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방해하는가: 복음이 말하는 죄와 구원, 그리고 의로움 (정의)
지난 글에는 복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에 관한 소식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말은 복음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소식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도덕과는 확연히 다른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란, 그 분과의 사랑이 깊어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에 대해서 아주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래서 팀 켈러(Timothy Keller)는 자신의 책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에서 이 비유를 가지고 복음을 소개합니다. 대놓고 아버지를 배신한 채,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축복만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어떤 점을 잘못했는지가 명백하게 보였던 것과는 달리, 맏아들은 겉으로는 아버지의 계명을 모두 지키고 있었기에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받을 자격이 없어 보이는 동생을 아버지가 여전히 다시 환영할 때, 맏아들은 자신이 왜 그토록 열심히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는지, 그 근본 동기를 드러냅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그토록 노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집안의 옷이며 반지며 가축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자신의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개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 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 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당신도 하나님께 순종해 착한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이유로 그 분이 당신에게 복과 도움을 베푸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당신을 돕는 자 내지는 감화를 주는 모본은 될지언정, 당신의 ‘구주’는 아니시다. 당신 스스로 구주 역할을 맡고 있다. (탕부 하나님, 70)
한마디로 맏아들은 아버지의 자신을 향한 사랑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는 것이 아버지와 관계를 맺는 방법임을 몰랐습니다. 즉 자신이 아버지께 받아들여지고 인정을 받는 까닭이 자신이 아버지의 모든 계명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성취와 헌신으로 은연 중에 아버지를 조종하려 했고, 또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켈러가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맏아들을 교회에 다니지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로, 그리고 둘째 아들을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좋은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로 상정하고 있음을 알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근본 동기는 같습니다. 둘째 아들이 대놓고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의 축복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꾸려나가려고 했던 것처럼, 맏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은 채로, 둘째 아들만큼이나 아버지의 사랑에서 분리된 삶을 살아갑니다. 즉 둘 다 아버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 지으려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종교적이지 않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렇게 했고, 맏아들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켈러는 유명한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입을 빌려서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섬김에서 깊고 깊은 자기 정체감을 찾아내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태도가 죄다. 죄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기를 바라며 참 자아와 동떨어진 정체성을 추구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다들 어딘가에서, 또는 무언가로부터 스스로 남다르고 독특한 존재라는 정체성을 얻는다… 흔히 죄라고 하면 우선 ‘거룩한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키르케고르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이 십계명의 첫 줄을 차지하는 속뜻을 정확히 꿰뚫는다. 따라서 성경이 죄를 규정하는 방식은 단순히 나쁜 짓을 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으며 선한 무언가를 궁극적인 대상으로 삼는 태도까지 아우른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그 밖에 다른 요소들을 삶의 의미와 목적, 행복의 중심으로 삼고 그 위에 자기 정체감을 세워 가려는게 죄라는 것이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255)
복음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짓는 죄는 단지 거룩한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죄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근본 동기까지 깊숙이 닿아 있으며, 따라서 복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한다는 의미는, 우리 삶의 근본 동기에 대해서 복음이 할 말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이제껏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토대를 제공해주었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말입니다. 맏아들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심지어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외적으로 종교 생활을 성실히 하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은 심각한 도전을 가져다 줍니다. 복음이 단지 착한 삶을 살라는 소식이 아닌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과연 죄가 어떻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살펴볼 죄의 구체적인 사례들은 1) 빈둥지 신드롬(the empty nest syndrome)과 2) ‘우리의 열심과 그 배후에 자리한 동기’입니다. 필자는 죄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그 밖에 다른 요소들을 삶의 의미와 목적, 행복의 중심으로 삼고 그 위에 자기 정체감을 세워 가려는 시도”인지를 이 두가지 죄의 사례들을 통해서 살펴볼 것이며, 이런 시도들 자체가 사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것임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울러서, 우리가 이런 스스로 구원하려는 시도들에서 멀어지면 질수록 정의롭게 된다는 점 또한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선, 구원이라는 용어가 교회 바깥에서는 잘 쓰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흔한 오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피조물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규정 짓는 시도 자체를 우리가 스스로 구원하려는 시도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죄란, 하나님 외에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들고 우리 삶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 되시면 되실 수록 우리는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신앙이 있건 없건 간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대로 귀하고 존엄한 존재로 사랑받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라고 했을 때(미 6:8; 약 1:27),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지으면 지을 수록 우리는 이제껏 우리의 존재 가치를 부여했던 기준들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예를 들면, 이제껏 내가 나의 존재 가치를 찾는 근거가 내가 학벌이 뛰어나서였다면, 나는 저절로 학벌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우러러보게 되고 (혹은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나보다 학벌이 못한 사람을 우습게 보게 됩니다. 나에게 학벌이라는 기준이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지을 만큼 강력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왜 우리 사회에 소위 갑질이 만연할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는 기준을 세워놓고 (예를 들면 힘이나 돈이 있어야 존재 가치가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정의의 문제이죠. 내가 가치 있는 존재인 까닭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고 하면, 우리는 다른 것들에서 우리가 인정받아야 할 근거를 점점 더 찾지 않게 되고,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첫번째 사례인 빈둥지 증후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빈둥지 증후군(The Empty Nest Syndrome)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한 블로거는 빈둥지 증후군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장한 자식들이 다 떠나버린 노년 부부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후군으로서 정신적 불안정과 우울증, 허탈감을 수반합니다.”[1] 모두 아시다시피, 한국 사회는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우는 일이 많은 부부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과업이라는 문화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엄청난 교육열은,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흔치 않은 희생을 하는 것이 별로 이상하지 않은 문화가 한국 문화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리가 앞에서 죄를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빈둥지 증후군이 왜 죄의 구체적인 사례가 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그 밖에 다른 요소들을 삶의 의미와 목적, 행복의 중심으로 삼고 그 위에 자기 정체감을 세워 가려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빈둥지 증후군이란, 부모님들이 자녀를 잘 키우는 일에 당신들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를 두게 되면서, 막상 자녀들이 부모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제껏 정체성의 근거가 되어주었던 대상(=자녀들)과 과업(=자녀들을 잘 키우는 것)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면서, 속된 말로 일종의 멘탈 붕괴 상태에 빠지게 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가령 좋은 부모라는 토대 위에 정체감을 세운다고 해보자. 참다운 ‘나‘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좋은 부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들딸에게, 또는 아이들을 키우는데 문제가 생기면 ‘나’라는 존재는 조금도 남아나지 않는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258)
자녀를 잘 키우는 일에 내 온 열정과 헌신을 다 바쳤는데, 만약 자녀들이 잘 되지 못했다면, 부모님들의 마음은 정말 힘들어집니다. 당신들의 중요한 삶의 의미 중 하나가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이 어떻게 도움이 될까요?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말씀드린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이나 누군가에게 우리 삶의 의미나 존재 가치를 걸지 않도록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이 원하는 만큼 잘 성장하지 못해서 절망에 빠진 부모님들에게, 하나님은 그 부모님들의 삶의 의미가 자녀를 잘 키우는 일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십니다. 아니, 오히려 참된 부모님 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부모님들이 정체성을 두게 되면 될수록 자녀들에 대한 과한 욕심이나 부모가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이루는 수단으로 자녀들을 바라보지 않게 되며,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 마치 참된 부모님이신 하나님께서 부모로서의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인정해주시듯이, 그렇게 우리의 자녀들을 받아주고 인정해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정체감을 세우는 부모님들은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참다운 회복을 경험하는 길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관계의 회복으로써의 정의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부모님들 개인의 욕심이나 열정 때문에 자녀들을 섣불리 조종하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자녀들 각각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과 달란트를 잘 찾아낼 수 있도록 돕고,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들이 잘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역할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죄를 통해 얻는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빈둥지 증후군이 “자녀를 성공시켜야 가치 있는 부모야”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이면서, 삶의 의미를 거기에 두고 그를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다가 허망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은 부모님들과 자녀들 사이의 관계를 하나님과 그 분의 사랑하시는 아들딸 사이의 관계에 둘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두번째 죄의 사례로, ‘우리의 열심과 그 배후에 자리한 동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사례와 마찬가지로,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것은 한국 문화 안에서 거의 절대적인 이상으로 자리잡은지 오래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열심히 섬기는 것을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 생각해봐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열심을 내는 동기가 무엇이냐입니다. 직장에서 열심을 낼 경우,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라는 선한 동기가 우리가 열심을 내는 까닭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팀 켈러는 도로시 세이어즈의 책 신조인가 혼조인가(Creed or Chaos?)를 인용하면서 세이어즈의 칠죄종(7 Cardinal Sins: 7가지 주요한 죄)에 대해서 통찰력 있게 말합니다.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일의 동기가 없으면 나머지 여섯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 가운데 하나가 노동의 에너지가 될 수 밖에 없다. 다른 이들보다 앞에 서고 싶은 시기, 자신을 입증해 보이려는 교만, 쾌락을 얻으려는 탐욕이나 탐심 때문에 남달리 열심히 일할 수도 있다.
(팀 켈러, 일과 영성, 285)
독자 여러분들 중에는 이미 은퇴를 하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은퇴를 하시고도 다른 일을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일하실 때 그 근본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가족들과 상사들, 친구들에게 인정받기 위함이었나요? 돈을 많이 벌기 위함이었나요? 자녀들을 키우기 위함이었나요? 아마 이것들 중에 한가지 동기로만 열심을 내는 경우는 그다지 흔하지 않고, 많은 분들은 이런 동기들이 모두 섞여서 열심을 내는 연료로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필자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어떤 한가지 동기가 누군가의 열심을 전적으로 이끌어가기도 합니다. 필자가 아는 어떤 분은, 신학교 시절에 교수가 자신을 무시하는 얘기를 듣고, 신학교 내내 열심히 공부하는 동기가 그 교수의 콧대를 꺽어주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분은 졸업 논문을 쓰실 때 마침내 그 교수님에게서 아주 잘 쓴 논문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지요. 하지만 그런 열심은 도대체 무슨 소용인 걸까요?
우리가 무언가에 열심을 낸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반문해 본다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로시 세이어즈가 언급한 일곱 가지 죄들 중 적어도 한가지는 우리의 열심을 이끄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동료에 대한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열심을 내기도 하고, 엄청난 돈이나 권력을 쥐어보겠다는 탐욕으로 열심을 내기도 하며, 또 때로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감정들 때문에 열심을 낸다면, 사실 그 배후에는 우리가 정말로 붙잡고 신뢰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탐욕이든, 시기나 질투이든, 분노이든, 이런 감정들에 이끌려서 열심을 내다보면, 그 끝이 좋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나만 탐욕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탐욕을 연료 삼아 열심을 냅니다. 나의 탐욕과 다른 사람들의 탐욕이 충돌하는 지점에서는 반드시 한 쪽에 큰 피해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만 시기나 질투를 하는 것도 아니며, 나만 분노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시기, 질투, 분노가 발하는 지점이 다른 이들의 시기, 질투, 분노가 발하는 지점에 충돌하면, 그 때문에 생기는 갈등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갑니다. 결국 이런 동기를 가지고 내는 열심의 종착역에는 죽음과 허무 밖에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복음은 우리가 일하는 명확한 동기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며, 그들을 섬기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일을 통해서 내는 업적이나 성취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일 중독(workaholism)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존재의 소중함과 가치를 이미 하나님을 통해서 확증받았기 때문에 일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되신 하나님은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시기나 질투를 피하게 만들어 주시며, 사랑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쉽게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듯이, 인생은 속도보다는 방향이라고 한다면,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방향은 분명히 맞는 방향이며, 우리가 열심을 내는 근본적 동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자리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풍요롭고 넉넉해질 것입니다. 다음 연재 때는 이제까지 얘기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어떻게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인간 관계를 누리는 지혜에서 자랄 수 있게 도와주는지에 대해서 얘기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