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장하는 길이 곧 인간 관계에서 성장하는 길인가: 복음과 노년의 지혜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관계는 단지 직장이나 일에서의 성공을 위해서만 중요한게 아니라, 인생 자체를 풍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진행된 아주 유명한 행복에 관한 연구가 있습니다.[1] 장장 75년에 걸쳐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를 추적했는데, 놀랍게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들(돈, 권력, 명예 등)이 아니라, 바로 좋은 관계 맺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인정해주는 좋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히 좋은 관계 맺음에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사실 내가 좋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역할할 수 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나는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갈 만한 인격적인 자질이 되어 있지 않은데, 어쩌다 운이 좋게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모두 참 좋은 사람들이어서 행복하게 산다는 말은, 어쩌면 굉장히 무책임한 말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데 기여할 만한 구성원이 되지 않은 채 내가 지고 있는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짐을 다른 이들에게 모두 떠넘기고 있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내 문제를 다 견디고 참아주어야 하나요? 물론 실제적으로는 나 또한 내 주변 사람들의 약점과 깨어짐을 받아주고 견디어 주고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공동체를 만들고 행복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나부터 그런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떻게 좋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실까요? 이 말이 예수를 따르는 신앙이 좋은 공동체를 만들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데 도구일 뿐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각자 예수를 잘 따라가다보면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또한 여기서 좋은 공동체란, 좋은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속한 모든 인간 관계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모여서 살아가는 일이 단지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며, 또한 예수를 따르는 일도 단지 교회 안이 아닌, 우리 삶의 전 부분에서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필자가 여기서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따르는 우리의 삶이 좋은 관계 맺음으로 이끄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고려해야 할 점은, 좋은 관계 맺음을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이란 무엇인가가 될 것입니다. 또한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우리가 믿는 복음이 어떻게 좋은 관계 맺음으로 이끄는지가 될 것입니다.
우선 좋은 관계 맺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라는 독일의 철학자는, 내가 다른 이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 또한 우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가다머가 한 얘기와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친구를 위해서 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자기 방어 본능에 사로잡혀서 움츠러 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내어주는 (굳이 우리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목숨을 희생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사랑의 표현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정한 친구됨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나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잘 알고 누리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나누어주고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나를 두려워하게 만들거나, 방어적이 되게 만들거나, 주저하게 만드는 어떤 과거의 기억들이 있다거나, 인간 관계를 가로막는 생각들이 있다면 그것은 나 스스로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방어적이 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고스란히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결국 내가 나 자신에게도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친구가 되기 어렵게 만들고 맙니다. 이것은 먼저는 결국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바라보는 자아상 혹은 자존감 (필자 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얼마나 가치 있고 사랑 받을 만한 존재로 이해하는지에 관한 우리의 마음 상태)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껏 계속해서 우리의 대화를 돕는 파트너로 함께 해 온 팀 켈러 (Tim Keller) 목사님의 말을 들어봅시다.
부모, 형제자매, 남자 친구와 여자 친구, 교사와 코치들은 당신에 대해 좋다 나쁘다, 가치가 있다 없다, 유망하다 가망 없다 따위의 판단을 내려 왔다. 우리는 그것을 걸러 듣기도 하고 더러는 잊으려고도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긍정적인 평가는 비판과 비난에 비해 인간 심리에 드리우는 그늘이 옅고 지속성도 떨어진다. 반면 누군가의 말을 통해 받은 상처는 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따라서 자아상은 여러 층으로 이뤄지며 상당 부분은 모순적이다. 그것은 일관된 흐름 없이 얼기설기 엮여 있기 일쑤다. 자아상이라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각들을 이어 붙인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평가는 아마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는 혼잣말들이다. 많은 이들의 머릿 속에서는 자신을 향해 바보 같고, 멍청하고, 실패자에 낙오자라고 질책하는 독백들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결혼을 말하다, 196)
우리가 얼마나 이런 평가들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옭아매고, 스스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느냐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관계 맺는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판단하고, 판단받았던 바로 그 기준에 우리가 많이 휘둘리면 휘둘릴수록, 신기하게도 바로 그 기준을 가지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을 더욱 넉넉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실수나 실패에도 심하게 민감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이들이 나를 내가 바라보는 나 자신보다 안 좋게 평가하는 말을 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나 자신과 좋은 친구 관계를 맺고 있다면, 다른 이들이 섣불리 그 친구 관계에 생채기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은 인생의 후반전에서 여러분 스스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앞으로의 삶에서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하버드 대학교의 연구가 보여주는대로) 좋은 관계 맺음이란 필수적이고, 좋은 관계 맺음은 바로 나 스스로와 좋은 관계를 맺는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생의 역사가 길수록 여러 사건과 기억들, 그 안에서 생겨난 감정의 습관들과 나 스스로를 평가하는 반복적 패턴들 때문에 이제껏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고 살았던 자존감의 중력이 습관적으로 더 무겁게 작동하게 되서 지금 내가 나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를 좀 더 긍정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을 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정신과 의사 윤홍균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은 자전거를 타는 과정과 비슷하다. 자존감은 자전거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우리는 자존감에 올라타 중심을 잡고, 핸들을 조종하며, 바퀴를 굴리는 과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자존감 수업, 22)
윤홍균 교수의 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점은 세가지입니다. 우선 자존감은 변화 가능합니다. 두번째로, 자존감은 우리가 꾸준히 노력해야 좋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존감이란, 높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I) 자존감이란 변화 가능하며, II)우리가 노력해야 좋아질 수 있는 것이며, III) 또 높을수록 좋다는 것. 이 세가지가 우리가 흔히 자존감에 대해서 생각하는 주된 판단이라는 점을 독자들은 잘 기억해 두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은 우리의 자존감에 어떤 메세지를 전할까요? 예수를 믿는 일 또한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걸까요? 앞으로 남은 지면에서 우리는 팀 켈러 목사님이 보여주시는 바울의 예를 통해서, 예수를 믿는 신앙은 자존감을 높이는 것도, 낮추는 것도 아닌, 완전히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고린도 전서 3:21-4:7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10)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정체성, 특히 자존감에 대해서 켈러 목사님은 사도 바울이 자존감이 높지도, 낮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아니,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자존감에 대한 관심을 아예 놓아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잊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윤홍균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자존감이 높아야 좋다라는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바울이 말한대로 이미 심판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그리스도께 부어졌고, 그 결과 바울은 하나님의 전적인 수용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바울의 자존감은 굉장히 안정적이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습니다. 즉, 자존감이 높아지기 위해서 신경을 많이 쓰지도, 또 자존감이 낮다고 걱정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앞서 윤홍균 교수가 말한대로 우리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말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혹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판단 받는 일을 ‘매우 작은 일’이라고 부르는데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의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모든 판단이 이미 내려졌음을 알고 있기에 고요하고 평온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고요함과 평온함이 자존감이 높아져서 생긴 것은 아니지요. 이것이 자존감을 높여야 좋은 관계 맺음을 할 수 있다는 가르침과 어떻게 다른지, 켈러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의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뻔하다고 여깁니다. 실제로 내가 아는 모든 상담가들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며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기준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합니다. 자기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기준에 따라 재단되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현대 사회가 내놓는 처방은 단 하나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입니다.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37)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상관없이 스스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울의 자존감이 높아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자존감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잊혀 졌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수용과 받아주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주셨음을 바울이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같은 사람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수용과 받아주심 때문에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즉, 바울 또한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수용해주심을 누리다보니 자존감이 높아진 경우가 아닐까요. 켈러 목사님은 디모데 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자기 판단을 예로 들며 그런 의문을 불식시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이 구절에 나타나는 바울의 자의식은 교만함이나 높아진 자존감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이런 자신에 대한 평가는 자존감이 낮은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발언에 더 가깝지요. 그렇다면 바울의 자존감은 과연 높은 것일까요, 낮은 것일까요? 켈러 목사님은 이미 언급한대로 바울의 자존감은 높지도 낮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자존감의 원천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켈러 목사님의 판단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였다고 하지 않고 내가 괴수다라고 합니다. ‘내가 가장 악한 죄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도식에는 전혀 없는 그림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확신과 위상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를 가장 악한 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 정직하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흠결을 정확히 인식하지만, 이와 같은 놀라운 평정과 담력까지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마다 스스로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더 자기 죄의 정체를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죄와 자신의 정체성을 연결 짓지 않습니다. 그의 죄와 정체성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이 둘을 연결하기를 거절합니다. 자기 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죄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 크고 대단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규정하거나 우쭐해 하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42-43)
이런 자존감은 어떻게 생길까요? 자존감의 원천이 어디냐가 성패를 가릅니다. 원천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사랑과 수용이 이미 변함이 없는 것으로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에), 여기에 자존감의 근원을 둔 사람은 자신의 흠결과 죄에 대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존감에 흠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여기에 자존감을 둔 사람은 그러한 자존감을 위해서 자신이 노력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겸손합니다. 이미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좋은 관계 맺음이 가능해졌고, 그 좋은 관계 맺음이 내가 나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는데 원천이 되어준다는 것이 바울의 예에서 우리가 발견한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서 내가 나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는 원천을 발견한 사람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 맺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좋은 관계 맺음에 전하는 메세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윤홍균 교수가 자존감을 자전거 타기에 비유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윤홍균 교수는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전거는 혼자 타지만 타는 법을 혼자 터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운동 신경이 남다르고 균형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옆에서 돕는 사람 없이는 배우기 쉽지 않다. 누군가 옆에서 코치를 하거나 잡아줘야 한다 (자존감 수업, 22)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윤홍균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코치와는 차원이 다른 돕는 분이 계십니다. 윤홍균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존감 코치는 어떻게 해야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의 자존감의 근원이 되어주시는 분은 우리에게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직접 관계를 맺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자존감의 근원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정말로 누린다면, 즉 하나님의 좋은 친구 되심을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가다머의 말처럼, 스스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고, 또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우리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인생의 지혜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지혜를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복음은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좋은 친구 되심을 충분히 누리면서 산다면 말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인생의 후반전에 찾아오는 외로움과 공동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얘기 나눠보도록 하지요.
[1] https://news.harvard.edu/gazette/story/2017/04/over-nearly-80-years-harvard-study-has-been-showing-how-to-live-a-healthy-and-happy-life/
[2]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Gadamer), Hermeneutics, Religion, and Ethics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