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정신 건강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까요. 성경이 과연 우리의 정신이 건강해지는데 있어서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특히나 요즘 들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는 주제가 됐습니다. 성경과 정신 건강의 관계에 대해서 물을 때, 이전 세대들의 경우 (특히 보수적인 신학을 고수하는 분들일수록) 성경은 예수께 충성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가라고 말하는 책이지,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마음을 잘 챙기는 일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반박(?)이 상당했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성경이라는 책에 대해서, 혹은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당장 오은영 박사 같은 정신과 의사가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각광을 받고 있고, 또 점점 더 사람들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챙길 수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사회가 되면서 이런 흐름은 기독교에도 당연히 이전과는 다른 질문을 묻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사실 성경은 실제로도 정신 건강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상당한 책입니다. 비록 이전 세대의 신앙 선배들이 성경의 본질적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심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은 분명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다는 말이, 즉 본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책이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성경은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라고 칭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 부차적으로 우리를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충만하게 만든다는 것 또한, 즉 성경이 우리의 정신 건강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10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이 책 성경과 정신 건강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물어야 할 가장 적실한 질문들 중 하나를 다루는, 아주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은 월터 브루그만이나 폴라 구더 같은 저명한 성경 학자들, 존 스윈턴 같은 정신 건강 분야를 실천 신학의 관점에서 다루는 학자들을 비롯해서, 그 밖의 많은 신학자들이 정신 건강이라는 주제로 쓴 15개의 에세이를 모은 모음집입니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는 성경 신학에 대해서, 2부에서는 1부의 내용을 바탕으로 실제 사례 연구를, 또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좀 더 실천적인 제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서평에서 15개의 에세이 모두를 요약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에 저는 특히 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세가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책이 가진 장점과 관심 독자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후에, 책의 잠재적 약점을 다루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세가지 주제는 1. 자기의 상처를 다루는 선물로서의 기도와 탄식; 2. 정신 건강 해석학(Mental Health Hermeneutic)의 새로운 신학적 가능성; 3. 트라우마에 대한 성경의 통찰입니다. 이 세가지 주제는 모두 VA (Veterans Affairs)병원에서 정신 건강 원목으로 일하는 저 개인의 경험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정신 건강 원목으로서 제가 하는 일은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내러티브를 듣고, 그 내러티브 안에 들어가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 안에서 그들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저로 하여금 이 책에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었고, 또 더 나아가서 인생의 핵심 질문인 고통과 아픔의 문제를 깊이 건드리고, 그 문제를 통해서 인생이 도대체 뭐냐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에 접근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저에게는 단지 학문적인 어떤 지식 추구에 멈추는 책이 아니라, 저 개인의 삶과 깊이 연관된, 매우 실존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첫번째, 저명한 구약 학자로 잘 알려진 월터 브루그만은 이 책의 8장에서 “의미 창조로서의 진실 말하기(Truth-Telling as Meaning-Making)”라는 주제로 성경의 탄식 시편(lament psalms)이 가진 정신 건강에의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합니다. 브루그만이 주장하는 바는 이런 시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시편 기자들이 자신들이 정말로 느끼는 바를 정직하게 말하고 있고, 이런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고통을 다룰 수 있는 새로운 감정적, 관계적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탄식 시편들에는 시편 13편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시편 25편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들이 나를 이겨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86편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등이 있으며, 이들 외에도 수많은 시편이 탄식 시편으로 분류됩니다. 이들 시편들이 가진 공통점은 시편 기자들이 모두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매우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브루그만은 이를 진실 말하기라고 이름 붙입니다. 사실 정신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이렇게 우리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서 모두 아뢰고, 그들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리는 일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느끼는 부정적인 상황을 회피하거나 부인하려고 하고, 따라서 그런 상황에 따라오는 감정들 또한 회피하거나 부인하려고 하지만, 탄식 시편의 기자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서 토로합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지기 보다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고 배우지만, 정신 건강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시편 기자들처럼 먼저 우리의 고통과 고난 앞에서 탄식하고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이상, 우리의 희망과 긍정은 언제까지나 위선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희망과 긍정은 항상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을 직면하고 그런 감정과 생각을 인정하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릴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 긍정과 희망을 말할 때 우리의 정신은 망가져 버리고 만다는게 성경의 증언이며, 동시에 정신 건강 연구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신 건강 원목으로 일하면서 저 스스로의 고통과 아픔을 제대로 마주하고 직면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가 내 스스로의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하나 말하고, 또 그렇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며 그 가운데 결코 섣불리 희망과 긍정을 말하는 대신, 우리와 공감하시며 함께 걸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체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도 똑같이 대해줄 수 있습니다. 탄식 시편의 기자들은 바로 정확히 그 일을 하고 있다는게 브루그만이 말하는 바이며, 제가 정신 건강 원목으로 일하면서 발견한 점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우리의 감정을 제대로 다루지 않고 회피와 부인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결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의 탄식 시편은 바로 그런 점에서 정확하게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는 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런 면에서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두번째로, 영국 애버딘 대학교에서 실천 신학을 가르치는 존 스윈턴은 신학자가 되기 이전에 정신 건강 전문 간호사로 일했던 경력을 살려서 정신 건강을 신학적으로 접근하는데 전문가로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의 12장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목회적 돌봄에서의 성경”(The Bible in Pastoral Care of Christians Living with Mental Health Challenges)라는 글에서 그런 자신의 독특한 통찰을 정신 건강 해석학(Mental Health Hermeneutic)이라는 용어 안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신학을 어느 정도 공부하신 분들은 해방 신학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호적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를 말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 말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의 경험 안에 내주하고 계시며, 가난한 자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성경을 읽을 때 다른 관점으로는 찾아낼 수 없는 독특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쉽고 간단하지만 결코 아무나 찾아낼 수 없는 해방 신학의 통찰을 스윈턴은 정신 건강을 겪는 사람들의 경험에 적용시킵니다. 즉 만약 성경을 정신 건강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경험과 그들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성경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는 관점을 확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관점을 스윈턴은 이미 언급한 정신 건강 해석학(Mental Health Hermeneutic)이라는 부릅니다. 저도 정신 건강 원목을 하면서 여러 차례 발견하고 깨닫는 바이지만, 정신 건강을 겪는 사람들은 외로움과 자존감 절하 외에도 두려움, 절망 등을 모두 경험합니다. 우울증과 불안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세가지 정신 건강 문제가 한꺼번에 찾아온 사람의 삶에 성경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과연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복음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정말 만날 수 있을까 하는게 스윈턴이 묻는 질문이며, 제가 이 책을 통해서 발견한 소중한 통찰 중에 하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6장에서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사목으로 일하는 이사벨 햄리(Isabelle Hamley)는 욥의 이야기를 통해서 트라우마를 다루고, 또 14장에서 맨체스터 대학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메간 워너(Megan Warner)는 성경 자체가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라는 아주 대범하면서도 신선한 주장을 펼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다루어내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두 챕터에서 부각되는 것은 역시 탄식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트라우마 이전에 그들이 살던 세상이 모두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섣불리 그들에게 희망을 말하고 회복을 말하는 대신, 그들이 충분히 탄식하고 아파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줘야 그들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 두 챕터 모두의 주장입니다. 최근에 저 또한 한 성경 수양회에서 트라우마와 성경에 대한 주제로 세미나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들이 사실 제가 얘기하는 것들이었을 뿐더러, VA 병원이 군인들 중에서 전쟁의 참혹한 경험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를 겪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주로 하기 때문에 저 또한 이 두 챕터에서 얘기하는 것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접하는 독자분들이 트라우마라는 주제에 대해서 특히 성경을 읽어내는 하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이 책은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장점들 때문에 이 책은 정신 건강의 문제를 성경이 과연 뭐라고 말하느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목회자나 신학생, 심지어 신학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 서평자로서 저는 이 책이 보여주는 여러가지 통찰 때문에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서평을 마치기 전에, 이 책의 잠재적 약점에 대해서 한가지 언급한다면, 책의 의도가 성경 읽기에 대한 것이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여러가지 상황적인 신학적 관점에서 성경 읽어내기에 관한 시도가 부족하다는 것이 이 책의 약점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시아계 미국인의 관점에서 성경을 정신 건강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책으로 읽어낸다면 어떨까, 여성의 관점에서, 흑인의 관점에서, 또는 탈식민주의라는 관점에서 같은 주제에 접근한다면 어떨까와 같은 질문을 이 책이 할 수 있었다면 책이 훨씬 더 풍성한 논의를 펼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들을 계속해서 물을 것이고, 그런 질문들 앞에서 성경을 읽어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시도할 것입니다. 독자분들 또한 같은 시도를 하시도록 초대하면서 이 서평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