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하나님을 말하다 (The Reason for God)은 2008년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를 통해서 복음의 핵심을 짚어낸 그의 처녀작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 이후 2009년에 두번째로 낸 책입니다. 이 책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기독교 메시지에 반대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7가지로 정리해서 거기에 응답하고 있고, 2부에서는 그러한 응답을 바탕으로 좀 더 적극적인 이유, 즉 왜 기독교 메시지가 설득력이 있는지에 대해서 역시 7가지로 나뉘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켈러가 2부에서 자신의 논지를 펼칠 때, 신앙인들에게 도전하는 차원에서, 특히나 신앙인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도전하는 차원에서 논지를 펼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1부에서 그가 비신앙인들에게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도전하는 차원에서 논지를 펼쳤듯이 말입니다. 이 서평 또한 그러한 순서를 따라서 전체를 두가지로 나누어서 켈러가 1부에서는 비신앙인들에게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묻고 있으며, 2부에서는 신앙인들에게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켈러 변증학이 기존 변증학에 잠재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평가해 보면서 다음 주에 읽을 켈러 신학의 비평서에 대한 예비 작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예비 작업이 가능한 이유는 다음 주에 서평하게 될 Engaging Keller가 많은 부분 The Reason for God의 2부에 나오는 켈러의 신학적 입장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면서 비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신앙인들에게 묻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와 증거주의(Evidentialism) 사이에서: 켈러 변증학의 잠재적 기여
켈러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보수적 장로교파인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에 속한 목회자이며, 보수 장로교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 민스터 신학교에서 한 때 실천 신학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켈러의 변증학에는 보수 장로교 변증학의 대표적 인물 중에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의 전제주의 변증학(presuppositionalist apologetics)의 색깔이 강하게 묻어납니다. 전제주의 변증학이란, 신앙을 변증할 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제로 하는 논증을 계속해서 펼쳐나가면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의 전제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그들의 전제가 가진 허점을 찾아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제하지 않는 논증에는 말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밝혀내는데 주력하는 변증 방식입니다. 전제주의 변증학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 되는 부분은 전제주의 변증 방식이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공통 분모를 거의 가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이런 면에서 전제주의 변증학의 정반대 스펙트럼에 서 있는 입장은 흔히 증거주의(Evidentialism)라고 불리우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은 전제주의와는 달리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전제적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따라서 신자에게 변증의 증거가 되는 부분은 비신자에게도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이해를 가지고 변증을 펼쳐 갑니다. 그러므로 증거주의적 변증은 역사적이거나 철학적인 증거를 사용해서 논증을 펼치는데 매우 능하며,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 뿐만 아니라 좀 더 포괄적인 신 존재에 대해서 논증하기 위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미 밝혀졌듯이, 전제주의와 증거주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전제적인 공통 분모가 있다고 가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쟁이 있었고, 지금도 이런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서로 논쟁하는 과정을 정리해놓은 Five Views on Apologetics같은 책을 보면 좀 더 자세한 이해가 가능하실 것입니다만, 많은 변증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 그리고 켈러가 제대로 잡아내고 있는 부분은 어느 한가지 변증 방식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가장 이상적이며, 모든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는 완벽한 변증 방식이라는 가정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미 얘기했던대로, 켈러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변증 방식에는 전제주의적 색깔이 짙게 묻어납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모든 진리 주장이 파워 게임이라고 말했던 것에 대해서 켈러는 푸코가 가진 전제를 문제 삼으면서, 만약 푸코의 말이 사실이라면, 푸코의 말 또한 파워 게임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즉 푸코가 가진 암묵적 전제(자신의 말은 다른 모든 진리 주장에서 예외가 된다는)를 문제 삼으면서 그 전제의 허점을 지적하는 것이지요. 켈러가 이렇게 기독교에 반박하는 이들이 깔고 있는 전제가 무엇인지에 계속해서 천착하면서 그 전제가 가진 허점을 폭로하는 식으로 변증학을 펼친다는 점에서 켈러의 변증학은 분명히 전제주의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전제주의적 변증학만이 유일하게 옳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며, 그 정반대의 입장인 증거주의 변증 방식 또한 상당수 차용하는 경우를 많이 보입니다. 그 간접적(인 동시에 직접적인) 증거로서, 켈러는 이 책 마지막 부분의 헌사(acknowledgement)에서, 자신의 변증학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로 C.S. Lewis를 꼽습니다. 루이스는 영문학자로서, 무신론자로 살다가 신앙을 가지게 되어 성공회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현대의 대표적인 변증가이자 문학가입니다. 실제로 켈러는 이 책의 매 장마다 빠지지 않고 루이스의 논증을 반드시 한가지씩은 예를 드는데, 켈러가 예를 드는 루이스의 변증 방식이 전제주의적이라고 볼 만한 근거는 매우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루이스는 전제주의적인 변증 방식을 선호하는 개혁주의적 장로교인이 아니며, 따라서 그의 변증 방식은 좀 더 증거주의적인 그것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종합하자면, 켈러의 변증 방식은 전제주의적인 틀 안에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하게 전제주의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며, 그가 대하는 상황과 만나는 사람의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서 매번 다른 변증 방식을 적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평자가 이렇게 추측/추론식의 말을 하는 것은 켈러가 자신의 변증학에 대해서 분석적인 에세이를 쓴 적이 없기 떄문입니다.) 여기에는 변증학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에 배워야 할 귀중한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즉, 변증이라는 작업은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이며, 그러한 소통에 특정한 한가지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어떤 방식이 가장 그들을 신앙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변증하는 사람이 각 경우마다 예리하게 판단해서 가장 특정한 경우에 맞는 방식으로 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실천 신학자인 저에게는 변증 또한 실천적 지혜(phronesis)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예전에 제가 썼던 서평의 일부를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다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실천적 지혜(phronesis)라고 불리우는 개념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 지식을 세가지로 분류합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실천적 지혜(phronesis)가 있는데, 이 지식은 앞의 두가지 지식과는 달리 윤리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으며, 실제로 현장에 뛰어들어서 삶의 문제에 대면하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지혜입니다. 따라서 이 지식은 이론적 지혜(episteme) 처럼 복잡한 추상적 사고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한 번 터득하게 되면 더 깊은 사고를 할 필요가 없는 기술적 지식(techne)과도 다릅니다. 가다머가 phronesis 개념에 대해서 기여한 주된 부분은 이 개념을 해석과 연결시킨 것이었습니다. 즉 실천적 지혜를 얻기 위해서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게 될 때, 그렇게 얻게 되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해석적이라는 것이 가다머가 발견한 주요한 통찰이었고, 그렇게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phronesis는 가다머를 통해서 해석적 지혜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선 개념 서평 중에서–
변증이 실제로 사람들과 대면하면서 그들의 필요와 상황에 민감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변증은 분명히 실천적 지혜의 일부입니다. 변증이 가진 실천적 지혜의 가장 큰 부분은 아마도 지금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될 것이며, 그러한 사랑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는 절대로 변증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논리적 설득만으로 신앙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점이 있고 편견이 있으며 그러한 관점과 편견은 나름대로 삶의 과정과 방식을 통해서 굳어지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프란시스 쉐퍼의 지붕 걷어 올리기 작업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쉐퍼가 전제주의적 변증 방식을 따랐던 변증가였음을 이 시점에서 상기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먼저 들려주어야 하는 진리는 성경의 진리에 관한 교리적 진술이 아니고, 외부세계와 인간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진리이다. 이것은 그에게 그의 곤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그에게 그의 상실의 참된 본질과 그 상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할 것이다.
(중략)
지붕을 제거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선택적 유희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20세기 사고 속에서 심판과 지옥의 개념은 무의미하고,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그와 전혀 접촉점이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는 것에 불과하다. 지옥 또는 이와 유사한 개념은 현대인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주의의 획일적인 신념을 받아들이도록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서양에 사는 우리는 국가에 의해서는 세뇌를 당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의 문화에 의해서는 세뇌를 당한다. 심지어는 현대의 급진주의자들도 아주 제한된 범위 안에서 급진주의자들이다.
– “존재하시는 하나님(기독교 문화관 1권) p167″, 프랜시스 쉐퍼–
켈러의 변증이 일반적으로 한 입장만을 고수하기 보다는, 좀 더 절충적으로 여러가지 입장을 사람들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서 목회적으로 차용하는 입장인 것은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 변증이 가진 전제주의적 색채가 가지는 강점 또한 분명합니다. 그리고 남은 서평에서는 그러한 강점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에게 묻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 책의 1부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켈러가 맨하탄에서 목회를 하면서 들었던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반대를 7가지로 나누어서 정리하고, 그에 대해서 답변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켈러는 그 중 현대인들이 가장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은 (여러분들도 예상하시다시피) 역시 기독교가 가지는 배타성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켈러의 답변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켈러는 기독교의 배타성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 주된 원인이 신앙인들이 어떤 면에서 충분히 배타적이 되지 않고, 표면적으로만 배타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단적으로 말하면, 켈러가 하는 말은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배타성이 된 그 전제 (즉 기독교 하나님의 구원 역사) 자체가 가지는 평화적 함의에 신자들이 더욱 더 귀 기울여야 한다는 호소입니다. 즉 기독교인들이 배타적이라고 비난받는 까닭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배타성의 전제가 되는 그 전제의 함의를 충분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답변하기에 앞서서, 켈러는 현대 서구 사회가 근간으로 삼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가진 전제를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서로 다른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래서 충돌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공동체들이 서로 포용하면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완충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들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법 중에 흔히 제시되는 것은 각 공동체들이 가진 자신들만의 독특한 요소는 다른 공동체들과의 교류에서는 될 수 있으면 드러내지 않고, 그 대신 모든 공동체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통 분모를 통해서 하나가 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켈러는 여기에 반기를 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은 언젠가는 숨겨진 갈등의 요소를 결국 드러내게 될 것이며,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공공의 장에서는 진정한 자기 자신들이 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켈러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말합니다. 어떤 공동체가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다른 공동체를 사랑과 존경으로 대할 수 있게 해주는 믿음이나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 즉, 특정 공동체의 특수한 믿음이나 실천이 얼마나 평화로 인도하는 함의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켈러가 보기에 기독교 안에는 그러한 충분한 자원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 안에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그러한 자원이 있다고 켈러는 말합니다. 켈러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기독교의 본질이 은혜로 얻는 구원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얻는 구원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 때문에 얻는 구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이 전적인 은혜로만 되었다는 믿음은 깊은 차원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광신자인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까닭은 그들이 복음에 지나치게 헌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충분히 헌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광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강압적이고, 자기의에 충만하며, 자기 주장이 강하고, 둔감하며, 거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들이 심하게 그리스도인이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적으로 열정적이고 용기가 있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광적으로 겸손하고 민감하며, 사랑이 많고, 공감할 줄 알며,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58-59).
켈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믿음이 가진 함의를 충분히 살펴보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믿는다고 말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켈러의 주장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가장 공공적이 될 수 있는 방식은 그들 자신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것이라는 스탠리 하우어와스의 주장과 일견 비슷합니다. 켈러가 한가지 하우어와스와 다른 점은, 하우어와스의 경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해줄 실제적인 공동체를 대라고 했을 때, 거기에 대해서 대답하지 못하고 도리어 훌륭한 신앙인 한 두명을 대는 것이 그쳤기에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에서 (현실의 공동체에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수 없고,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만을 그려놓고 현실의 공동체에게 거기에 맞추라고 했다는 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만, 켈러는 실제 사역을 하고 있는 목회자이기에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하우어와스보다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켈러에게 하우어와스가 짊어진 만큼의 무게, 실제로 그러한 공동체가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무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리디머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켈러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 즉 자신들이 믿는 전제가 가진 함의가 어떤 것인지를 충분히 깊이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키워내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으니까요. 다만 이 서평의 본래 방향으로 다시 돌아오자면, 켈러 변증학이 특별히 기여할 수 있는 부분 중에 그의 전제주의적 색채가 가진, 기독교 교리가 신앙인들의 전제로서 삶에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조사하고 있는지, 그리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전제가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 더 나아가서 그러한 함의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켈러 변증학은 기여를 하는 면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서평자인 저는 켈러 변증학은 실제로 그러한 공동체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존립 여부가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이고,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는 많은 경우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았기 때문이지, 그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켈러가 제기한 문제들, 그의 전제주의적 변증이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기하는 질문들 만큼이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제기하는 질문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켈러가 이미 말한대로, 기독교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이 죄인이라고 말할 뿐더러, 똑같이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사랑하셨으며 용서하셨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다음 주에는 켈러 시리즈를 마치면서 켈러 신학에 대해서 현재로서 나와 있는 유일한 비평서인 Engaging Keller를 서평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