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과 소통의 신학적 비전을 향하여- 팀 켈러의 센터 처치 (Center Church)
팀 켈러의 센터 처치는 1) 교리적 전통과 2) 문화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탄생한 사역의 다양한 프로그램들)의 역동적 교류 속에서 탄생하는 신학적 비전이 목회 사역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근본적으로 중요한 지를 잘 역설하는 책입니다. 켈러가 책 초반부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듯이, 이 책은 켈러가 “나와 나의 사역 프로그램, 그리고 내 사역 방법론을 모방하라”(42)고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의 서론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켈러가 이 책을 쓰면서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고민은, 기독교와 목회 관련 서적들의 양분화였습니다. 한 쪽에서는 전통과 교리를 강조하지만, 목회자들이 처한 사역 현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책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반면,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목회를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에 대한 팁을 제공하고,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책이 홍수를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흐름의 주된 문제점은, 각각이 서로 다른 쪽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리와 신학적 전통이 실제 목회 현실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런 교리나 신학적 전통이 존재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요? 반대로, 사역 프로그램에 관한 아이디어들의 근원적 원천이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라 경영이나 사회 과학적인 것들이라면, 그런 사역을 과연 정말 기독교 사역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센터 처치는 이 두 가지 질문을 모두 담아내기 위한 답으로 신학적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세워가는 사역을 하는 것이 어떤 사역이든지 가장 근본적이며, 또 가장 근본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문을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영어 원본으로는 400쪽, 한국어로는 장장 800쪽에 달하는, 켈러의 30년 사역의 통찰을 집대성한 책이기에 일반적인 서평에서 하듯이 책의 요약을 간단히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대신 이 서평에서는 켈러가 바라보는 신학적 비전에 대한 이해를 간단히 정리하고, 켈러의 신학적 비전을 엮어내는 날줄과 씨줄의 역할을 하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의 요소들에 대해서 다룬 이후에, 마지막으로 켈러의 신학적 비전이 가진 잠재적 약점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신학적 비전이란?
켈러에게 있어서 신학적 비전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성육신적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특정한 시대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제대로 드러내는 작업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 센터 처치인 까닭 (중 하나는) 또한 그러한 중간자적인 작업을 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역할하는 것)을 켈러가 자신의 신학적 비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얘기는 왠만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할 수 있는 얘기들이지요. 여기까지 말하고 그친다면 사실 이 책에서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켈러는 자신의 센터 처치 신학적 비전을 더 교리적으로 적합하게, 그리고 더 현실에 정합성을 가질 수 있게 설명해 나갑니다. 신학적 비전의 주체가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간에, 신학적 비전의 주체는 주체 자신이 가진/물려 받은 메세지에 대한 성찰 (복음) 을 해야 하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메세지를 전해야 하는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상황에 대한 성찰 (도시) 을 해야 하며, 또 메세지를 문화적 상황 속에서 전한다는 사명을 맡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대한 성찰 (운동) 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켈러는 센터 처치를 구성하는 세가지 축으로 복음, 도시, 그리고 운동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축은 서로 떼어내서 생각하면 바로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될 정도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성찰만 있고, 도시나 운동에 대한 성찰이 빠질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상황에 잘 맞는 복음 메세지를 운동성을 가지고 전할 수 없게 될 겁니다. 또한 도시에 대한 성찰만 있고 복음이나 운동에 대한 성찰이 빠진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메세지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에 대해서 혼돈에 빠지게 될 겁니다. 마찬가지로 운동에 대한 성찰만으로 복음을 도시적 상황 속에서 제대로 전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가지는 서로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켈러가 자신의 신학적 비전을 센터 처치라고 부르는 까닭에는 이 각각의 축들 또한 켈러에 따르면 중심적인 위치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축 (복음 메세지)은 율법주의와 비종교(혹은 반종교) 사이에서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도시 축 (상황화)은 문화에 대한 과도한 적응과 불충분한 적응 사이에서 중심에, 그리고 운동 축 (교회론)은 교회의 소명과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과도한 조직 체계 및 기관화와 심하게 유연한 나머지 조직이나 체계가 아예 없어지게 되어 버리는 상황 사이에서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러한 세가지 축이 어떤 의미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인지만 이해해도 아마 어느 정도 켈러가 앞으로 하게 될 얘기들에 대해서 예상하시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물론 예상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내용에 대한 파악이 쉽게 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 책은 한 목회자가 자신의 30년 사역 여정을 통해서 얻은 통찰을 전부 담아낸 보석같은 책이니까요.
사실 켈러가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가지 축을 자신의 센터 처치 신학적 비전의 주된 요소로 삼았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현대의 교회들과 사역자들에게 그대로 모방해도 될 만한 시사점들을 충분히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도시 지역에 위치한 교회들에게는 더더군다나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 맨하탄에서 잘 작동하는 신학적 비전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 밀집 지역이나, 보스턴의 뉴베리가(Newbury Street) 지역에서 잘 작동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켈러는 나름대로 신학적 비전을 세우려는 사역자들에게 가이드가 될 만한 질문 몇가지를 제시합니다.
-복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 복음을 현대인의 마음에 다가오도록 제시할 것인가?
-문화는 어떤 모습이며, 우리는 문화에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대항하면서 소통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도심, 외곽, 신도시, 시골 등) 그리고 우리의 위치가 우리의 사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교회 안의 다양한 사역들 (말씀, 봉사, 공동체, 교육) 을 어떻게 상호 연결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얼마나 혁신적이며, 얼마나 전통적이어야 하는가?
-우리 교회는 도시와 지역 안에서 다른 교회들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를 문화적으로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종합해 보면, 켈러의 센터 처치는 이 질문들에 대한 켈러 나름의 대답이자, 켈러의 대답을 표본 삼아서 독자들 또한 이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적실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청인 것입니다. 혹시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켈러가 신학적 비전을 찾아가는 가이드가 되어 주는 이런 질문들을 던질 때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는데요. (제가 여기서 굵게 표시하고 밑줄까지 그어 놓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들은 이 책의 운동 부분 중 7장에서 팀 켈러 사역의 실제적 책무들을 설명할 때 또 다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바로 “연결”입니다. (또한 “소통”이라는 단어도 그런 맥락에서 중요합니다.) 저는 7월에 하게 될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에 관한 강의에서 켈러의 신학적 비전의 중심에는 연결과 소통이라는 주제가 있다는 저의 해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려고 합니다. (이 서평에서는 지면 한계상 좀 더 자세하게 왜 연결과 소통이 켈러의 신학적 비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하지만 저의 강의가 7월 이후에 서평 쓰는 남자에 올라오게 될 것이니, 그 때를 기대해 주세요.)
그 대신, 저는 켈러의 신학적 비전이 펼쳐지는 방식으로써의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대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다만, 켈러의 신학적 방법론이 기존의 신학적 방법론들 중 어떤 것에 가깝다라고 규정 짓기보다는, 켈러가 신학하는 방식을 관찰하면서 도출할 수 있는 세가지 원리들을 설명하고, 센터 처치의 내용을 통해서 그러한 원리들이 어떻게 적용되고 확증되는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켈러의 신학함의 특징들: 경험의 회복, 대화 중심, 상호 비판적
켈러가 신학하는 방식을 잘 살펴보는 것은 센터 처치를 이해함에 있어서, 또 독자들이 나름의 신학적 비전을 만들어 나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학적 비전은 신학함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없이는 펼쳐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말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고, 그런 음식을 머릿 속에서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얼마나 어떻게 배합해야 할지를 모른다면 그 요리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학적 비전을 아무리 거창하고 멋드러지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비전을 실제 목회 현실 속에서 어떻게 펼쳐 나가야 할지를 모른다면 그런 신학적 비전은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서평에서 켈러의 신학적 방법론에 대한 완전하고도 자세한 분석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켈러가 보여주는 기본적인 신학함의 원리 몇 가지를 정리할 수는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이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성경에 대한 존중을 전제하고, 저는 켈러가 자신의 신학적 비전을 펼쳐내기 위해서 1) 경험의 회복, 2) 복음과 상황 사이의 대화, 그리고 3) 상호 비평적 역동이라는 세가지 방법론적 원리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경험의 회복
켈러의 신학함에는 경험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있습니다. 사실 전통적으로 웨슬리의 사변형이라고 불리우는 신학함의 네가지 요소에도 경험은 항상 이성, 전통, 성경과 함께 들어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 우리의 신학함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 신학은 아무런 공감도 얻어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켈러에게 있어서 경험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그가 서구 교회의 3가지 우상에 대해서 말하는 동영상에서 그는 경험이 서구 교회의 우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서구의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경험과 체험이 개인의 가치 판단의 유일한 잣대가 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은 경험을 아예 무시해 버릴 뿐 아니라, 성경과 경험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또 다른 극단으로 가게 되기도 했지만, 켈러의 경우는 오히려 경험이 신학함에 있어서 가지는 중요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것은 켈러에게 있어서 진정한 영적 변화란 언제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마음에 대해 말할 때는 감정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으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맞다 (레 19:17; 시 4:7; 13:2). 그러나 우리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추론한다 (잠 23:7; 막 2:8).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행동한다 (전 10:2). 우리의 마음은 인품의 핵심이며, 근본적인 헌신의 장소, 전인의 통제 센터이다. 마음에 있는 것이 우리의 생각, 행동, 감정을 지배한다. 지, 정, 의가 모두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124)
마음은 감정을 움직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간됨의 체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에 의해 복음의 진리가 가슴에 깨달아질 때, 우리는 신중하고도 확실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144). “사람들의 마음에 깨달아지고 적용되어야 한다. 이런 일이 진정으로 일어날 때,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하고, 무기력하고 약한 그리스도인들이 강건해지며, 비신자들이 아름답게 변화된 그리스도인 회중들을 보고 마음 깊이 매력을 느낄 것이다” (156). 마음에 대한 강조는 저절로 현대인의 경험에 무게를 두는 신학함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이지, 머리로만 이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켈러가 특별히 우리의 경험들 중에서 감정에 큰 관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켈러에게 있어서 우리가 느끼는 것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엿보게 해줍니다. 그렇기에 켈러는 복음을 믿는 사람과 종교를 가지고 있을 뿐인 사람이 가진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을 뿐인 사람의 경우, “비난을 당할 때 격노하거나 무너진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으로서의 자아상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이미지에 위협이 되는 것들은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없애야 한다”라고 말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비난을 당할 때 씨름을 한다. 그러나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정체성은 나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주신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138)라고 표현합니다.
2) 복음과 상황 사이의 대화
켈러의 신학함에서 성경과 전통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상황과 문화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센터 처치의 첫번째 축이 복음이라면, 두번째 축은 도시가 됩니다. 그리고 첫번째 축과 두번째 축은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눕니다. 복음이 상황을 섣불리 무시하지 않습니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의 지배적인 정서는 복음을 표현하고 선포하는데 있어서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강하고,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전통적으로 물려 받은 복음의 표현 방식을 따라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인 듯이 표현되지만, 사실 그것은 복음을 표현하는 모든 방식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달라져야 한다는 상황화의 원리를 무시한 것이라는 것이 켈러의 주장입니다. “간과하기 쉬운 역설이 있다. 우리가 보편적인 진리를 특정한 문화의 맥락에서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은 진리 자체가 상실된다거나 덜 보편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D.A. 카슨은 말한다. “인간이 설명하려는 어떤 진리도 문화를 뛰어넘어 분명히 표현되는 것은 전혀 없다. … 그렇게 표현되는 진리가 문화를 초월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초문화적이고 단일한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이 없다면, 상황화는 불가피한 것이다. 당신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표현을 사용할지를 선택하는 순간, 언어와 표현에 담긴 문화적 요소들이 결부될 것이다”(198-199). 즉 복음은 상황에 대한 답을 제공해 주지만, 항상 특정한 상황 에 맞게 표현된 복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상황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결정됩니다. 과거에 복음을 표현하던 방식을 고집하는 대신, 현대인들과 현대 문화가 드러나는 방식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서 복음이 가진 다면적이고 무한한 깊이의 일부, 특별히 현대 문화와 현대인들에게 잘 적용될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에 문화와의 대화, 상황과의 대화는 필수적입니다.
켈러의 신학함에 있어서 대화의 원리의 중요성은 단순히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적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과 상황 사이의 대화의 중요성은 일반 계시로서의 피조계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이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일반 계시로써의 인간 문화의 선함에 대해서 설명한 후에,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화에 대한 이런 이해가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기여를 축복으로 여기지 않고, 세상과 단절되어 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다 넓은 문화 속에서 은혜롭게 나누어주신 지혜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비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도덕의 실천이나 지혜, 기술에 있어서 더 뛰어난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231).
대화의 원리가 좀 더 심화되면 상호 비평이 됩니다. 켈러의 신학함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제가 설명하고 싶은 원리는 복음과 상황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상호 비평적인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과 상황이 서로를 견제하고 비평하면서 도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상황에게 어떠한 도전과 비평을 받게 될까요? 켈러는 자신의 설교 준비를 통해서 경험하게 된 에피소드를 나눕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만남들은 나의 설교 준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성경을 연구할 때 새로 알게 된 교우들의 질문들과 반대들이 여전히 귀에서 울리면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본문의 새로운 의미들과 적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주에 만났던 회의론자가 생각나면서, “이것이 바로 그녀가 불평하던 것이구나!” 또는 “이것은 그의 질문에 답을 주고 있어!”하는 순간들이 생겼다” (261). 이 말은 사실은 상황이 복음에 주는 도전이 복음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라기 보다는 (물론 때로는 복음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담고 있는 기독교 문화의 한계에 대한 도전임을 뜻합니다. 성경과 복음의 메세지는 굉장히 다양하고 다층적이기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기독교가 모두 담아낸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한데, 그러다보니 특정 시대의 특정한 기독교는 항상 복음의 총체성에 못 미치게 되고, 상황과 문화의 질문과 비평은 기독교 문화에 가려졌던 복음의 또 다른 측면을 드러내주는 선순환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상황에 어떤 비평과 도전을 던져 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켈러는 복음이 현대성 자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도전한다고 주장합니다. 켈러는 현대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대표적인 인문, 사회 과학자들 (이들 중 특히 켈러가 자주 언급하는 학자들로는 알라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로버트 벨라 (Robert Bellah), 어네스트 베커 (Ernest Becker)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더 많습니다.)의 저서를 통해서 드러난 현대성의 한계를 복음 메세지가 어떻게 보완해줄 수 있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가 뉴욕의 맨하탄이라는 지역에서 사역을 하다보니 현대성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문화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그 문화와 대화를 하면서 그 문화의 언어와 정서, 습관에 익숙해져 있기에 켈러의 도전은 아마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종합하면, 복음은 상황의 도전을 통해서만 온전한 복음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상황은 복음의 도전을 통해서만 스스로가 처한 한계와 모순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켈러는 이러한 자신의 신학적 방법론을 영향력 있는 선교사이자 선교 학자인 레슬리 뉴비긴에게서 빌려온 선교적 대면 (missionary encounter)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7월에 하게 될 강의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켈러의 센터 처치 신학적 비전의 한계
마지막으로 켈러의 센터 처치 신학적 비전의 한계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한 문단 정도로만 언급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일단 켈러의 센터 처치 신학적 비전은, 그다지 비판할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정합성이 있고, 통합적입니다. 다만, 그의 신학적 비전을 찾기 위한 질문들에 주로 등장하는 단어가 연결과 소통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그가 센터 처치 7부 통합적 사역에서 사역의 목표로 주로 사용하는 단어들 또한 연결과 소통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연결과 소통을 막는 죄의 영향력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연결과 소통을 막는 요소는 사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수치심입니다. 켈러가 비록 센터 처치에서 수치심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지만, 수치심이 그의 죄론에 본격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속죄론과 칭의론에서도 수치심을 충분히 중요한 요소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은 켈러 신학적 비전의 미세한 균열이, 상당히 큰 균열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 또한 제 강의에서 제가 다룰 주된 부분이 될 것이기에 7월에서 하게 될 강의로 더욱 자세한 설명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에는 켈러의 기도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