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에 수치를 주다– 명예–수치 문화권에서 사역하기
수치는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없는 곳이 없습니다. 공동체 중심의, 전통적인 사회에서뿐만이 아니라, 서구의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크 베이커와 제이슨 조지스는 그들이 쓴 책 명예-수치 문화권에서 사역하기를 통해서 이 사실에 대해서 아주 설득력 있게 논증합니다. 비록 그들이 주로 초점을 두는 곳이 미국 문화라기보다는, 전통적으로 명예-수치 문화가 강한 문화권에서 복음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베이커와 조지스는 모두 상당한 기간 동안 선교사로 섬겼습니다. 베이커는 혼두라스 선교사로 섬겼으며, 현재는 프레스노 퍼시픽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고, 조지스는 현재도 중앙 아시아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두 저자 모두 미국인으로써 미국 문화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명예-수치 문화권에서 사역하기는 단지 명예-수치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나 선교사들에게만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한 문화권에서 살면서 그 문화권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거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서구 문화권에도 최근 들어 난민들과 이주민들이 많이 유입되면서 명예-수치 문화가 더 이상 남의 문화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서구 문화 또한 그 자체적으로도 더 이상 죄책 중심의 문화라고 할 수 없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화 인류학, 성경 신학, 그리고 실제적 사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번째 부분(2, 3장)에서는 수치와 명예의 기본적인 정의를 내리고, 문화 인류학적인 사실들을 나열합니다. 명예란 어떤 사회에서 개인이 가지는 가치를 말합니다 (40). 그렇다면 수치는 무엇일까요? 수치란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고, 나와 어울리기를 꺼리는 것”을 말합니다 (42). 명예와 수치를 이렇게 정의한다면, 이 둘은 한 개인의 정체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가치란 곧 그 개인이 어떤 존재이느냐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죄책이 개인이 행한 행동의 잘잘못 여부에 관한 것인 반면, 수치나 명예는 개인의 가치를 언급함으로써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의 자본주의 체제가 사람을 부나 권력의 여부에 따라서 가치를 매기고 나누는 것은 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게 될 여지가 더 많아졌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까닭에 저자들은 수치심이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2부(4, 5장)에서는 성경을 명예-수치 코드로 읽으면서 구원의 서정을 전반적으로 그려내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4장에서는 창세기 1-3장의 창조-타락 기사와 관련해서 디히트리히 본회퍼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치란 아담-이브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예를 드리지 못한데서 생겨난 관계의 파열로 인한 감정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분열이 생긴 것을 인식합니다. 그는 그러한 분열을 수치스러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는 죄책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68). 만약 죄가 이런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수치심을 궁극적으로 몰아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분의 지상 사역에서 명예를 팔복을 통해서 재정의하십니다. 저자들에 의하면 “복이 있다”는 말은 명예롭다는 말에 매한가지입니다. 마태복음 5:3-20의 첫부분을 저자들이 명예라는 단어를 써서 재번역한 성경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회적으로 재산을 몰수 당하고 특권을 잃은 자들은 명예롭스빈다. 왜냐하면 (믿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모든 명예로운 축복이 그들에게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9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행하십니다. 마가복음 1장의 문둥병자와의 관계 속에서, 예수께서는 그를 만지셔서 그의 수치를 제거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순결과 거룩의 근원이신 그 분은 문둥병이라는 불결함이 가져다주는 수치를 몰아내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뻗으심으로써 예수께서는 무엇이 깨끗한 것이고, 무엇이 받아들일만 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새롭게 써내려 가십니다” (97). 이런 맥락에서 3부에서는 성경적 구원이 두가지 메타포를 통해서 정의됩니다. 첫번째는 “지위의 역전”이며, 두번째는 “공동체에 속하게 됨”입니다 (167).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아들됨으로써 지위를 잃어버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의 아들과 딸로 양자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의 가치를 높게 보거나 낮추어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명예와 지위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본질적 가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지위에 지나치게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줍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라고 하면, 그리고 우리가 진정 그 사실을 믿는다면, 사람들이 바라보는 우리의 가치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동체는 구원이라는 지위 역전을 통해서 발생하는 가치의 역전을 살아내도록 도와주는 장입니다. 저자들은 베드로 전서가 바로 그런 점을 역설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믿는 자들이 세상에서는 핍박을 받고, 가치없는 존재로 여겨지며, 온갖 수치를 받게 되지만, 그들의 구원,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는 가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즉 명예가 각 개인의 가치에 관한 것이며, 수치가 각 개인의 가치 없음에 관한 것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을 현대 문화 속에서 소통하는 작업은 훨씬 더 쉬워집니다. 저자들은 바로 이런 이점을 딛고 실제적인 사역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해서 3부에서 자세하게 적습니다. 이를테면 전도나 회심, 공동체, 윤리학과 같은 주제들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이 책의 주장들이 놀랍도록 현대의 서구 문화 속에서도 잘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대한 한가지 증거가 바로 뉴욕 맨하탄에서의 팀 켈러의 사역이 될 것입니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켈러는 복음을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펼쳐냅니다. 켈러의 책 탕부 하나님에서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가지는 관계에 대해서 했던 얘기가 놀랍게도 수치-명예 문화 코드로 사역하는 것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동일하게 나옵니다.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같은 해석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켈러의 그런 해석이 현대 도시 문화권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 맨하탄에서 사는 고학력자들에게 잘 먹혀든다는 겁니다. 이게 뭘 말하는 걸까요? 일단은 다른 무엇보다도 현대 서구 문화권이 수치-명예 문화 코드가 아주 강력하게 작동하는 문화가 되었다는 말이 될 겁니다. 그 외에도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는 저의 학자로서의 연구에서 이런 점들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 서구 문화가 명예-수치 문화 코드로 완벽하게 이해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문화도 한가지 문화 코드로 완벽하게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어가면서 느꼈던 점은, 명예-수치 문화 코드에서 받아들이는 것들 중에 서구 문화권에서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는 점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비근한 예로, 조지스는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정부 관청에서 문서를 신청해야 할 일이 있었을 때 관리들에게 쵸콜렛을 선물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것은 사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은 이야기입니다. 특히나 김영란 법이 통과된 이후, 약간은 주먹구구식일 수 있고, 규정된 법보다는 관계 중심의 문제 해결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서구인들이 이런 문화적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곧 명예-수치 문화 코드가 죄책 중심의 문화 코드보다 열등하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실 저자들은 서구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자문화 중심주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명예-수치 문화권에도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은 존재하며, 서구 문화권의 그것이 무조건 여타 문화의 윤리보다 더 우월하다고 은연 중에라도 믿는 것은 문화 이기주의의 발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려를 고려해서인지 저자들은 명예-수치 코드 속에서의 윤리에 대해서 한 챕터를 할당하고,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저자들에 의하면, 명예-수치 문화권에서의 윤리의 핵심은 이웃의 명예를 관계 속에서 높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죄책의 문화권의 윤리가 타락할 여지가 높은 만큼이나 타락하게 될 여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하나님께서 정의하시는 명예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기준이 되시지 않는다면 명예의 구체적인 내용이 애매해지게 되기 때문에 타락하게 될 여지가 많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예-수치 코드를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의 중심이 됩니다” (216).
전체적으로 이 책은 제목처럼 명예-수치 문화 속에서 사역하는 것에 관한 아주 균형잡힌 관점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성경을 읽는 새로운 관점으로써의 명예-수치 코드를 발견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적 맥락에 너무 초점을 맞추다보니 서구 문화권의 명예-수치에 대한 자세한 관찰이 부족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명예-수치 코드로 읽어내기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은, 급변하는 서구 문화권에 그만큼 성경의 내용을 소통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찾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주 흐뭇했습니다. 신학생 뿐만 아니라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영어 버젼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