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죄의 언어와 죄의 현실 사이에서
이전부터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학자로서 저의 주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교리의 언어와 현대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조율해서 현대인들에게 소통할 수 있느냐입니다. 언어는 항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현실과의 역동적인 교류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특정 시대의 언어가 모든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기는 어렵습니다. 교리적 언어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교리적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가리켰던 현실과 실재를 현대인이 경험하는 삶의 현실 가운데 소통하는 데에는 크나큰 어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결국 1) 교리적 언어와 현대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고, 2) 어떻게 사람들이 교리적 언어가 가리키는 실재를 다시 경험할 수 있게 되느냐가 교리적 언어가 회복되느냐 마느냐에 있어서 거의 존망이 걸린 문제가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거의 소명 차원에서의 무거운 부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지 그렇게 되었고, 칭의 교리에 관한 저의 박사 논문 또한 이런 문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요. 이런 가운데 읽게 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의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원제: Speaking of Sin)는 제가 가지고 있던 교리적 언어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 의식을 더욱 명확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문제 의식이 어떻게 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여러가지 방향의 고찰로 확장되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습니다. 물론 이 책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이슈를 100쪽 남짓한 공간에 담아내려고 하다보니 충분한 논의를 위해서 필요한 여러가지 이슈들을 생략한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남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책은 크게 네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에서는 제가 이미 서두에서 나누었던 교리적 언어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교리적 언어가 (특히 죄의 언어가) 이런 문제에 놓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진단하고, 또 2부에서는 죄의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 왜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필수적인가에 대해서 역설합니다. 3부에서는 죄에서 회복을 경험하는 길로서의 죄 고백-용서-참회-회복의 4단계를 살펴보고, 마지막 결론에서는 “의로움”의 언어를 다시 살려낼 필요에 대해서 짧게 다루고 마칩니다. 1부에서 테일러가 나누는 교리적 언어의 현재적 상태에 대한 분석, 특히 죄의 언어에 대한 분석은 저의 그것과 동일합니다. 즉, 죄의 언어가 가리키는 실재를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죄의 언어 또한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죄는 규칙을 위반하는 정도의 것으로 환원되어 버렸고, 인간 경험의 좀 더 깊고 심오한 차원에서의 소외, 저주, 관계의 분열과 같은 차원의 것들을 담아내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특별히 테일러는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데에는 교회의 언어가 그들의 실재를 담아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합니다. 일례로, 테일러는 자신이 만났던 어떤 회중 교회 목회자의 아들이 티벳 불교의 연민의 언어를 기독교의 사랑의 언어보다 더욱 더 그의 삶의 현실을 잘 담아내는 것으로 느꼈다는 고백을 들으면서 오늘날 교회 속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테일러가 보기에 이들 젊은이들은 모두 일종의 구원 (즉 평안과 삶의 의미, 그리고 자유로 규정되는 변화된 삶)을 원하고 있고, 기독 교회의 신앙의 언어는 더 이상 이런 구원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어 버렸을까요? 테일러는 크게 세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다원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세속주의가 그 세가지입니다. 인상 깊었던 것은 테일러가 아주 복잡할 수 있는 이 세가지 현상을 간단 명료하고도 자신이 설명하는 목적에 맞도록 쉽게 설명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과연 이런 현상들이 죄의 언어가 사라지게 된 것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느냐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각설하고, 우선 테일러는 다원주의를 영적인 세계화라고 지칭합니다. 즉, 사람들이 여러 종교를 쉽게 접하게 되면서, 이런 여타 종교가 사용하는 언어들을 통해서 교리 언어 또한 새롭게 발현될 여지가 생긴 반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의 교리 언어가 더 이상 호소력이 없다고 느껴지게 되었을 때 금방 기독교를 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기관 체제에 대한 반감을 이끌었다고 말하면서, 죄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권위적이고도 비난적인 요소 때문에 (사실 죄의 언어는 그런 면을 뛰어 넘어서 인간의 본질적 어두움을 모두 담아내는 실재를 표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언어가 버림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속주의는 그 특유의 종교적 실재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죄의 언어를 좀 더 인간이 조절하기 쉬운 언어, 즉 의료적 언어와 법률적 언어로 바꿔놓으면서 죄의 실재를 사라지게 했고, 또 그와 함께 죄의 언어 또한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진단에 비추어 2부에서 테일러는 죄의 언어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두가지 양태를 의료적 언어와 법률적 언어가 대신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두가지 언어를 자세하게 분석합니다. 의료적 언어란, 죄를 일종의 병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테일러는 주로 진보적 주류 기독교에서 이런 접근을 했다고 판단하고, 이러한 죄에 대한 이해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차원에서의 죄에 대한 이해를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반면 법률적 언어는 주로 보수 기독교에서 채택한 언어인데, 이런 언어는 죄를 규칙 위반으로 이해하게끔 만들었고, 따라서 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강조한 반면, 그러한 책임을 넘어서는 좀 더 깊은 실재, 즉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신의 소설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에서 다루었던 식의, 인간이 경험하는 좀 더 본질적이고 깊은 어두움에는 눈을 감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테일러는 보수와 진보 모두 현대 사회를 거치면서 죄의 언어가 왜곡된 것에 대하여 제대로 대처하는데 실패했다고 봅니다. 저도 거기에 동의하고요. 추가적으로 저의 판단으로는 여기에 경영적인 언어를 더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죄에 관한 경영적인 언어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닌, 그저 관리하고 다스리는 차원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는 죄에 대한 섣부른 대안으로 영적 훈련과 규율을 지키고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을 제시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죄의 언어가 가리키는 인간의 깊은 어둠이라는 실재에 대한 대안이 전혀 되지 못하고요. 이런 까닭에 테일러는 죄의 언어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구원의 의미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한 진단은 아주 적실합니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고,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당연히 구원도 무엇인지 모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과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구원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죄의 언어의 회복은 기독교 구원의 메세지가 제대로 전달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걸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후 3부에서는 테일러 나름대로 죄의 실재를 제대로 체험하고, 그를 바탕으로 죄의 언어를 회복하는 한가지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방안은 회개에 대한 공동체적인 경험을 각 신자가 죄의 고백-용서-참회-회복으로 이어지는 4단계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테일러는 죄를 공동체적으로 고백하고, 공동체 안에서 용서를 경험하며, 또 단순히 언어적인 용서의 선포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합당한 보상을 죄를 지은 이가 치르도록 하며, 그 결과를 통해서 회복을 경험했던 초대와 중세 교회의 회개의 4단계를 다시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얘기에 앞서 나와야 했던 얘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 어떻게 죄의 실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일 겁니다. 하지만 테일러는 왜인지 이 부분을 생략하고 말았습니다. 아울러서, 테일러가 제시하는 4단계의 방안 또한 과거의 방식이기 때문에 과연 현대 교회의 상황 속에서 제대로 현대인들의 현실을 반영해 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즉 테일러의 대안이 현실에 기초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고, 테일러의 대안 제시는 막연한 과거에의 동경이나 회귀로 비춰질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 더 안타까운 점은, 테일러는 책 몇 군데에서 죄책에 관해서 언급하지만, 죄로 인한 수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테일러가 서구 전통에 서 있기 때문에 동양적 전통에 가까운 수치의 언어보다는 서양적 전통의 죄책의 언어를 먼저 생각했을 수 있고, 또는 죄책과 수치의 경험을 한데 뭉뚱그려서 죄책이라는 말로 표현했을수도 있습니다 (제가 읽기로는 아마 후자가 테일러가 의도한 바일 듯 싶습니다. 어쨌든지간에 죄로 인한 수치의 경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수치의 경험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죄의 실재를 경험한 인간 존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심지어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한 수치를 견디셨다”(히 12:2)고까지 표현합니다. 이런 면에서 제가 앞으로 서평하게 될 책인 신앙인이자 정신과 의사인 커트 톰슨(Curt Thompson)의 수치의 영혼(The Soul of Shame)은 테일러의 분석에 이어서 죄에 대한 저의 생각의 흐름을 발전시켜나가는데 아주 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톰슨은 그 책에서 자신의 정신과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살려서 수치의 경험이 어떻게 죄책의 경험과 다른지, 또 수치와 죄책이 어떻게 죄의 경험을 이루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대해 주시길)
결론적으로, 테일러의 이 책은 죄가 가리키는 실재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며,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볼 수 있게 해준 반면, 그 대안 제시에 있어서는 적어도 저에게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교리적 언어와 그 언어가 가리키는 실재, 그리고 현대인들이 경험하고 이해하는 현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반드시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는 점에서 죄에 대한 저의 생각과 이해가 깊어지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러 독자들에게도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