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어떻게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드는가 (6):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지혜에 대하여

복음은 어떻게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는가 (6):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지혜에 대하여

여러분, 잘 지내셨는지요? 이번 시간에도 복음이 어떻게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지난 시간에는 죄의 핵심이 자기 중심성이라는 얘기 외에도,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자기 중심성이 우리 스스로를 저주하는지,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우리를 그런 저주에서 풀려나게 도와 주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죄라는 실재가 우리의 자아상 (self-image) 구축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이라는 실재가 그에 대응해서 우리의 자아상 구축을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어주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한 저의 문제 의식은 최근에 경험했던 두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더 강렬해졌고, 그 두 에피소드에 비춰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복음이 어떻게 죄가 구축하는 자아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자아상을 세워가는지에 대해서 새롭게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죄란, 단지 사회적으로 악한 행동만이 아니며, 지난 시간에도 강조했듯이 선한 행위,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 또한 포함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선하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행위가 자기 중심성이라는 동기에서 나오느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그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 없이 우리의 자아상을 구축하는데 직접적인 재료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하실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이번 연재의 목표입니다.

이제 제가 경험했던 두가지 에피소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나눠 보겠습니다. 그 두 에피소드는 모두 사람들이 죄를 바라보는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 에피소드가 어떤 것들이었는지 아래에서 제가 설명하는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읽고 나시면, 제가 그 두 에피소드를 경험하면서 깨닫게 된 것들에 대해서, 특히 죄와 복음, 그리고 자아상 구축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실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제가 경험했던 두가지 에피소드에 대해서 나누면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두 에피소드 중 첫번째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그리고 두번째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에피소드 1: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복음의 선언을 부담스러워 할까?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왜 교회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꽤나 많은 이들이 교회가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상식적인 사람들에게 죄라는 말은 비도덕적인 일, 혹은 법을 어긴 일과 연관이 있는데, 교회가 왜 자기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도덕적이었던 적도, 법을 어긴 적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죄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자기 중심성 그 자체라는 설명을 들으면, 그 분들도 어느 정도 왜 기독교 복음이 자신들을, 아니 모든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르는지 동의하긴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저는 최근 이런 성향이 단지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복음이 어떤 메세지인지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현재 출석하는 교회는 목사님께서 인간의 죄인됨에 대해서 특별히 많이 강조하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나오다가 다른 교회로 옮기신 분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분들에게 왜 우리 교회를 떠나신 것인지를 물어봤을 때, 흥미롭게도 목사님의 설교가 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는다는 반응이 나왔더랬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기독교의 죄 교리는 마냥 사람들을 불편하게만 하는 교리인 걸까요? 죄 교리가 하는 역할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좀 다를까요?

에피소드 2: 신앙 생활에 열정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하면 화를 낼까?

재작년 가을에 미국의 어느 한인 교회에 강연을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제가 했던 강연은 복음이 어떤 메세지냐에 관한 것이었고, 저는 복음이 어떤 메세지이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하나님 앞에서는 교회를 오래 다니고 봉사를 많이 한 사람이나, 기도를 오래 한 사람이나, 혹은 교회를 전혀 다니지 않고 세상에서 마음대로 산 사람이나 똑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강연이 끝난 후, 그 교회를 열정적으로 섬기신 집사님 한 분이 제 강연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어떻게 교회에 오래 다니면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 사람들과 교회에 전혀 다니지도 않고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 분은 상당히 기분 나빠 하셨고, 당신의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사랑을 그런 식으로 무시하지 말라는 투로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일단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는 예상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또한 그 분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복음은 그 분의 질문에 할 말이 있고, 반박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감으로는 느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는지 잘 몰랐던 것이죠. 그런데 그 이후에도 복음을 사람들과 계속해서 나누면서, 또 생각이 좀 더 깊어지면서 어떤 것이 문제였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의 자아상을 구축하는 모든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전체이다

이제 죄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히 이번 연재의 제목인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지혜에 대하여”라는 차원에서 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제가 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당연히 위의 두 에피소드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 에피소드에서 제가 겪었던 사람들이 보여주는 공통적인 반응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지 힘들어 하셨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교회를 다닌 적이 없으신 분들의 경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얘기를 상당히 부담스럽게 들으셨지요. 반면에 교회에 오래 다니셨고 교회 봉사와 기도를 열심히 하셨던 분들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데에는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셨지만, 상대적으로 교회를 다닌 적이 없는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자신들이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자아상 구축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특히 죄가 어떻게 우리의 자아상을 구축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려면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 죄인지, 왜 그것이 죄인지를 다음의 로마서 구절을 통해서 명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23)

이 말씀은 로마서 14장이라는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도 죄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있지만, 좀 더 일반적인 맥락에서도 죄가 과연 무엇인지를 잘 짚어내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어진 로마서 14장의 구체적인 맥락은 고린도 전서 8장과 같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과연 죄의 영역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바울이 말하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이 죄라고 말하지 않는 애매한 영역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괜찮느냐 그렇지 않느냐 같은)에서는, 신앙인 각자가 나름대로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음식을 먹든, 그렇지 않든 믿음 안에서 각자의 양심에 맞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풀어내면서 바울은 뜻밖에 죄가 어떤 것인지를 정의합니다. 바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규정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왜 바울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한 것일까요?

사실 믿음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더 깊이 푸는 것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이 공간만으로는 굉장히 부족할 것입니다만, 하지만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왜 바울이 죄를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으로 규정했느냐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믿음이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연결 고리이며, 그 분과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인 반면, 죄는 그 관계를 끊는 힘인 동시에, 그 관계가 끊어진 상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 CCC(Campus Crusade for Christ)라는 선교 단체에서 나온 사영리(Four Spiritual Laws)를 들어보신 분이 계실까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준곤 목사님께서 한국 이사장으로 섬기셨던 단체였고, 빌 브라이트 목사님께서 세계 CCC 전체 총재를 역임하셨던 단체인데, 이 단체에서 복음을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만든 자료가 바로 사영리 입니다. 그런데 이 사영리는, 죄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관계를 끊기 위해서 작동한 힘도 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끊는 힘이기도 하고, 또한 그 끊어진 관계 자체이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릴 때 생겨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이 신뢰는 처음에는 약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면서, 또 여러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깨닫게 되면서 점점 더 강해지게 되고, 점점 더 우리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즉 우리의 자아상을 구성하는 내용물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 11:6)

즉 성경은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 은혜, 사랑,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축복을 받아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우리 바깥에 있는 것들의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9)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의 자신 됨, 즉 자신의 자아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전해진 그 분의 사랑에 있었고, 그런 자아상은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사랑을 믿을 때 구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성과와 업적, 그리고 그런 성과를 내기 위해서 자신이 냈던 열심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공적을 돌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은 앞에서 제가 경험했던 두가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분들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자아상을 구축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앞의 두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분들은 자신들의 자아상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선행이나 악행을 가지고 자신들의 자아상을 구축하려고 하는 분들입니다. 그럴 때 죄에 대한 불편한 마음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왜 그런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분들 중에서 일단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는 분들은 제외하고 얘기하겠습니다. 그 분들은 죄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없으신 분들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교회에 오래 다니셨던 분들 중 죄에 대해서 말하는 설교를 불편해 하시는 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별히 자아상 구축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그 분들이 죄를 불편해하는 까닭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신들이 이미 구축해 놓은 자아상, 즉 자신들은 어느 정도 존재 가치가 있고, 사랑 받을 만 하며, 세상에서 유익한 존재라는 그 자아상에 흠집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바꿔 말하면, 그 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사랑하셨다는 그 사실만이 자신들의 자신됨을 규정한다는 바울의 고백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아상을 구축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은혜와는 관계 없이) 자신들의 자아상 구축에 직접적인 재료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울이 말하는대로 하나님의 은혜에만 기반을 두고 자신의 자아상을 구축한다면, 아무리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해도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울 이유는 사라집니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자아상 구축에 있어서 재료가 되지 않기 떄문입니다. 대신 바울이 디모데전서 1:15에서 고백했듯이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최고 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첫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분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부를 때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죄인이라는걸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자아상이 평가절하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내가 죽일 놈이고, 내가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 그 말에 담긴 정서를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많은 경우 그런 말은 정말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서, 자신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가 비하되는 것에 화를 내고 맞서 싸우기 위해서 하는 말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가장 악한 죄수라고 말할 때 이런 종류의 불편함이나 마음의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아상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자아상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은, 자신의 자기 자신됨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오직 그 사실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닌, 다른 것, 즉 자신이 어떤 일을 잘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거나, 혹은 어떤 일을 못하기 때문에 가치 없다거나 하는 식의 자아상 구축은 그것이 선한 행위에 기반하고 있든지, 악한 행위에 기반하고 있든지, 모두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이 한 말에 의하면 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한 자아상은, 내 선행이나 악행 모두를 객관적으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며, 내 선행 때문에 우쭐하게 만들지도, 내 악행 때문에 내 자존감이 깎여 나가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선행과 업적마저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했다고 고백하게 만들며 (“내가 모든 사도보다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인정하고 잘못을 고백하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만듭니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해서 우리의 자아상을 세우는 일이라면, 두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집사님 또한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자아상을 세워나가려는 분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두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집사님께서 기분이 나쁘셨던 까닭은, 자신이 이제껏 해왔던 모든 봉사와 헌신,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자신의 자아상 구축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면에서 자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이들, 특히 교회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 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자아상, 즉 자신의 행위, 특히 종교적 헌신과 봉사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인정받은 행위로 여기고 그 행위를 기반으로 하는 자아상을 구축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아상을 구축하게 되면 당연히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나 모두 똑같다는 말을 들을 경우 굉장히 힘들어하게 됩니다. 두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집사님께서 힘드셨던 까닭, 저에게 왜 그렇게 말하냐며 기분 나빠하셨던 까닭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그 집사님의 자아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해서 구축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행과 종교적 헌신을 자기 자아상 구축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만약 믿음에서 난 것이었다면 바울이 말했듯이 자신의 선행도, 자신의 악행도, 모두 자신의 자아상과는 상관 없음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선행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악행 또한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자아상을 구축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일이 됩니다. 지금껏 우리를 지탱해온, 우리의 자아상 구축에 사용되어 온 모든 선행과 악행을 하나하나 우리 자신에게서 떨어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오직 그 분의 사랑만이 우리를 규정 지으신다는 그 깨달음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자라가는 일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 일 저 일을 겪으면서 그 분을 점점 더 신뢰하게 되고, 그 신뢰가 마침내 내 존재 가치의 전부를 결정 지을 정도로 자라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온전히 겪어내는 분들은 굉장히 드뭅니다. 그에 앞서서 이런 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 자아상 구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도 드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믿는 자아상 구축이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달라지는 것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규정짓는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알게 되기만 해도 의지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2020년이 벌써 중반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올해 여러분의 자아상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축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다음 연재 때 또 찾아뵙겠습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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