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어떻게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드는가 (4): 믿음에 대하여
2019년 9월 26일, 한 대형 교회의 목회자 세습에 관한 교단 내 갈등이 (좋지 못한 방향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결국 세습을 허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 교회의 원로 담임 목사는 아들 목사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승계했다. 특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진 것이다.” 하지만 등록 교인 수가 10만이 넘는 이 교회의 담임 목회자 자리는 누가 봐도 특권을 누리는 자리이지, 십자가의 자리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 교회를 둘러싼 세습 갈등이 있기 전까지 이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는 원칙적으로 목회자의 부자간 세습을 금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교단은 헌법을 바꾸었고, 결국 2021년이 지나면 세습이 가능하도록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이런 개탄할 만한 상황을 보면서, 한 유명 저녁 뉴스의 앵커는 자신의 앵커 브리핑 시간에 그 교회가 속한 해당 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 개신교계 전체에서 어른으로 존경받는 영락 교회 한경직 목사님의 일화를 통해서 그 교회의 세습 사태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앵커가 들려주는 한경직 목사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73년 대형 교회 담임 목사직에서 은퇴한 뒤에, 남한산성 계곡에 터를 잡고 은신했습니다. 후임자가 부담을 느낄 것을 우려해서 일부러 교회와 먼 곳으로 이사를 했고, 목사인 아들과 사위에게도 지위와 권한을 물려주지 않았다고 하죠. 어느날 교계의 목사들이 모여서 한경직 목사가 살고 있는 18평 단층집을 찾아갔습니다. “좋은 말씀 한마디 해 주시죠.” 목사들이 가르침을 청하자, 한경직 목사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는데, 이윽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모든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 유명한 일화였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을 향해서 도리어 예수를 잘 믿으라니,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세상엔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 그만큼이나 드물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반성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2019년 9월 26일 JTBC 뉴스룸, 앵커 브리핑)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대형 교회의 원로 담임 목사와 그 아들 목사가 보여주는 행태는 한경직 목사님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한 목사님께서 그 당시 다른 목사님들에게 말했던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는 말이 더 울림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앵커가 말했듯이,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 그만큼이나 드물다”는 사실 또한 그런 점을 뒷받침해줍니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또한 한 목사님께서 주신, ‘예수를 제대로 믿어라’라는 충고는 과연 무슨 뜻일까요. 지난 시간에 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는 구석’이 되어 주신다고 이야기하면서 글을 마쳤더랬습니다. 그래서 이번 연재에서는 그렇다면 과연 믿음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처럼, 예수를 믿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려는 것이 필자의 목적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일, 특히 예수를 믿는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셨고, 지금 성령님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소식인 복음이 우리의 삶과 연결되도록 해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하박국 2:4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은 사도 바울의 믿음에 관한 선언인 로마서 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주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서 정확하고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우리 신앙의 초석을 다지는데 큰 도움이 되어 줍니다. 두번째로, 우리의 신앙 생활 안에 믿음에 관한 오해가 많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우리네 교회의 신앙 생활 안에서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고 통용하는 믿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의 신앙은 방향을 찾게 되고 성장의 길을 향해서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번째, 현대 사회는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조롱하면서 천박하게 치부하기도 하는데, 그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믿음에 대한 오해입니다. 흔히 현대인들은 기독교를 가리켜서 “믿으면 아무리 죄를 지어도 다 괜찮고 구원받는 거냐”라는 식의 오해를 많이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들의 주변 분들이 혹시나 그런 오해를 하고 계신다면, 독자 여러분들께서 그 분들의 그런 오해를 불식시켜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필자는 믿음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성장은 곧 우리 신앙의 성장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자라는 일에 대해서 꽤나 많이 얘기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믿음이 자라는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가이드 라인을 현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제시해 주시는 분들이 아주 많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심지어 개신교 안에는 믿음만 있고, 신앙 성장에 대한 큰 그림이 없어서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로 옮긴다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믿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면 알수록 신앙 성장에 대한 그림이 보인다는 점은 이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이번에도 역시 첫 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우리의 대화 상대자가 되어주신 티머시 켈러(Timothy Keller) 목사님의 글들을 인용하면서,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네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 네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우리 믿음의 의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두번째, 복음을 믿는 일은 우리 신앙 성장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세번째, 복음을 믿는 일은 우리가 생각보다 복음을 제대로 믿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네번째, 믿음은 합리적 설득과 반대가 아닙니다.
첫번째, 우리 믿음의 의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흔히 믿음은 우리가 얼마나 헌신하느냐, 얼마나 의지를 발휘해서 하나님께 우리가 가진 것을 바치느냐로 표현되곤 합니다. 하지만 믿음을 그런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믿음 또한 각 개인이 가진 신앙의 내공이나 실력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고, 믿음에 대한 그런 이해는 결국 믿음 또한 일종의 행위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독자 여러분은 누군가가 ‘믿음이 좋다’라는 말을 흔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믿음으로만 받는 구원’을 말하는 것이 맞다면, 또한 ‘믿음으로만 받는 구원’이 행위 구원의 반대라고 한다면, 결국 믿음이 일종의 행위로 전락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믿음을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하는 행위나 헌신으로 이해하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팀 켈러 목사님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에서 비롯된 것이지, 우리 믿음의 수준이나 역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종종 우리의 회개와 믿음의 깊이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구원자로 미묘하게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센터 처치, 71)
두번째, 복음을 믿는 일이 신앙 성장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믿음에 대한 오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이신지보다는, 우리가 믿는다는 그 사실 자체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믿는 분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소식 인 복음을 믿는 일에 집중하기 보다는,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믿는가, 얼마나 헌신된 믿음을 보여주는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믿는 분께 달린 것이지, 우리 믿음의 수준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은 복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 헌신)에 대한 믿음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한가지는, 흔히 교회 생활에서 복음은 사람이 처음 신앙을 가지게 될 때 가볍게 소개하고 마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복음이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듣기만 하면 그 이후에는 신앙 생활의 성장에 그다지 관련이 없다는 생각은 은연 중에 복음에 대한 경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네 교회의 신앙 생활에서 흔히 여겨지듯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소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소식은 그 소식의 일면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우리가 복음이 어떤 소식인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려면 복음을 믿는 일이 신앙 성장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급 과정이 아니라 시작부터 완성까지 관통하는 것이다. 복음은 비신자에게 필요한 것이고 신자들은 복음 이상의 성경 원칙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부정확한 견해이다.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고, 살아가는 동안 복음을 점점 더 깊이 믿음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인생의 모든 국면이 변화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견해이다 (롬 12:1-2; 빌 1:6; 3:12-13) (센터 처치, 98)
하지만 이런 주장이 좀 더 설득력을 가지려면, 복음을 믿는 일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복음을 믿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대신, 믿음 자체에만 큰 의미를 두고 믿음의 헌신과 희생을 강조하는 까닭은, 복음이 구체적인 자신들의 삶의 상황에서 어떤 의미인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실제로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상황에 복음을 적용해서 복음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려고 시도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을 믿는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복음을 믿는 시도를 해 본 적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복음을 믿는 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그에 따라서 믿음을 살아내는 시도를 해야 내 삶에서 성장합니다. 삶의 구체적인 상황마다 복음을 적용해서 그런 각각의 상황에서 복음을 믿는다는 말을 실천하려고 시도하지 않으면 결국 말로만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번째로 할 이야기는 복음을 믿는 일이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관한 점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어떻게 그런지를 아래의 표를 통해서 잘 보여주십니다.
종교 | 복음 |
나는 순종한다. 그러므로 용납 받는다. | 나는 용납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한다. |
순종하는 동기는 두려움과 불안이다. | 순종하는 동기는 감사와 기쁨이다. |
순종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기 위해서이다. | 순종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닮아가는 것이다. |
상황이 잘못될 때, 하나님이나 자신에게 분노한다. 왜냐하면 나는 욥의 친구들처럼 누구든지 좋은 사람이 편안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 상황이 잘못될 때 씨름을 한다. 그러나 훈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시련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베푸실 것을 안다. |
비난을 당할 때 격노하거나 무너진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으로서의 자아상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이미지에 위협이 되는 것들은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없애야 한다. | 비난을 당할 때 씨름을 한다. 그러나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정체성은 나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
기도 생활은 주로 간구 기도로 구성되며, 필요가 생길 때만 열심히 한다. 기도하는 주된 목적은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다. | 기도 생활은 찬양과 경배로 주로 구성된다. 기도하는 주된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
나의 자아상은 양극단 사이에서 오간다. 만일 내 기준에 맞춰 잘 살고 있다면,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렇지 못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교만하고 무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만일 내가 기준 이상으로 살지 못할 때에는, 겸손해지기도 하지만 자신감도 같이 상실한다. 패배자처럼 느끼기도 한다. | 나의 자아상은 나의 도덕적 성취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죄인이며 상실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용납된 존재이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셔야만 했을 정도로 나는 나쁜 존재이지만, 그 분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기쁨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앓는 소리 대신 더 깊은 겸손을, 내세우는 태도 대신 더 깊은 자신감을 갖게 된다. |
정체성과 자존감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 또는 얼마나 규범적이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게으르거나 규범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느끼며 그들을 무시한다. | 정체성과 자존감은 나를 포함한 원수들을 위해 죽으신 한 분 위에 근거한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은혜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무시할 수가 없다. 말싸움에서 이겨야 되는 내적 필요가 없다. |
나의 조건이나 성취에 의지하여 영적인 용납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은 우상들을 생산한다 (재능, 윤리 수준, 개인 훈련, 사회 지위 등). 내게는 이것들을 가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이것들이 나의 주된 희망이 되고, 의미, 행복, 안전, 중요성이 된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내가 믿는 무엇이 된다. | 내 삶의 많은 좋은 것들이 있다 (가족, 일 등등) 그러나 이 좋은 것들의 어떤 것도 나에게 궁극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이것들을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좋은 것들이 위협받거나 상실될 때, 그로 말미암아 겪는 불안, 분노, 절망에 제한이 있다. |
(센터 처치, 138-139)
이 표에서 복음을 믿는 일은 종교를 믿는 일과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켈러 목사님이 말하는 종교를 믿는 일은, 내가 신뢰하고 있는 대상이 여전히 나 자신인 경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일은, 내가 신뢰하고 있는 대상이 나 자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옮겨간 경우를 가리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사실 종교와 복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마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믿음의 대상이 아닌, 믿음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경우일 겁니다. 더더군다나, 켈러 목사님이 얘기하시는 종교를 믿는 일의 결과를 차근차근 읽다 보면, 우리가 예수를 주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실은 예수를 주로 믿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자아상이 양극단 사이를 오가는 것을 경험합니까? 이 글을 쓰는 저 또한 그런 경우를 자주 경험합니다. 여전히 저의 자아상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로 옮겨가지 않았고, 그 대신 제가 한 일과 성취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생활은 어떠한가요?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 받은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얼마나 내 삶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소중한 진리와 지혜를 복음이 제공하는지를 우리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면,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다면, 우리 삶에는 복음을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넘쳐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복음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갈 때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구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구하는 일이 당연하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실제로 체험했기 때문에 ‘복음 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을 마음 깊숙이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그런 기도를 우리는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만약 켈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복음을 믿는 일이 우리 삶에 가져오는 결과들이 얼마나 우리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는지를 우리가 체험한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 또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비록 복음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정작 복음을 얼마나 믿지 않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복음을 믿는 일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는 일은 우리네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믿음의 헌신’과는 전혀 다릅니다. 켈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르틴 루터가 말하듯, 모든 죄의 뿌리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며 의(righteousness)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유일한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믿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 노력이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칭의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성화는 복음을 충분히 열정적으로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을 단지 칭의를 믿는 것으로 축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비판자들은 성화가 훨씬 고된 노력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때에도 우리는 순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옳다. 다만 단기적으로 그렇다. 순종은 변화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결국 모든 노력은 어떤 동기부여에 의해서 생긴다. 만일 우리의 동기가 복음이 아니라면,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우리의 성품에 영속적인 변화가 불가능하다. (센터 처치, 147)
복음을 믿는 일은 우리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순종은 흔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려고 하는 욕망에 기반하기도 합니다. 켈러 목사님은 그런 순종은 진정한 믿음의 헌신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나 자신이 내 행위를 통해서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드러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외적인 행위를 바꾼다고 우리의 동기가 바뀌는 것이 아니며, 노력이나 헌신 자체가 아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거나 헌신해도 바뀌지 않는 우리의 동기를 바꾸기를 주문하는 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성장이란, 우리가 복음을 더 깊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게 되는 일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일어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하면서 그 분에 대한 신뢰가 깊어질 때에만 일어납니다. 이것은 마치 친구에 대한 신뢰가 내가 아무리 그 친구를 신뢰하려고 노력해도, 그 친구가 신뢰할 만하지 않으면 내 노력이 헛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충분히 신뢰할 만한 분이시기에,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면 할수록 그 분을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성장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의 헌신이란, 그 분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에 내 소중한 것들을 그 분과 그 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위해서 바치고 희생하는 일입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를 더욱 지혜롭게 하며, 더욱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게 하며, 우리의 삶이 더욱 행복해지도록 이끕니다. 비록 행복을 얻는 것도, 지혜롭게 되는 것도, 사랑이 많아지는 것도 복음을 믿는 일의 목적이 아니지만, 우리가 믿는 대상이 사랑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하면 할수록 그 분처럼 더욱 행복해지고, 그 분처럼 더욱 지혜로워지며, 그 분처럼 사랑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네번째, 믿음은 합리적 설득과 반대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 (pistis)의 원어는 비합리적이고 무비판적인 신뢰를 뜻하지 않으며, 합리적 설득을 통한 신뢰를 가리킵니다. 우리네 신앙 생활에서 흔히 믿음을 말하면, 우리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냥 무조건 덮어놓고 믿어라’라는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의문과 의심을 무시하시고 억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1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의 신앙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믿지 않는 이들도 알아듣고 이해할 만한 이유입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된 이유가 단지 합리적이고 소통 가능한 것들만으로 100%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의심하는 것들에 대해서 합리적인 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학에는 변증학(apologetics)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변증학은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분야입니다. 비록 믿음이 이미 말씀드린대로 100% 합리적인 것만도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100% 비합리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왜 그토록 많은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으며, 그들의 고민을 함께 고민할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믿음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묻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던 바로 그 ‘소망에 관한 이유’ 말이지요. 우리는 젊은 세대들이 우리가 가진 소망에 관해서 물을 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당장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막막할 수 있지만, 잘 생각해 보시면 우리 모두가 그런 이유들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믿음은 비합리적(irrational)일지언정, 반합리적(anti-rational)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치면서, 다시 한 번 한경직 목사님의 충고를 떠올려 봅니다.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우리 모두 예수를 잘 믿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 연재 때 또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