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어떻게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드는가 (2): 수치심을 가리려는 시도로써의 우리의 일, 그리고 수치심을 영원히 가리시는 그리스도의 일
지난 4번의 글을 통해서 필자는 복음에 대해서, 우상에 대해서, 복음을 통해서 인간 관계에서 성장하는 길에 대해서,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인생의 본질적 외로움을 넘어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는지까지 다루었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이제까지 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한 묶음으로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수치심의 문제입니다. 일단 수치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겁니다. 수치심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학자들마다 ‘수치심’(shame)에 대한 정의는 각양각색이긴 합니다만, 대체로 모두 동의하는 것은, 수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재 상태로는 뭔가 부족하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감정 상태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1]
따라서 수치심은 1)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평가를 받는지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치심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기가 쉽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수치심은 2) 우리가 누구이냐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다른 이들의 평가는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특별히 가까운 부모나 가족, 친척과 친구들에게 계속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란 참 어렵습니다. 역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계속해서 듣고 자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어렵습니다. 수치심은 이런 면에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우리 스스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미국의 대중 작가이자 학자인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은 이런 면에서 수치심을 ‘관계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2]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빈도가 늘어난다는 말은, 그들이 나와 어울리기를 꺼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치심은 3) 관계의 연결 혹은 단절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이런 면에서 필자가 수치심이 이제까지 시니어 매일 성경에 필자가 연재한 글들을 하나로 묶어준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제껏 필자가 이야기했던 주제들은 모두 이런저런 모양으로 우리가 스스로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서 (그리고 그 관계의 근본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 또한 달라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수치심은 우리가 맺는 관계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연재를 읽으시고 이전 호들의 연재를 읽어보신다면 필자가 하는 얘기들이 더 잘 이해가 되시는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우선 한국 사회의 수치심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리스도께서 이런 수치심을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생각해 보고, 마지막으로 수치심의 문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찾아오는 결과인 기쁨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한국 사회의 수치심 문화
한국 사회에는 수치심을 기반으로 해서 돌아가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필자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통해서 이런 얘기들을 참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너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이 (특히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그걸 어떻게 생각하겠어! 창피하지도 않니?” 라는 식의 얘기들 말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필자의 부모님은 필자에게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으면 열심히 해라”라는 식의 메세지를 많이 강조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필자의 부모님만의 잘못은 아닐 겁니다. 필자의 부모님 또한 그런 식의 교육을 받고 자라셨기에 별 생각 없이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교육을 하신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경험은 비단 필자나 필자 부모님의 것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에서 수치가 중요하다는 점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걱정이 지나치게 팽배하다는 사실에서도 발견됩니다. 수치라는 감정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여자분들의 경우, 동네 마트에 갈 때에도 남들의 시선을 생각해서 화장을 하고 간다는 분들이 흔합니다. 또한, 집안에 누군가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혹은 어떤 종류이든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우리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그런 얘기를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그도 아니면 (아무리 남의 시선을 신경쓰는 문화가 있다고 해도) 그래도 교회에서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지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잘되는 것을 질투하고, 못되는 것을 고소해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문화적 토양 속에서 나나 내 가족의 부족한 점, 못난 점을 수치를 당하지 않을 거라는 마음의 편안함을 가지고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에서는 그런 얘기를 드러내놓고 했을 때, 평가받거나 손가락질 받지 않을 거라는 편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자신의 못난 점, 부족한 점을 가리려고 하던 사람들이 교회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문화를 체화해 낸,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살아내려고 하는 교회 공동체는 사실 슬프게도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관련해서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몇 년간 열심히 봉사하면서 교회를 섬기던 어떤 가정에 자녀 문제가 혹은 부부 문제가 생겨서 갑자기 교회와 연락을 끊고 잠수해버렸다는 식의 얘기들은 너무나 흔합니다. 이에 관해서 사도 야고보는 교회 공동체가 서로 죄를 고백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 5:16)
사도께서 서로 고하라고 말씀하시는 죄가 단지 도덕적인 것만으로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른 이들에게 감추고 싶은 것, 수치스러운 것, 우리가 이 얘기를 했을 때 다른 이들이 우리를 받아줄까 두려운 것들을 서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맥에서는 특히 죄와 육체의 병을 연결시켜서 얘기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의미는 필자가 말하는 것들로 충분히 확장 가능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 또한 (혹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공허한 감정 또한) 수치심을 가리는 일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직업인으로서, 배우자로서, 독자 여러분들은 왜 열심히 일하시고 계십니까? 혹은 이미 은퇴를 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왜 열심히 일하셨습니까? 물론 자녀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 가정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배우자를 사랑해서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어떤 주어진 역할을 잘 해냄으로써 스스로에게 “난 이 정도는 되니까 그래도 나 스스로를 인정해 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을 가치가 있어”라고 주문하는 일 또한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일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는 근거가 우리가 하는 일에 있게 될 때, 우리가 더 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오면 우리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거가 사라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깊은 공허함을 느끼게 되고, 왜 사는지를 묻게 되며, 이대로 계속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의 연재에서도 얘기했듯이, 복음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 가치를 쓸모 없게 평가하는 그 순간에도, 그들이 그렇게 하든 말든, 우리가 그 존재만으로 귀하고 가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게 해줍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값을 치르고 사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능력있게 일을 잘하느냐도, 우리가 얼마나 좋은 부모인지도, 우리가 얼마나 좋은 배우자인지도 아닙니다. 그 모든 역할들은 당연히 중요합니다만, 그런 역할들을 잘 해내느냐에서 우리의 존재 가치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참으로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들을 잘 감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일할 수 없어도, 더 이상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기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정말로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게 하셨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이제 그런 궁금증에 대해서 답해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치, 우리의 영광
우선 죄의 관계성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모두 사영리(4 Spiritual Laws: 4가지 영적인 법칙)로 하는 복음 소개가 낯설지 않으실 겁니다. 사영리에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죄로 인해서 끊겼다고 표현합니다. 필자 또한 여기에 동의합니다. 죄는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는 힘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의 원천 되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끊어지면, 다른 관계들 또한 그 부작용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와 맺는 관계, 이웃들과 맺는 관계, 자연 세계와 맺는 관계 모두가 타락의 영향 아래 들어갑니다. 즉 모든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관계의 끊어짐은 우리의 삶에 두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번째는 자기 중심성이고, 두번째는 수치심입니다. 우선 관계가 끊어져 있다보니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이상, 나 말고 세상의 중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치심이 생깁니다. 왜일까요? 위에서 필자가 수치심의 세가지 특성에 대해서 설명할 때 브레네 브라운을 인용하면서 수치심을 ‘관계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우리는 다른 관계 또한 끊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먼저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인정과 평가가 없이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수치심은 이런 악순환의 열매를 먹고 살며, 우리가 다른 이들의 인정과 평가를 우리가 스스로를 가치 있게 바라보는 근거로 삼으면 삼을수록 우리의 삶에서 더욱 그 영향력을 넓혀만 갑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셨습니다. 그 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셨던 형벌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당신이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온전한 사랑의 하나됨의 관계를 가지고 계시는 아버지와 성령님과의 관계의 끊어짐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길 만한 아무 잘못을 하신 일이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올라가십니다. 십자가 형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이 되셨던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이 시선을 돌리시는 것을 경험하십니다.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을 결정지어주는 무언가가, 누군가가 갑자기 그 관계를 끊어버리게 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며, 거기서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수치심입니다. 이런 관계성의 부정, 정체성의 부정, 더 나아가 존재의 부정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일이었기 때문에 시편 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탄식이 그 분의 탄식이 되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끊겨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양자됨을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3]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5-16)
하나님의 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권을 얻게 되었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는 말 안에는, 예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 결과, 궁극의 수치를 당하심으로써 (그 수치는 원래 우리가 당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수치를 면해주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일한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후서 5:21이 말하듯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죄로 인해서 예수께서 아버지와 성령님과 맺으셨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고, 바로 그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서 양자됨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자연스럽게 수치심으로부터 회복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의 궁극적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 분과의 관계 회복은 우리가 가진 궁극적 수치심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은 우리 스스로 수치심을 가리려는 모든 노력에서 점점 더 자유하게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바로 그 수치심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수치가 되셨기에 우리는 그 분의 영광, 그 분의 자랑이 될 기회를 얻었습니다. 같은 고린도 후서 5:21은 이 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기 위해서, 그 분의 자랑, 그 분의 영광이 되기 위해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길은 바로 그 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말은 우리의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이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수치심이 사라진 자리에 어떻게 기쁨이 찾아오게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봄으로써 이번 연재를 마칠까 합니다.
수치심이 사라졌을 때 찾아오는 기쁨의 회복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수치심이 사라진 사람들의 삶에는 기쁨이 회복된다고 합니다. 즉 기쁨은 수치심이 사라지면 저절로 우리의 삶에 찾아드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브레네 브라운은 사회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 수치심과 기쁨 사이의 역동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최근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효리네 민박”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인공 이효리와 민박 도우미로 등장하는 아이유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둘은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면서 행복에 대해서 대화합니다. 그런데 아이유는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와 인기,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자기가 누려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찾아올 때 그걸 억누른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이효리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아이유는 자신이 그런 기쁨을 마음껏 누린다면, 그 이후에는 뭔가 그 기쁨보다 더 큰 불행이 자동적으로 찾아올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브레네 브라운에 의하면, 아이유가 (또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수치심에 기인합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우리가 기쁨을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우리에게 기쁨이 찾아올 때 자동적으로 앞으로 오게 될 불행이나 고통에 대해서 염려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쁨을 차단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에서 (그리고 그에 따른 불안감에서) 우리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기억하기에) 이런 문제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심리적 문제가 수치심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브라운의 보고가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브라운이 설명하는 기쁨과 수치심 사이의 이런 역동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흔히 ‘기쁨의 서신서’로 알려진 빌립보서에서 계속적으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기뻐하라’는 명령을 계속해서 적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감옥입니다. 바울은 옥중에 갇힌 상태에서,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면서도 담대하게 기뻐하라고 성도들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바울에게는 수치심이 거의 없었다는 겁니다. 바울은 복음을 정말로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미 확증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일이나 업적, 성과를 통해서 수치심을 덮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내 존재가 이미 나를 만드신 분에게 평가를 받았다면, 그리고 그 평가가 다른 이들의 나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심지어 나 자신의 나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간에, 아무도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라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내려졌음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사람의 삶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기쁨이 풍성한, 계속해서 기뻐하라고 하는 삶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비록 지금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미래의 일 때문에 불안하고 두려워할 수 밖에 없음에도, 주변의 판단이 어떻든지 나를 지으시고 창조하신 이가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셨다는 그 믿음이 나를 저절로 기쁨으로 인도하는, 그런 삶 아닐까요? 복음은 여러분과 저에게서 수치심을 앗아가는 대신, 기쁨이라는 선물을 가져다 줍니다. 단, 이제껏 설명했듯이 우리가 정말로 복음을 믿을 때, 그래서 더 이상 수치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될 때, 우리의 삶에는 기쁨이 넘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을 정말로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
[1] 수치심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학자들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서 수치심은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바깥에 나갈 때 옷을 입지 않고 나가는 대신,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 또한 좋은 의미에서의 수치심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해로운 수치심 또한 존재하는데, 필자의 이번 연재는 해로운 수치심에 대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2] 브린 브라운(Brené Brown), 마음 가면(Daring Greatly) (서울, 2016년: 더 퀘스트)
[3] 이것은 신학적 뉘앙스를 충분히 다루어야 하기에 이 공간에서 완벽하게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입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책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Philip D. Jamieson, The Face of Forgiveness: A Pastoral Theology of Shame and Redemption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