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어떻게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드는가 (3): 감정에 대하여
불안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두려움은 영혼을 마비시켜 기를 꺽어 놓고, 기쁨을 빼앗아가고, 생명력을 죽이며,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심고, 마음을 사로잡아 모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초조와 불안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폴 투르니에, 모험으로 사는 인생, 175-17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 일서 4:16-19)
지난 연재에서는 수치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우리 안에 있는 수치심이 복음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사라졌을 때 생기는 감정이 기쁨이라는 점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감정에 대해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까요? (지난 연재를 읽으신 분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답을 하실 수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아셔야 하는 점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다음의 두가지 요소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점입니다.
-
-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판단
-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얼마나 이루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생각해 보시면, 1)번 요소,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좋게 판단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긍정적 감정이 생기기도 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생기기도 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동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상황이 좋다는 판단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지게 마련이고, 반대로 상황이 나쁘다는 판단이 생기면 부정적인 감정이 싹트니까요. 그렇다면 2)번 요소는 어떻게 우리의 감정이 생기는데 영향을 끼칠까요. 그것은 바로 1)번 요소에 2)번이 결정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즉,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현재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얼마나 이루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어떤 분들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실현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실현을 위해서 지금 우리의 삶에서 일하고 섬기는 것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제가 여기서 말씀드린 두가지 요소가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종합해보면, 감정은 현재 우리의 상황에 대한 판단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또한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얼마나 이루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잣대로 삼는다는 겁니다. 만약 우리의 감정이 이런 두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면, 결국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게 아니냐는 말씀을 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상황은 우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 또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상황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결국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경주하게 합니다. 이 말은 역으로 보면, 우리가 지금 가장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바로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하실 점은, 교회와 종교적인 활동에 시간과 노력을 가장 많이 들인다고 해서 그게 꼭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가장 소중한 분이시라는 뜻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탕부 하나님에서 하신 말씀은 왜 그런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행여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는 말이라도 들으면 이렇게 반응한다. “나한테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교회 문이 열려 있을 때마다 항상 교회에 있는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찍이 이렇게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탕부 하나님, 80-81)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시간을 많이 들여서 교회 활동과 봉사에 참가하는 까닭이 굳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활동과 봉사에 많이 참가하는 까닭이 단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런 활동을 통해서 내가 인정 받고, 내 사회적 가치나 지위를 확증받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탕부 하나님의 배경이 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그토록 아버지를 위해서 헌신과 봉사, 순종을 마다하지 않고도 결국 아버지를 사랑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리고 사람이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는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가장 원하고 바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이 지금 인생에서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우리의 감정은 굉장히 솔직하게 말해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해도, 우리의 행동이 아무리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봉사에 헌신한다고 해도, 그런 말보다는, 그런 행동보다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외적 활동은 종종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속았듯이 우리를 속이지만, 감정은 우리가 정말로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을 잘 관찰하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몰랐던 진짜 우리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게 될런지도 모릅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우상 숭배적인 해결책을 붙잡을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
- 화가 나면 자문해보라: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없는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어떤 것이 없는 것인가? 지금은 없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가지지 못해서 화가 난 것일까?
- 불안하거나 몹시 걱정이 되면 자문해 보라: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없는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어떤 것이 없는 것인가? 지금은 없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일까?
- 풀이 죽거나 자신이 싫으면 물어보라: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없는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어떤 것이 없는 것인가? 지금은 없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놓치거나 잘못했기 때문에 울적한 것일까?
따라서 다음의 몇가지 질문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우상의 근본적인 정체가 무엇인지 진단해 볼 수 있다.
-
- 나에게 최악의 악몽은 무엇인가? 무엇이 가장 불안한가?
- 내가 실패하거나 놓치면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싫은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가?
- 일이 잘못되거나 어려워질 때 나 자신이 의지하거나 위안으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 내가 가장 쉽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편히 쉴 때 내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내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떤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가?
- 자신이 가장 쓸모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가?
- 나의 인생에서 정말로 원하고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답하고 나면,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지, 곧 우리의 ‘기능적인’ 주인들이 어떤 모습인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팀 켈러, 당신을 위한 로마서 286-287)
결국 신앙이란,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과 하나님께서 바라고 원하시는 것들이 같아지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며,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야 하는 사건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을 여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이란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가는 여정입니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 가장 인생에서 바라는 것들이 내가 잘되고 성공하고, 내 자녀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진짜 행복을 찾게 되고, 내 삶이 행복해져서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이 행복해지며, 또 더 나아가서 내가 주변 사람들과 이웃들을 진정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며 사랑하는 관계를 맺게 되는 것, 그것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감정을 관찰하고, 어떤 때에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지를 살펴보고, 계속해서 그 감정들을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릴 때 우리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정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연재의 남은 부분에서는 이제까지 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요한일서 4장을 인용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요일 4:18)
요한일서 기자는 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한 것일까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같은 요한일서 기자가 4장 8절에서 그렇게 얘기하지요. 결국 요한일서 기자는 하나님을 잘 알면 알게 될수록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했던 이야기를 잘 곱씹어 보면,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까닭은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얻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입니다. 소위 ‘믿는 구석’이 사라질 때가 바로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는 구석’을 가지고 계신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믿는 구석’이 되어 주십니다. 사람들이 붙잡는 ‘믿는 구석’은 변하는 것들이며, 흔들리는 것들입니다. 돈이 많으면, 돈이 ‘믿는 구석’이 되어주지만, 돈은 있다가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붙잡는 것들은 모두 피조물이며, 그것들은 우리에게 충분히 안전한 ‘믿는 구석’이 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변하고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일서 기자가 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한 것인지에 대해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가 하는 말은, 온전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 될수록, 우리가 인생에서 정말로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오직 하나님을 얻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얻거나 잃는 것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변하지 않는 ‘믿는 구석’이신 하나님을 정말로 붙잡는 자는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움츠려 들거나 불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외적인 안정이 없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믿는 구석’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서 함께 나눈 이야기들을 잘 곱씹어 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떤 감정을 느끼시는지는, 팀 켈러 목사님의 말씀처럼 여러분이 정말로 붙잡고 있는 ‘믿는 구석’이 무엇인지 드러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구석’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절망할 필요가 없는 까닭은,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올 때 항상 받아주시며 위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께서 오신 까닭은 오히려 우리가 ‘믿는 구석’이 온전히 하나님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우리의 삶이 점점 더 하나님만을 우리의 ‘믿는 구석’으로 삼을 수 있도록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그 하나님을 여러분의 ‘믿는 구석’으로 삼으시는 신앙의 여정을 여러분들이 걸어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음 연재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