(그래서 아버지가 아무런 순종도 하지 않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베풂으로써 형이 이제껏 쌓아올린 그 모든 순종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했을 때 분노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형은 전통적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이, 또 기존 교회의 신자들이, 자신을 규정짓는 방식의 전형으로 제시됩니다. 또한 동생의 경우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전통적인 도덕과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개인으로 제시함으로써 현대 사회 속에서 진정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전형으로 제시합니다. 켈러는 이 둘 모두 아버지의 사랑에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두지 않았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합니다.
켈러의 이러한 복음 제시,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을 정체성 형성이라는 차원으로 풀어낸 것은 그 자체로 탁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켈러는 설교자이기에 일정 정도의 단순화(예. 형-동생의 관계를 대척점에 있는 현대인들로 본 것, 사실 그 둘 사이의 관계에 어느 정도의 오버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를 피할 수 없고, 현대인들의 이러한 진정성에의 추구를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면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바꿔서 좀 더 성숙한 소명의 신학을 만들어내는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저는 신학적인 차원에서나 목회적인 차원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갈급해 하는 것 중에 하나는 과연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며,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앙의 내용을 소통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효과적이면서도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에 충실한 플랫폼이 또 있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삭과 야곱도 부르셨으며,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셨으며, 바울도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심지어 에베소서에서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 1:18)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각설하고, 하나님께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당신의 모든 백성들을 부르셨고, 지금도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러한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그를 통한 그 분과의 연합을 목적으로 하며, 그러한 연합의 내용이 바로 각 개인이 부르심을 받는 그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칭의론이 현학적인 논쟁을 벗어나서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능력 있는 교리로서 작용하려면, 소명론이라는 차원에서 칭의론을 이해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예리한 독자들은 제가 이 서평에서 할 수 있는 얘기가 여기까지라는데 안타까움을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서평이라는 한계상 아주 간략한 그림을 그것도 아주 대강의 스케치만으로 끝낼 수 밖에 없는 점이 저도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계속해서 좀 더 세밀하게, 좀 더 현실과 소통하면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