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

무엇이 진정으로 나와 함께 해줄 사람들을 찾는 길인가-브레네 브라운의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Braving the Wilderness)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태복음 8:20)

소속감에 대한 브레네 브라운의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 속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말씀은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9장에도 등장합니다. 두 본문 모두 맥락은 예수께서 백부장의 하인의 병과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신 이후에 사람들이 몰려오자 예수께서 다른 곳으로 피하시는 가운데 한 율법 학자가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든 따르겠다고 충성의 맹세를 할 때 그 학자에게 답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학자는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들을 보았고 그의 마음 속에는 예수를 통해서 분명히 자기가 꿈꾸는 어떤 이상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충성의 맹세를 바치기까지 하는데, 예수께서는 그의 충성의 맹세에 대해서 동문서답하시듯이 하시면서 자기 신세에 대한 한탄으로 들릴 법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당신은 어떤 대의에도, 어떤 운동에도,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으신 분, 어쩌면 그래서 모두와 함께 하실 수 있었던 분, 예수는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 얼마나 홀로 있음을 잘 감당하셨을지, 얼마나 마음 둘 곳이 없으셨을지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자유로우셨을지, 얼마나 하나님께만 온 마음을 두셨던 분이셨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흥미롭게도 브라운은 자신 또한 (다른 모든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소속감의 문제를 두고 얼마나 힘들게 씨름해 왔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정말 존경했던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였던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1928-2014)가 한 TV 인터뷰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을 발견합니다. 안젤루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You are only free when you realize you belong no place—you belong every place—no place at all. The price is high. The reward is great.” (5)

(당신이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 즉 모든 곳에 속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당신은 자유하다. 대가는 크다. 보상은 엄청나다.”)

브라운은 비록 자신이 존경했던 안젤루였음에도 안젤루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화가 많이 났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너무 존경하고 사랑한 나머지 거의 동일시했던 누군가가 자신을 잘 알아주지 못하는 듯한 얘기를 했을 때 느끼는 실망감이 분노로 표현된 거랄까요. 우리가 도덕적으로 고결하다고 알려진 사회의 저명 인사들이 의외로 말도 안되는 불법이나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을 때 분노하고 실망하는 것과 어쩌면 비슷할 겁니다. 물론 그 강도는 훨씬 더 크겠지만요.

하지만 브라운은 결국 안젤루에게 동의합니다. 그것도 자기가 이 주제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안젤루가 맞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지요. 같은 차원에서 예수께서도 또한 진정으로 어딘가에 속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계셨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브라운이 발견했던 것, 안젤루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예수께서 삶으로 살아내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이 책 “진정한 나로 살아갈 용기”(Braving the Wilderness)는 바로 그런 얘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책의 전체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책은 전체 7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장에서는 브라운 개인이 어렸을 때 소속감을 누리지 못해서 외로웠던 경험을 나누고, 그 경험이 자신의 삶의 많은 부분을 규정해 왔었다는 깨달음을 나눕니다. 2장의 주요 작업은 책 전체에서 중요한 용어들을 정의하는 일입니다. 특히 중요한 용어는 진정한 소속감(true belonging)인데요. 브라운은 진정한 소속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진정한 소속감이란 우리 자신을 믿고 우리 스스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스스로에게 속하는) 깊은 영적인 실천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장 진정성 있는 모습을 세상 속에서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이며, 여러분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과 홀로 서 있다는 점 양쪽 모두에서 숭고함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진정한 소속감은 여러분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바꿔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스스로가 되라고 촉구합니다. (40)

이렇게 용어 규정을 하고 나면 3장에서는 소속감에 관한 문제의식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에 대한 큰 그림을 명확히 그립니다. 브라운이 우리 모두가 가진 소속감에 관한 갈망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때 특히 명심해야 할 점은 그가 계속적으로, 특히 1장에서 3장에서 줄곧 소속감의 문제가 영적인 문제라는 점을 계속적으로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브라운이 영적이라고 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은, 브라운이 특정 종교나 종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브라운은 영적인 것, 혹은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영성이란, 우리가 우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위대한 힘을 통해서 서로서로에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 그리고 그 위대한 힘에 우리가 연결된 기반이 사랑과 긍휼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45)

기독교 신학이라는 관점에서도 이런 점은 충분히 근거를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는 아담과, 그리고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바울 사도가 이야기하지요. 인간은 결국 서로서로가 밀접하게 연대성을 가진, 서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브라운은 기독교 신학이 아닌 사회과학이라는 관점에서 이 통찰을 자신의 책을 통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브라운이 굳이 범종교적인 관점을 취한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브라운의 연구가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진행된 인간 존재에 대한 관찰이라는 점을 기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이런 인류 전체의 연대성, 우리 모두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우리는 구분 짓기, 갈라치기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인종, 성별, 정치 성향, 경제적 위치, 종교, 우리가 선호하는 성격이나 싫어하는 성격 등으로 나누고, 우리가 어울릴 만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그 사람들 각각을 겪어보지도 않은 채로!) 갈라치기 합니다. 브라운이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사람을 임의적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카테고리에 따라서 갈라치기하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만 어울리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는 겁니다. 신기하죠? 브라운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저런 카테고리들에 따라서 나뉘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애초에 사람들을 갈라치기하는 대신,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연결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관계를 통해서 연결되는 일이 훨씬 더 많고, 따라서 외로움을 느끼는 빈도나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반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만 관계 맺고 연결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비슷한 사람들 속에서도 끊임없이 갈라치기를 시도하면서 계속해서 정말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을 찾으려고 (그런 사람은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요! 특히 누군가를 계속해서 알아가다보면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나의 소울메이트인 듯이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바뀌면서, 관계의 맥락이 바뀌면서 갈등이 깊어지게 되는 것은 어떤 관계에서든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다보면, 결국 세상에 자기 홀로 남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아니, 사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자기 홀로 남기 전에 이미 조금만 갈등이 생기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갈라치기를 해버리기 때문에 더 외로움을 느끼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소속감을 끊임없이 남을 통해서 찾아 헤매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속한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이 비록 자신과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불편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기 안에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 스스로에 대해서 좋아하지 않는 점들을 잘 처리하게 되어 이제는 스스로에 대해서 싫은 점까지도 잘 포용하게 된 사람, 그래서 자기 스스로를 잘 감싸주고 받아들이고, 그 결과 자기 안에 온전히 속하게 된 사람만이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외로움을 느끼는 대신 브라운이 얘기했던 영성을 추구하면서 모든 인간들이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기뻐할 수 있다는 거지요. 결국 안젤루가 맞았던 겁니다. 브라운은 안젤루와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인 빌 모이어스가 나눈 대화를 다시 한번 인용합니다.

모이어스: 당신은 어딘가에 속하셨나요?

안젤루: 아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이어스: 누군가에게 속하셨나요?

안젤루: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네요. 제 말은, 저는 저 자신에게 속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게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마야(안젤루의 first name)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저는 마야를 너무 좋아합니다. 저는 마야의 유머와 용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제가 저 자신이 보기에도 별로 좋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할 때, 그러면 그 때는 그 부분을 다뤄야겠지요. (28)

이런 기치 하에서 브라운은 4가지 연구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답을 나머지 4장부터 7장까지의 주제로 삼습니다. 그 연구 질문들과 거기에 대한 답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구 질문

1) 진정한 소속감을 개발한 남녀들이 공유하는 과정, 실천, 접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2) 우리가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곳에 속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3) 우리가 홀로 있게 되는 순간에도 진정한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공동체를 통해서 얻게 되는 소속감이 여전히 필요한가?

4) 계속해서 악화되는 분열의 문화는 진정한 소속감에 대한 우리의 추구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까?

브라운이 발견한 것들

1) 사람들은 가까이 갈수록 싫어하기가 어렵다. 가까이 가라. (4장)

2) 헛소리에는 진실을 말하라. 정중하게 그렇게 하라. (5장)

3) 손잡으라. 타인들과 함께. (6장)

4) 내면은 강하게, 외면은 부드럽게, 마음은 야성을 가지도록 하라. (7장)

4장의 주된 나눔은, 사람들을 갈라치기하기 전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보라는 겁니다. 정치 성향 때문에, 경제적 지위 때문에, 누군가와 어울리기가 꺼려진다고 생각하기 전에, 누군가를 열린 마음으로 알아가다 보면 그 사람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 누리게 되는 것들이 반드시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성향이나 경제적 지위로 사람들을 갈라치기 할 때에는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을 설정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모두 멍청이야, 민주당 지지자들은 모두 빨갱이야 등의),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해보면 그런 스테레오타입이 틀렸다는걸 알게 된다는 거지요. 5장의 주된 나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누리는 나 자신에 대한 소속감을 누군가가 타협하라고 요구할 때 헛소리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소속됐으면 하는 모임이나 그룹에서 빠지게 될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지요. 그렇게 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속한 사람들 뿐입니다. Fitting-in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6장의 주된 나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다른 사람들, 완전히 모든게 다 다른 사람들과 손잡고 함께 가기를 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미국에 이민 온 이민자로서 한동안 같은 한국인 이민자들이나 유학생들과만 어울렸었는데, 그 부분을 이 책을 통해서 상당히 성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7장의 주된 나눔은 이제까지의 정리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책의 요약은 비록 이 정도로 마치려고 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문제는 신앙인이든 아니든, 모두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며칠 전에 제가 저의 SNS 계정에 이런 글을 썼었습니다 (서평을 위해서 약간 수정했습니다.)

남자들은 40 중반이 넘어서면서 외로움을 느낀다. 집에서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와이프도, 아이들도, 모두 자기들 하느라 바쁘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가정에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결국 자신들이 진정으로 가정에소속되어 있지 않다는걸 발견할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그럴 때 자신들이 이제껏 무엇을 위해서 살아온 건지, 가족들 먹여살리겠다고 열심히 바깥에서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면 외로움은 더 배가된다. 어디 남자들 뿐이랴.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이제 더 이상 깊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집에 오면 피곤하다고 누워서 잘 뿐이다.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사람을 찾고 싶지만, 그런 사람은 찾기는 쉽지 않다. 행여나 바깥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가정에 소홀하게 될 확률이 높고, 결국 가정의 파괴는 정해진 수순이다. 결국 인생은 외롭고, 어딘가, 누구에겐가 속하고 싶은 마음은 채워질 길이 없다.

제가 남자이기 때문에 일단 남자의 관점에서만 얘기하자면,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바라봐줄 때 그들과 깊은 연대감, 소속감을 경험합니다. 만약 우리 자신이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먼저 연대감과 소속감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만 이런 우리의 본연적 갈망을 채우고자 한다면, 대부분의 40대 남자들이 그렇듯이 가족들에게 실망하게 되고, 마음은 허해지고, 점점 더 갈수록 외로움에 사무치게 될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온전히 속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자신을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배우자와 자녀들이 가진 외로움과 아픔을 오히려 감싸주고 돌봐주고 안아줄 만큼 성숙하게 될 수 있을 겁니다. 내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필요를 채워주지 않을 때 그들을 향해서 분을 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오히려 그런 열린 마음, 정리된 마음을 가지고 관계를 맺으면 사람들이 우리의 관계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브라운의 책을 잘 읽고 소화하게 된다면, 40대 남성들이 가진 외로움의 문제, 혹은 어떤 연령대의 어떤 사람들이든지, 그들이 가진 외로움의 문제를 잘 다룰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에게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게 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실마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린다는 말은, 하나님처럼 우리 스스로를 잘 알게 되면서도 동시에 그런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하시듯이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모두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드러냈을 때에도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갈망이 있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갈망을 온전히 채워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to be loved but not known is comforting but superficial. To be known and not loved is our greatest fear. But to be fully known and truly loved is, well, a lot like being loved by God. It is what we need more than anything.”

(이편을 다 드러내지 않고 받는 사랑은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 실상이 알려져 사랑받지 못하게 되는 사태는 더없이 두렵기만 하다. 반면 이편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고도 아낌없이 사랑을 받으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125)

서평을 마치면서, 저는 다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 속하심으로써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이들에게 속하신 분이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예수께서 견디셨던 광야의 경험이 그런 부분을 배우시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사람들을 광야로 몰아넣으시고는, 그 안에서 다른 어떤 것도 붙잡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는, 오직 자신을 하나님을 통해서만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광야는 제대로 통과하게 된다면 우리의 외로움이 홀로 됨으로, 바뀌는 현장이겠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흥미롭게도 브라운의 이 책의 영어 원제에는 “광야”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또한 책의 원제를 직역하자면 “광야에서 용기를 내다”(Braving the Wilderness) 정도가 됩니다. 광야에서 용기를 내기. 여러분은 시도할 마음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이 지금 여러분 스스로를 직면하지 않기 위한 수단으로 의지하고 붙잡고 있는 소속감의 대상은 무엇인가요? 직업인가요? 경제적 지위인가요? 인종인가요? 여러분의 개인적 노력인가요? 이 책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정말 스스로에게 온전히 속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속하면서도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시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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