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어떻게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드는가 (1): 노년에 닥치는 외로움에 관하여, 그리고 죽음을 준비함에 대하여
지난 글에서는 복음이 전해주는 관계의 지혜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특히 복음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존감의 문제에 관한 한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해결책과는 전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는지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특별히 최근 한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윤홍균 교수님의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을 참고하면서, 윤 교수님의 가르침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복음이 어떻게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존감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지난 연재에서 나누었던 내용 중 관련 부분을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윤홍균 교수가 자존감을 자전거 타기에 비유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윤홍균 교수는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전거는 혼자 타지만 타는 법을 혼자 터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운동 신경이 남다르고 균형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옆에서 돕는 사람 없이는 배우기 쉽지 않다. 누군가 옆에서 코치를 하거나 잡아줘야 한다 (자존감 수업, 22)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윤홍균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코치와는 차원이 다른 돕는 분이 계십니다. 윤홍균 교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존감 코치는 어떻게 해야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의 자존감의 근원이 되어주시는 분은 우리에게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직접 관계를 맺어주심으로써 우리의 자존감의 근원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정말로 누린다면, 즉 하나님의 좋은 친구 되심을 잘 알고 있다면, 우리는 가다머의 말처럼, 스스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고, 또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 우리를 내어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인생의 지혜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자존감의 근원으로 삼고, 그 분과의 관계에서 성장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도 좀 더 용납하고, 좀 더 받아주며, 좀 더 이해의 폭이 깊은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존감의 근원을 하나님의 사랑에 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은 인생의 본질적 외로움입니다. 특히나 한창 일할 나이를 지나신, 자녀들도 모두 독립해서 가정을 떠나 이제 둘만 혹은 홀로 남은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는 외로움이란 친구가 저절로 찾아듭니다. 더군다나 몸까지 쇠약해져서 병이라도 달고 살라치면 심리적 외로움은 관계적, 물리적인 외로움으로까지 확장되고 증폭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어르신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문제들 중, 가장 자주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아마 ‘고독사’일 겁니다. 2018년 보건 복지부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홀몸 노인 무연고 사망자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총 3,331명에 달했다고 합니다.[1] 더군다나 이런 고독사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까닭은, 홀로 살아가는 어르신들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통계청은 2018년 6월 현재 홀몸 노인 인구를 140만 5천 8명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2014년의 115만 2천 673명과 비교해 볼 때 17.9% 증가한 수치라고 합니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감소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현대의 기술과 의학의 발전을 통해서 사람들의 기대 수명이 획기적으로 연장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의학이 지금만큼 발달하지 않았기에, 노인들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 또한 죽음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보건과 위생 관념이 철저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어린 아이들이 (불의의 사고를 제외하고)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나이가 들지 않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가 되었지요. 문제는 길어진 사람들의 수명이 오히려 외로움과 관계 단절의 시간을 더 길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백세 시대’라는 말이 요즘 흔히 회자되고 있지만, 백세까지 살 정도로 수명이 길어졌다는 말은 정년 퇴직 이후, 자녀들이 모두 결혼해서 집을 떠난 이후, 나이가 든 부모들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 지 모른 채로 외로움과 단절을 대면해야 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어르신들이 다른 세대보다 더 외로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는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젊은 세대들의 경우 아직 직장도 있고, 자녀도 키워야 하며, 삶에 의미를 줄 만한 여러가지 활동을 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활동을 하기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워지는 때가 오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까지의 삶을 의미 있는 활동으로 채워오면서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던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빼앗기게 되는 노년의 시기에 들어서면 인생 자체의 허무함을 강력하게 느끼게 되고, 안타까운 경우 그런 허무함은 앞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다른 원인들 (관계의 단절, 경제적 어려움 등등)과 함께 상황을 악화시켜서, 고독사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이런 외로움이 인생의 본질적 허무와 외로움을 직면하게 해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죽음 이후의 삶을 바라보게 해준다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일상의 활동을 삶의 의미 전부로 보면서 살아온 우리들 대부분에게 이전까지 삶에 의미를 제공해주던 관계와 활동으로부터의 단절 이후 살아아 하는 삶은 외롭고 어려운 시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은 과연 이런 고독사를 비롯한 노년의 외로움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일단 명확히 해야 하는 점은, 기독교 신앙은 인생의 이런 냉혹한 면을 단지 다독여주고 위로해 줌으로써 적당히 덮고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이 냉엄한 현실에 대한 직면 없이 그냥 무조건 위로해주고 다독여주는 일만을 함으로써 대중을 혹세무민 한다는 오해를 했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도 꽤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공산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칼 맑스(Karl Marx, 1818-1883)가 있는데요. 맑스는 기독교를 가리켜서 “종교는 민중의 아편”(religion is the opium of the people)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의미한 바는,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냉혹한 현실에는 눈감고, 그저 섣부르고 설익은 환상만을 무작정 따르는 길로 인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만약 기독교 신앙이 맑스가 말한대로 이런 메세지를 전하는 신앙이라면, 기독교 신앙은 맑스의 말대로 굉장히 해로울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 근거도 없이 “잘될거야 괜찮을거야”를 남발하는 소위 이런 류의 긍정 메세지는, 나이가 들면 찾아오는 외로움과 허무함이 언젠가는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게 만들고, 자칫 잘못하면 한국 사회에서 어르신들이 처한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에 눈을 가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노년의 외로움의 문제를 비롯해서 그 이면에 있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이라는 현실을 철저하게 직면하도록 이끕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바라보는 죄 문제의 핵심에는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밝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 6:23)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 그리고 부활하심은 모두 이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죽음이라는 현실에 무감하지 않으며, 죽음의 원인인 죄라는 현실 또한 스리슬쩍 넘어가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현실과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죄라는 현실 모두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줍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문화는 죽음을 가능한 한 피하라고 주문할 뿐만 아니라, 죽음과 연관된 모든 문제, 예를 들면 질병이나 고통도 (그리고 당연히 노년의 외로움도) 맞닥뜨리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실 현대 문화에 대한 이런 비판적인 관찰은 여러 명민한 인물들을 통해서 이미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환자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 의사로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적 묵상을 담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를 최근에 출간한 미국의 의사 아툴 가완디(Atul Gawande)는 같은 책에서 현대 문화의 이런 면을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비판합니다.
현대화는 사람들에게—젊은이와 노인 모두에게—더 많은 자유와 통제력을 누리는 삶의 방식을 제공했다. 거기에는 다른 세대에게 덜 묶여 살 자유도 포함되어 있다. 노인들에 대한 존중은 없어졌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젊음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존중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삶의 방식에는 한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숭배가 삶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온다는 현실 말이다. 언젠가는 심각한 질병이나 노환이 덮쳐오게 될 것이다. 해가 지는 것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죽을 것인가, 27)
스스로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아직 40대라서 여전히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만, 필자에게도 언젠가 그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해질 때가 오게 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들은 이미 그런 때를 겪고 계시거나, 아니면 곧 다가오게 될 그런 때를 준비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는 외로움의 시간, 죽음의 시간, 견디기 힘든 시간을 어떤 태도를 가지고 맞이하느냐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그런 시간을 견디게 해줄 뿐만 아니라, 단지 견디는 것을 넘어서 죽음 이후의 삶에 소망을 둘 수 있게 해주는 영적 자원(spiritual resource)이 있다면, 우리는 외로움이나 질병, 고통을 포함한 죽음과 관련된 모든 절망스러운 순간들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충분히 우리를 그런 길로 이끄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한국의 상황에서는 아주 드물게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문제를 다룬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이라는 책을 집필하신 곽혜원 박사는 우리가 가진 신앙이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문제를 잘 다룰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다음에서 잘 설명합니다.
기독교 역사 면면히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앞둔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가운데 자신들의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신앙으로 표현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죽음을 자주 묵상하고 성찰했는데, 이는 죽음에 대한 묵상과 성찰이 기독교 역사 내내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과거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인생을 죽음의 대비과정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죽음을 준비하는 일을 모든 사람의 의무로 간주하였다. 노인들만큼이나 죽음에 빈번히 노출되어 있던 어린아이들에게도 기독교적 신앙과 가치관을 표현하는 좋은 죽음을 준비시켰다. (존엄한 삶, 존엄한 죽음, 186)
곽혜원 박사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 신앙 안에는 노년의 외로움과 죽음을 잘 대처하게 해줄 만한 자원들이 가득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외로움과 어둠을 극복하고도 남을 만한 소망을 제공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제껏 우리의 주 대화 상대가 되어주신 팀 켈러 목사님은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고 부활 신앙이 가진 잠재력을 탁월하고도 예리하게 드러냅니다.
반면에, 크리스천들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한 수백 명에 이르는 증인들의 확고한 증언을 기반으로 흔들림 없이 부활을 믿었다. 그게 우리의 미래상이었다. 개별적인 자아를 그대로 지닌 채 구원을 받는다. 죽은 뒤에도 인격적인 특성이 유지되고, 아름답게 단장되며, 완전해진다. 궁극적으로 마주할 미래는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온전하고 사랑이 거칠 것 없는 충만한 세상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적었다. “그리스도의 종들과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 이런 차이가 나게 하십시오. 우상 숭배자들은 친구들을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이 영원히 사라졌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죽음은 본질이 아니라 그저 이 땅의 삶이 끝난 데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질 자체는 더 나은 상태로 회복되므로 우리 앞에 당도한 죽음은 모든 눈물을 깨끗이 씻어갈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 특히 스토아 학파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결연히 인간을 구출하려 애썼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은 이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만족스러운 입장을 내놓았다. 인간이 가진 “무엇보다 큰 소망은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만나는, 그것도 자갈이나 채소들처럼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부스러기의 형태로가 아니라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대하는 형태로 재회하는 일이다”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72-73)
켈러 목사님이 잘 설명하고 계시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정말로 믿고 신뢰하는 신앙은 우리가 지금 겪는 관계의 단절, 외로움, 그리고 고독사 등의 문제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그런 다른 시각을 살아낼 원동력 또한 제공합니다. 필자는 켈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부활 신앙의 유익을 아래에서 3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게 해줍니다.
우리가 노년기에 들어서 경험하는 외로움이나 관계의 단절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우리의 직업, 관계, 취미 등등—을 전부로 알고 살았다면, 그런 것들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노년기는 그런 것들이 모두 삶의 근본적인 의미는 되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외치심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면, 이런 것들을 하지도, 즐기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절망과 외로움은 끝이 없을 정도로 넓고 깊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처럼 우리 또한 지금의 삶을 넘어서 부활하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외로움이나 관계의 단절이 부활을 믿지 않을 때보다 크게 다가오지 않을 것은 자명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 12:1)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는 노년의 때입니다. 그 때가 이르기 전, 젊음의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 전도자의 메세지입니다만, 상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창조자를 기억하십시오. 그 사실이 지금의 상실과 관계의 단절, 그리고 외로움을 극복할 힘을 여러분에게 새롭게 불어넣어 줄 겁니다.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부활 신앙은 지금의 외로움과 관계의 단절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을 넘어서, 지금의 시간을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줍니다. 죽음은 두려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지금의 시간을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준비하는데 사용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의미 있고, 훨씬 가벼우며,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은 아니라는 부활 신앙을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아툴 가완디의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른바 기술 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학자들이 ‘죽는 자의 역할’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이 삶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추억을 나누고, 애정이 담긴 물건과 지혜를 물려주고, 관계를 회복하고,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고, 신과 화해하고, 남겨질 사람들이 괜찮으리라는 걸 확실히 해두고 싶어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치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380)
가완디는 신앙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신앙이 없는 가완디같은 사람이 죽음을 준비함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면, 하물며 신앙이 있는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의 외로움과 고독을 넘어서 죽음을 준비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게 해줍니다. 그것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말입니다.
- 죽음 이후의 삶을 기대하게 해줍니다.
이생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준비해야 할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바로 그 삶, 죽음 이후의 삶을 고대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견뎠고, 또 그 너머의 삶을 소망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의미 있을 수 있는 까닭은, 지금의 삶을 통해서 다음 생애, 부활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일은 마치 죽음에 패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이 죽음에 삼키운 바 되지 않으셨음을 증명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죽음을 향한 힘있는 선포를 인용하면서 이번 연재를 마칠까 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 전서 15:5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