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순종

거룩한 나라로서의 교회의 소명 회복에 관하여—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의 양심과 순종(Conscience and Obedience)

윌리암 스트링펠로우의 저서는 총 16권입니다. 이 저서들은 몇가지 시리즈로 나뉘어지는데요. 우선 스트링펠로우 자신의 자서전 3부작이 있습니다. 여기에 속하는 책들에는 My People is the Enemy,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Anthony Towne의 죽음 이후에 그가 받은 충격에 대해서 쓴 Second Birthday, 그리고 말년에 췌장에 문제가 생겨서 겪었던 고통을 통해서 삶과 고통, 죽음에 대해서 묵상했던 Simplicity of Faith가 있습니다.

또 시민 불복종 3부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들이 3권 있는데요. 여기에 속하는 책들은 모두 미국 정권의 통치를 비판합니다. Dissenter in a Great Society는 린든 존슨 정권을, Suspect Tenderness는 리차드 닉슨 정권을, 그리고 9월에 서평한 Politics of Spirituality는 로널드 레이건 정권을 비판하면서 시민 불복종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제 소개할 양심과 순종(Conscience and Obedience)이 속한 윤리학 3부작이 있습니다. 지난 10월부터 연속으로 서평하는 책들이 모두 여기에 속하는데요. 10월에 서평한 죽음을 대신해서(Instead of Death)는 그의 죽음의 신학(a theology of death)를 파악하기에 아주 좋은 책이며, 한국의 개신교 전통에서 죄에 대한 강조에 눌려서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는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책입니다. 그리고 12월에 서평할 An Ethic for Christians and Other Aliens in a Strange Land는 본격적으로 기독교 윤리를 다루는 해설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달에 소개하는 양심과 순종(Conscience and Obedience)은 윤리학 3부작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스트링펠로우의 여러 저서들 중에서도 드물게 성경 본문을 가지고 논의를 푸는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성경 주해서는 아닙니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로마서 13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로마서 13장은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바울의 주장이 담긴 부분으로 흔히 인식되는데요. 스트링펠로우는 로마서 13장에 대한 이런 식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의문의 제기가 되는 근거는 요한계시록 13장입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3:6-7은 이렇게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여기서 짐승은 다스리는 권세를 받습니다. 이 짐승은 누구 혹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짐승의 역할이 다스리는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짐승은 정치 권력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정치 권력을 하나님의 종으로 바라보는 로마서 13장과 짐승으로 바라보는 요한계시록 13장은 서로 모순되는 메세지를 전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국가 및 정치 권력에 대해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걸까요? 이 책 양심과 순종은 바로 그 의문을 깊이 파고들어가는 책입니다. 거기에 맞게 책의 제목 또한 로마서 13장 5절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구절에서 “굴복”을 가리키는 헬라어 후포타소(ὑποτάσσω  (upotasso)) 는 스스로 자신을 어떤 권위 앞에서 낮춤 혹은 권위를 인정하는 위치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굴종 뿐만 아니라 순종 혹은 복종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따라서 순종이라고 5절을 번역해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양심의 경우 한글 성경에서도 양심이라고 번역하고 있고요. 말하자면 13장 5절은 국가 및 정치 권력에 순종할 때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만 순종하지 말고, 신앙인의 양심을 위해서도 순종하라는 말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이 바라보는 국가 및 정치 권력에 대한 관점과는 상당한 모순입니다. 이걸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아니, 조화시키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까요?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는1)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본문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2) 현실의 삶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냐의 문제, 즉 기독교 윤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스트링펠로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을 때 흔히 빠지게 되는 유혹으로 성경을 통해서 어떤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도덕 규칙이나 법칙을 뽑아내려는 태도를 듭니다.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서 어떤 체계적이고 명제적인 도덕 및 윤리 시스템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삶의 구체적인 문제나 어려움에 대한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답을 항상 제공해주지는 않습니다. “명제나 원리 대신, 성경의 증언은 선례와 비유(precedent and parable)를 제시합니다”(24). 왜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즉 진정한 기독교 윤리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반해서 그 분을 더욱 알아감으로써 여러 윤리적 질문에 답하며 살아가는 삶이지,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하고는 상관없이, ‘이럴 경우에는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도덕률을 어떤 경우에도 항상 적용하면 그게 하나님의 뜻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는 때로는 애매모호합니다. 어떤 명확한 답을 제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각 순간마다 우리가 말씀을 붙잡고 씨름할 것을 요구하며,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더욱 초점을 맞추도록 이끕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무런 원칙이나 원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스트링펠로우는 여기서 이 책 전체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아니 사실 스트링펠로우 사상을 조망하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두가지 개념을 제시합니다. 바로 소명(vocation)과 소망(hope)입니다. 소명이란, 하나님 말씀이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것에 집중하면서, 즉 하나님 말씀의 소명을 따라가면서 그 안에서 나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의 소명은 인간의 소명을 규정하며 확정 짓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이 그려내는 피조계에서 하나님의 소명은 인간의 소명, 제도와 국가의 소명,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의 소명을 통해서 확정됩니다.” (29) 좀 더 쉽게 풀어내자면,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것들을 잘 관찰하면서, 그 일하심을 따라서 일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소명인 것입니다.

스트링펠로우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소명은 이중적입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피조계에 생명을 불어넣으시고자 일하십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에 던져진 피조계를 죽음의 세력에서 구하십니다. 이런 하나님 말씀의 소명이 인간의 소명을 규정지을 때, 인간의 소명은 하나님의 소명을 따릅니다. 인간은 다스리는 존재가 되며, 지배하는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트링펠로우가 쓰는 단어들은 dominion(다스림)과 domination(지배)입니다. Dominion은 창세기 1:27에 등장하는대로, 인간 스스로가 생육하고 번성하며, 피조계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듯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런 다스림은 인간 스스로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며, 다른 피조물들에도 생명이라는 선물을 선사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말씀의 소명을 인간이 따르지 않을 때, 인간은 다스리는 대신 지배합니다. 피조계를 억압하고,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며, 약육강식의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지난 번 서평인 죽음을 대신해서(Instead of Death)에서 죽음의 문화가 어떻게 인간의 지배에서 비롯되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성과 섹스가 상대방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표현이 되는 대신, 내가 누군지 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정체성을 찾지 못할 때 나는 상대방의 사랑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됩니다. 만약 상대방이 나에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주지 않을 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성과 섹스를 나에게 허락하지 않을 때 내 정체성은 위협 당합니다. 연애 관계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까닭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떠나가면 내가 없어지는 것처럼 느끼는 까닭은 내 정체성이 그 사람의 나를 향한 사랑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트링펠로우가 말하는 죽음의 문화이며,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려는 시도의 일환입니다.

이에 반해 소망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의 소명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꾸준히 그 소명에 거할 때 살아납니다. 즉 인간이 지배하는 존재가 되지 않고, 다스리는 존재가 될 때 복음이 제시하는 소망은 인간 안에서 꾸준히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스트링펠로우에게 있어서 인간의 소명이란, 진정한 인간으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존재로, 피조물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존재로 살아가는 일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한 윤리적 숙고는 소명에서 비롯되며, 인간에게 있어서 그 의미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27) 말하자면, 스트링펠로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만큼 고결하면서도 어려운 일이 있을까요? 그래서 초대 교부 중 한 명인 이레네우스는 자신의 저서인 이단에 대항하여(Against Heresies)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히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4권, 34장)

하지만 어떤 인간도 이런 소명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즉 지배하려는 욕구가 전혀 없이, 오직 다스리기만 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삶이 얼마나 어려운 삶일지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중 어느 누가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지배 하에 두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산 적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행여나 만약 누군가가 이미 죽음의 문화가 판을 치는 이 세상 속에서 이렇게 삶을 살아내고자 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죽음에게 삼키워졌을 것입니다. 죽음은 그런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패배자처럼 삶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가 죽음에 삼키워진 이후 다시 살아났다면? 스트링펠로우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의미는 그 분께서 하나님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그 분께서 진정한 인간이라는 뜻이라는 점을 역설합니다.

그리스도는 타락 때, 죽음이 지배하는 때, 세상의 모든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피조계 전체에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행동하셨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유가 타락을 통해서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며, 죽음의 마력에 전혀 위협 당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며, 오히려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피조계를 구속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높입니다. 말은 때때로 오해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말씀의 전능하심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피조계에 대한 다스림의 회복을 집약해 내셨다는 뜻입니다. (31)

그러므로 스트링펠로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지금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소망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소식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죽음의 세력에서 피조계를 살리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비록 힘들고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세력에 삼키워지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소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고전 15:14)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믿음은 헛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인간이 죽음의 세력에서 자유를 얻지 못했다면, 정말로 믿고 따를 만한 소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 (고전 15:20)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효력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능력에 대한 그들만의 증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며 인내하는 가운데 기다립니다 (85).

소명과 소망.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짓는 이 두가지 삶의 원리를 추동하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스트링펠로우는 로마서 13장과 요한계시록 13장이 보여주는 모순은 바로 이런 해석틀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로마서 13장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스트링펠로우는 로마서 13장을 문맥 속에서 해석해야 할 필요를 역설합니다. 즉 12장의 맥락과 로마서 13장 8절 이후의 맥락을 고려해야 13장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12장의 맥락이 단지 로마서 13장을 국가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대 대중 개신교의 관점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12장은 상당히 독특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역설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12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독특성에 대해서 역설하다가 (예를 들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4절) 혹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 13장으로 넘어와서 현대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태도를 대변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복종해야 한다는, 정치적으로 온건하고 안전한 얘기를 바울이 한다?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스트링펠로우의 생각입니다.

도리어 스트링펠로우는 로마서 13장을 국가 및 정치 권력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는 차원에서 읽기 시작할 때 요한계시록 13장과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만약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이 국가 및 정치 권력에게 주어진 소명에 대해서라면, 그 소명을 따르지 않는 국가 및 정치 권력의 전형이자 표상이 바로 요한계시록 13장에 나타난 짐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소명과 소망은 인간이 되는 것이며, 그 소명과 소망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국가 및 정치 권력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이유나 근거는 상당히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는 국가 및 정치 권력에 묶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인은 국가 및 정치 권력이 그 원래적 소명을 다하지 못할 때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감시해야 할 역할을 그 소명의 일부로 부여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며, 교회는 베드로전서 2:9이 말하는 대로 거룩한 제사장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스트링펠로우는 교회의 국가됨을 정확히 세속 국가의 정치 권력과 대조되는 대안적인 국가됨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거룩한 국가이며,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국가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국가에 대한 복종을 말하는 로마서 13장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 스트링펠로우가 이 책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소명과 소망.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여기서 중요한 까닭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소망의 실현에 관한 한, 스트링펠로우는 회의적이며 부정적입니다. 책의 결언 (epilogue) 부분의 제목은 “성도들의 패망의 중요성에 대해서”입니다. 스트링펠로우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소망을 가지고 소명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하다가 결국 세상 속에서 패망하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패망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셨던 바로 그런 패망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죽음을 경험할 때,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윌리암 스트링펠로우는 소망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말합니다. 단지 이 책에서뿐만이 아닙니다. 스트링펠로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기독교 윤리를 따라서 산다는 말은 종말론적인 소망,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반한 소명과 소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실재입니다. 소망을 잃어버린 시대, 소망이 그저 잘 먹고 잘 사는게 되어버린 시대, 잘 먹고 잘 살게 되고 나면 소망이 없어서 허무 속에서 쾌락만을 추구하다가 저무는 시대. 저는 이 책 양심과 순종을 읽으면서 단지 로마서 13장과 요한계시록 13장에 대한 하나의 읽기만을 배운게 아니라, 소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소명이 왜 소망에 기반하고 있는지, 그리고 소망은 왜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반할 수 밖에 없는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겼습니다. 앞으로도 윌리암 스트링펠로우 읽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다음 달에는 그의 윤리학 3부작 중 가장 스트링펠로우가 말하는 기독교 윤리의 전반적인 그림을 자세하게 그려낸 해설서로 평가받는 An Ethic for Christians and Other Aliens in a Strange Land를 읽고 서평합니다. 많은 기대 바랍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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