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관계 맺기 첫걸음: 복음은 권선징악을 거부하나?

하나님과 관계 맺기 첫걸음: 복음은 권선징악을 거부하나?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흔히 받아들이는 교훈입니다. 심지어 우리 한국 문화 안에는 그러한 말을 표현하는 사자성어도 있지요.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징계한다. 즉 권선징악(勸善懲)이 그것입니다. 사실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교훈 자체가 권선징악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권선징악 안에는 선한 사람들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들은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바램이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일 겁니다. 문제는 이게 그냥 우리의 바램인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데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교훈이 인생 살면서 항상 참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삶으로 체득하실 정도로 충분히 인생을 아시고 계시는 분들이실테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며, 공평하신 분이시라는 성경의 증언은 어찌된 걸까요 (슥 9:9, 시 145:17, 미 6:6-8).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정의로우시며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에서는 권선징악은 당연히 참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권선징악과 함께 으레 따라다니는 가르침 중에 하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일 겁니다. 인과응보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누구나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이후에 치르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사자성어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따라서, 공평하게 상을 받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 아닐까요.

선을 권장하지 않고, 악을 징계하지 않는 복음?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렇다면 과연 복음은 무슨 메세지인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은혜의 복음, 우리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그런 복음은 우리에게는 바로 정확히 권선징악과는 반대되는 메세지인 것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앞서 보았다시피 정의와 공평을 당신의 성품으로 얘기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 담긴 메세지인 복음이 정의와 공평과는 거리가 있는 메세지인 걸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이루는, 즉 권선징악을 말하는 메세지인 걸까요? 여러분은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복음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메세지이며, 따라서 복음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권선징악을 말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러한 권선징악을 이루는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회 이야기를 들으셔야 제대로 이해가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특별히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눅 15:11-32)를 통해서, 특히 최근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뉴욕 맨하탄의 리디머 장로 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를 담임하셨던 티머시 켈러(Timothy Keller) 목사님의 “탕자의 비유” 본문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의 내용을 참고하면서 복음이 과연 어떤 메세지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이르시되 (눅 15:1-3)

본문인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와 함께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번째는 세리와 죄인들이고, 두번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켈러 목사님은 이 부분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다른 두 개의 비유와 함께, 탕자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배경 지식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탕부 하나님 33). 왜냐하면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정확히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이 상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상징하고, 둘째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물론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당연히 하나님을 상징하고요. 비유를 자세히 읽으면 금방 알게 되는 것은, 맏아들과 둘째 아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맺고, 유지해 갑니다. 켈러 목사님은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 또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고 지적하며, 그 두 방식 모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탕부 하나님 44). 특히 켈러 목사님의 책 “탕부 하나님”이 강조하는 바는, 세리와 죄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있으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 또한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탕부 하나님 33).

설명의 필요가 없이, 세리와 죄인들은 권선징악의 교훈으로 보자면 악인들입니다. 세리들은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착취하여 로마 제국을 섬기던, 우리로 따지면 일제 시대의 친일파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들과 같았을 겁니다. 역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우리의 기준으로 보아도 착한 사람들이 확실합니다. 그들은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박사 학위를 받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자들이며, 그것도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도 크게 존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즉 우리가 존경하는 목사님들이나 신학교 교수님들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부류에 들어간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질책하시는 까닭은, 그들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담겨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선을 행하는 자들이 분명하지만, 그들이 선을 행하는 방식에, 그리고 선을 행하는 동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이미 위에서 밝힌대로, 복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메세지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상기해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선을 행하는 사람들과 악을 행하는 사람들 (권선징악의 원리에 따르면 전자는 상을 받아야 하고, 후자는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모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 실패했다는 메세지를 전하고자 하신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런 걸까요? 우리는 일단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관계 맺는 방식, 즉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맏아들이 아버지와 관계 맺는 방식,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복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이 어떤 것인가에 관한 메세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마칠 것입니다.

악을 징계하지 않는 복음의 은혜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더니 없앤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나라 백성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눅 15:12-24)

둘째 아들의 얘기는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그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것들을 먹고 산다는 것, (유대 문화권에서 돼지는 불결한 동물이며, 따라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둘째 아들이 사람들에게 온갖 종류의 멸시와 천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악행을 일삼다가 망하게 된 악인의 이야기, 즉 권선징악이 말하는 바와 일치하는 듯 들리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 초반부에 등장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둘째 아들이 그렇듯이 이렇게 사회적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게으르고 가난한 (어쩌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들이며,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이고, 성범죄자들이며, 사기꾼들이고, 살인자들이며, 창녀들입니다.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들과 가까이 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주변에 성범죄자가 산다면 그 동네는 집값이 바닥을 치게 될 겁니다. 당연하지요. 또한 이런 이들은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그들의 악행에 대한 벌을 받아야 마땅할 겁니다. 따라서 그들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대체로 정당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일반적인 권선징악의 교훈과 달라지는 것은,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즉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켈러 목사님은 이런 행위가 무슨 의미인지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고대 근동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성들은 절대로 뛰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반면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가 “뛰어가서” 아들을 끌어 안았다는 것이 당시 이 본문을 읽거나 들었을 청중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를 보여줍니다.

둘째 아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간다. 그렇다, 달려간다! 대체로 중동의 기품있는 가부장은 달리지 않았다. 아이와 여자와 젊은 남자는 달릴 있었으나 지역사회의 점잖은 기둥이자 대농장의 소유주인 가장은 달랐다. 그들은 아이처럼 겉옷을 들춰올려 다리의 맨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한다. 아들에게 달려가 감정을 그대로 내보인다.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탕부 하나님 49)

그러면 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받아야 할 벌을 내리지 않는 걸까요? 거기에는 일단 둘째 아들 쪽에서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을 바랬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항상 계속적으로 둘째 아들이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고 계셨음이, 그리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즉시 둘째 아들이 했던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와 동시에 둘째 아들은 어떤 것이 정의로운 처사인지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에 대한 정당한, 정의로운 대우가 무엇인지를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그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8, 19, 21절)

둘째 아들은 이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한 번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나머지 한 번은 직접 아버지를 대면했을 때 말합니다. 자신에게 마땅히 내려져야 할, 권선징악적인 처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일반적인 정의, 일반적인 권선징악을 뛰어넘는 아버지의 은혜를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께서 왜 그토록 죄인과 세리들을 너그럽게, “정의롭지 못하게” 대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받거나 인정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오직 이런 사람들에게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로운 처사를 뛰어넘는,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사랑임을 알려주십니다. 정당하지 못한 것을 받고 누리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정당한 처사를 제대로 받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은혜는 은혜인 것을 아는 자들에게 은혜가 되지, 은혜인 것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은혜가 은혜임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격이란, 은혜를 은혜로 받을 줄 아는 것,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메세지, 즉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 맺는 방식에 관한 메세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얼마나 잘 행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는 사람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맏아들이 상징하는 사람들이지요. 이들이 공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심지어 종교 활동에 아주 열심을 내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할 수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바울이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고 회심하기 전까지 그랬듯이 말이지요.)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즉 복음이 무슨 메세지인지를 몰랐던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실력으로 얻으려는 사람들은 이웃들과도 잘못된 관계, 즉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점철된 관계를 맺게 된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가장 큰 두 계명이 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선을 권장하지 않는 복음의 은혜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 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25-30)

맏아들은 분노합니다. 아버지에게, 그리고 자신의 동생에게.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생각하는 권선징악의 그림이 아버지 때문에 망가진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동생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입니다. 사실 이 말은 맞는 말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맏아들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동생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까닭은,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까닭과 정확히 동일합니다. 맏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아버지의 명을 제대로 지켰느냐입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상을, 동생에게는 벌을 주어야 마땅하다고 항변합니다. 얼핏 들으면 아주 정당하게 들립니다. 아니, 사실 이것이 일반적인 권선징악의 교훈에 대한 이해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획득하는 방법이 큰아들이 생각하는대로 일반적인 권선징악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일 수가 없게 되며, 자동적으로 사랑 받을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자들을 배제하게 됩니다. 즉 조건적인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게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요? 그렇다면 죄인과 세리들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전혀 희망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대로,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인이며,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고,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사랑과 상이 주어지는 것이 바로 은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역으로 생각해보면, 사랑 받을 자격을 노력과 의지로 획득하려는 자들에게는 은혜가 은혜일 수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 받을 자격을 노력과 의지로 획득하려는 맏아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게 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잣대는 안정감을 가져다 줄 수 없는 잣대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의 자아상은 매우 불안정합니다. 하나님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노력하고 헌신해야 자기를 받아주실지에 대해서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열등감과 우월감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보다 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열등감을, 자신보다 하나님을 별로 잘 섬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우월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맏아들의 컴플렉스입니다. 켈러 목사님은 이런 맏아들의 컴플렉스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영적 성취도와 무관하게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받아 주신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극도로 정서가 불안하다… 불안한 정서때문에 그들은 교만해지고, 자기 의를 변호하는데 열을 올리며, 다른 사람들을 매정하게 비난한다.” (리처드 러블레이스, 탕부 하나님에서 인용, 90)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철저하게 권선징악에 따라서 돌아가는 사회입니다. 여기서의 권선징악이란, 단지 도덕적인 선이나 악이 아니라, 누군가가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느냐, 소중한 존재로 인정받느냐 (즉 사랑받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잣대가 철저하게 그들 각각이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고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 좋은 회사에 가기 위해서,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메세지가 이런 것이 아닙니까? 딴인 즉슨, 존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열심을 내서 그럴 만한 자격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말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실력 주의(meritocracy)라고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원리가 철저하게 실력주의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은 세리와 죄인들을 무시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무시하고 홀대하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 사회는 성취하고 결과물을 낸 사람들을 대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홀대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악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정당하게 권선징악의 원리에 따라서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일 겁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 말하는 메세지는, 즉 하나님과 우리가 맺는 올바른 관계는 이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는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들 중에는 간혹 아주 드물게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 사랑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아마 많은 경우 사회에서 인정받고 사랑받는 방식이 자신들의 열심과 그 열심을 통해서 성취를 이루는 것이었기에 교회에서도 그런 방법이 통하리라 믿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꽤나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반증이 한국 교회 안에 넘쳐나는 소위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에 가까운 판단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되었고, 자신들이 보기에 악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막말을 서슴치 않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이는 모습과 그들의 모습이 무엇이 다를까요? 별로 다를 것이 없을 겁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이런 충고는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맏아들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식대로 그 분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 분과의 관계 맺는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기준이 되면, 마음대로 내 주변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심판의 언사나 도덕적 저주를 섣불리 내뱉지 않게 됩니다. 나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동일하게 적용하게 됩니다. (다음 회에서 얘기하겠지만, 그래서 복음을 믿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됩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정말 믿고자 하면, 신기하게도 계속해서 복음을 믿지 않는 쪽으로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데에도, 심지어 나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데에도 모두 깊숙히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복음이 정말 복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메세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듯이) 사랑하도록 이끌어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나면, 마치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정의는 무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 받아주시는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악한 자들이 계속해서 방종에 빠지게 놔두시는 분이신가 하는 의문 또한 생기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어떻게 일반적인 권선징악과는 다른 메세지인지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딱 절반만을 다루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반쪽 복음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오늘 다루지 못한 나머지 절반,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이끄는 메세지인 복음이 과연 정의와 공의의 문제, 권선징악의 문제를 어떻게 실현하는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