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탄생, 그리고 수치심을 전복시키는 약함-브린 브라운의 마음 가면 (Daring Greatly)
부족함의 문화, 그리고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가 주로 전하는 메세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계속해서 의심합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는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해져야 합니다. 더 노력해야 하고, 더 일해야 하며,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성취를 이루어 냄을 통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될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갉아 먹는 우리의 존재 가치의 불안함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가치의 불안함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사라지게… 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브라운의 진단입니다. 오히려 부족함의 문화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덮으려는 시도로써의 강함에 대한 추구는 역설적으로 우리 안에 수치심이라는 악마를 탄생시킵니다. 이것이 브린 브라운이 자신의 책 마음 가면의 서두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화적 흐름 속에서 우리 안에 뿌리내리게 되는 수치심이란 무엇이며, 왜 수치심이 우리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그리고 수치심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브라운 스스로 던지면서 연구를 통해서 찾아낸 답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것이 브라운의 책 마음 가면의 주된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름의 답을 모두 가지고 계신가요? 이 서평을 읽으시는 여러분들은 대다수가 신앙인들이실 것이기에 아마 “예수가 답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으실 겁니다. 하지만 예수가 답이야 라고 말해 버리면 과연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예수가 답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인 적이 없으신가요? 사람들의 평가에 여전히 민감해 하고 불안해 하는 자신을 발견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으신가요? 아무리 예수가 답이라고 말해도 가시지 않는 내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감은 내가 믿음이 적어서인 걸까요? 그것이 제가 신학도로서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저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입니다.
브라운의 마음 가면을 (Daring Greatly) 읽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브라운이 책에서 나누는 통찰들은 모두 “연결”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얻게 된 통찰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서, 그리고 이후의 저작들을 쓰기 위해서 브라운은 1280명과 인터뷰를 진행했고, 400명의 대학원생들이 그의 연구를 도왔으며, 3500개의 2차 문헌 및 자료를 참고했고, 자그만치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연구를 진행해서 9개월의 기간 동안 연구 결과를 정리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원래 브라운은 자신의 관심사가 이미 언급했던 대로 사람들이 서로 “연결됨”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연결에 대해서 인터뷰를 진행하면 할수록 브라운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복병을 반복적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수치심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치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끊는 힘입니다. 왜냐하면 수치심은 우리 자신의 가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평가절하되는 것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정인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지켜내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관계를 단절하고, 우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거짓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숨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들이 신의를 지키지 못했기에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격하되었고 (수치), 그래서 숨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수치는 우리의 존재 가치가 격하될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낄 때 찾아오는 감정이며,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가 격하될 때 우리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바로 그 현장을 덮으려고 하거나, 그 관계에서 피해서 숨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치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숨게 만듭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진행된 아주 유명한 행복에 관한 연구가 있습니다. 장장 75년에 걸쳐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를 추적했는데, 놀랍게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들(돈, 권력, 명예 등)이 아니라, 바로 좋은 관계 맺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브라운에 의하면 좋은 관계 맺음을 막는 가장 강력한 힘이 바로 수치심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수치심은 우리로 하여금 관계에서 돌아서게 만들고, 우리 안으로 깊이 숨게 만들어서 관계를 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브라운이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게 될 때 주로 취하는 방어 기제들을 크게 세가지로 나누고 자세하게 설명한다는 겁니다. 그 세가지는 1. 기쁨이 오려고 할 때 기쁨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것, 2. 완벽주의, 그리고 3. 감정을 무뎌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브라운이 발견한 것은, 이 세가지 모두 우리가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취약함을 덮으려고 하는 시도와 관련이 깊다는 것입니다. 결국 수치심은 우리의 약함을 부정하는 것이고, 브라운이 내놓는 수치심에 대한 가장 좋은 해답은 우리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또 왜 우리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최근에 즐겨보는 “효리네 민박”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인공 이효리와 민박 도우미로 등장하는 아이유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둘은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면서 행복에 대해서 대화합니다. 그런데 아이유는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와 인기,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자기가 누려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찾아올 때 그걸 억누른다고 말하지요. 그리고 이효리가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아이유는 자신이 그런 기쁨을 마음껏 누린다면, 그 이후에는 뭔가 그 기쁨보다 더 큰 불행이 자동적으로 찾아올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브라운이 말하는 기쁨이 오려고 할 때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정확하게 아이유가 말하는 내면과 똑같아서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브라운에 의하면, 아이유가 (또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수치심에 기인합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우리가 기쁨을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우리에게 기쁨이 찾아올 때 자동적으로 앞으로 오게 될 불행이나 고통에 대해서 염려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쁨을 차단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에서 (그리고 그에 따른 불안감에서) 우리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기억하기에) 이런 문제를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심리적 문제가 수치심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브라운의 보고가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아울러, 브라운은 기쁨을 느끼기 위한 선결 조건이 우리가 우리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브라운은 자신의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어느날 밤,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브라운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기쁨은 아이들이 혹시나 내일 사고를 당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과 함께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즉, 기쁨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미래를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예측하거나 통제하려는 성향을 내려놓게 될 때 뿐이라는 것입니다. 불안감은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거나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사라지지요. 수치심은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찾아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피조물로써의 한계와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피조물로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기쁨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가 그런 경향을 더더욱 부추기기 때문에, 기쁨은 우리가 누리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브라운이 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통찰입니다. 브라운 자신도 이런 연구 결과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고요.
우리가 수치심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흔히 취하는 두번째 방어 기제는 완벽주의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깊이 공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불안함을 느낄 때, 우리는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그 수치심을 덮으려고 우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결국 우리의 완벽주의는 또 다른 수치심을 양산해내는 자양분이 되고 맙니다. 브라운은 심지어 완벽주의는 수치심을 낳는 환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수치심의 한 형태라고 말합니다. 서평자로서 저 또한 여기에 아주 동의하고요.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는 법,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은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냉소적으로 “그래, 삶이 그렇지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으로 우리의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 가치가 우리가 행하는 노력이나 성취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도로서 제가 비판적으로 보게 되는 부분은, 브라운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 가치가 우리가 완벽하게 되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면 우리가 왜 가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대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브라운은 사회 과학자이기에 “왜”의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의 질문에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왜”라는 질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브라운이 개인적으로는 “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본분이 “어떻게”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은 피해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왜”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비결이 좋은 관계 맺음에 있고, 그 관계 맺음을 방해하는 주된 요소가 수치심이며, 수치심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을 해도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사람이 “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해서 답을 주는 것은 유대-기독교 전통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깊이 따져볼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수치심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취하는 방어 기제는 감정에 무뎌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정적인 감정에 무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부정적인 경험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은 부정적인 감정을 수반하고, 그러한 경험과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과연 있는 그대로 소중한 존재가 맞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게 합니다. 욥이 성경에서 스스로에게 했었고, 친구들과 얘기했었고, 또 하나님께 맞서 싸웠던 그 모든 것들의 기저부에는 욥의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수치심은 우리가 이런 경험과 감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때 독버섯처럼 생겨납니다. 브라운은 우리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촉구합니다. 부정적인 경험과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그런 감정에 무뎌지는 방식을 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용기를 가지고 그런 경험들과 감정들과 대면하라고 말합니다. 그런 감정들을 프로세스하라고 말합니다. 그런 경험들과 감정들을 프로세스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나를 판단하지 않을 사람들과 그런 경험들과 감정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거기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나눔 자체가 이미 우리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그런 나눔 자체가 우리의 수치심을 치유하는 약이 됩니다.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온갖 감정을 한 구석으로 밀어낼 수 없습니다. 맨하탄의 리디머 교회의 담임 목사인 팀 켈러가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기도로 프로세스 해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의 삶이 좀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기쁨이 더 자주 찾아오고, 그렇게 해야 우리가 우리를 짓누르는 수치심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우리 안에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감정을 억압하거나 우리 잠재 의식의 한구석으로 밀어넣게 되는 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도로써 저는 브라운이 발견한 이런 우리의 취약성에 대한 인정이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교회가 (특히 한국 교회와 한인 이민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해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성육신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신학적 성찰이 약합니다. 저는 우리의 취약성에 대한 인정과 그에 대한 깊은 통찰이 예수의 성육신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약한 인간의 옷을 입고 인간과 똑같이 약한 상태에서 사시기로 결정하신 것이 바로 성육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성육신은 그러한 인간의 약함에 대한 긍정이기도 합니다. 그 자체로 괜찮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존재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존재 가치가 없었다면 굳이 신이 인간의 옷을 입고 올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교회의 성육신에 대한 관심 부족은 일상에 대한 관심 부족과 일맥상통합니다. 브라운은 우리가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다양한 맥락을 12가지로 나열하고 (외모와 체형-돈과 직업-부모됨-가정-자녀 양육-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중독-섹스-나이 듦-종교-트라우마-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되는 것), 이 12가지 모두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수치심을 다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설교나 성경 공부 시간에 중독이나 섹스, 혹은 외모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다루는 적은 별로 없지요. 교회는 일상 너머의 현실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다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일상에 대한 관심을 놓쳐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라운의 책은 또 한 편으로는 사람이 행복한 삶, 번영하는 삶을 산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를 교회의 흔한 복음 제시보다 더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할 때 수치심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제까지는 하지 않았던 경우가 더 많았지요 (왜 교회가 수치심에 무감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전의 서평에서 제가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기에 여기에서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복음이 수치심을 제거한다는 말은 결국 복음이 우리 인간의 행복과 번영으로 인도하는 길을 알려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행복과 번영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얘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교회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복음은 브라운이 집중하는 “어떻게”의 질문과 함께 “왜”의 질문에 대해서도 답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생기는 질문은, 사회 과학과 복음 사이의 관계입니다.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이 담고 있는 인간 번영과 행복에 대한 얘기들을 이제 사회 과학이 모두 해줄 수 있다면,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거기에 대한 첫번째 답은 이미 반복해서 얘기한대로 “왜”의 문제에 대한 답을 사회 과학이 줄 수 없다는 것이 될 겁니다.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서,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사회 과학은 할 말이 없지요. 추가적으로, 브라운의 책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교회는 브라운의 책이 백인 중산층 중심이며, 개인의 행복과 번영 중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브라운의 주요 독자들처럼)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단지 개인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브라운이 쓰는 책을 살 돈이 없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내면의 문제에 집중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수치의 피해자로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 약자들을 향해서 해 줄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브라운의 책이 아니라면, 사회 과학이 이런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을 위해서 해 줄 말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아니, 사실은 굉장히 많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교회가 사회 과학이 그려내는 인간 번영과 인간 행복의 비전에 종속되지 않는 것은, 교회의 목적, 복음의 선포 목적이 결코 인간 번영과 행복에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라는 명령을 받았던 선지자(예레미야)도 있었고, 평생의 업이었고, 모든 노력의 결실이었던 약속의 땅에 거의 다 와서 넌 들어가면 안돼라는 명령을 받았던 지도자/선지자(모세)도 있었으며, 돌에 맞아 죽은 사람(스데반)도 있었고, 엄청난 상처를 입고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은 지도자 (예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인간의 번영과 행복을 향한 메세지를 담고 있지만, 그 복음을 살아가는 각 개인의 삶이 항상 번영과 행복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바로 교회의 메세지가 사회 과학이 전하는 메세지와 달라지는 부분입니다. 복음은 인간 행복과 번영을 넘어서서, 궁극적으로 세상 전체의 구원을 향한 메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 복음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매일 매일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명령합니다. “십자가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사회 과학이 감당할 수 없는 메세지입니다. 인간 행복과 번영이 주된 목적이 되면 절대로 추종할 수 없는 말들입니다.
브린 브라운의 마음 가면은 (Daring Greatly) 서평자인 저에게 이런 중요한 화두들을 던져 주었습니다. 인간 행복과 번영에 대해서,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서, 수치심의 악영향과 인간 관계를 끊는 능력에 대해서, 그리고 신앙인들에게는, 교회가 전하는 복음 메세지가 사회 과학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이런 묵직하지만 중요한 질문들을 자신의 삶에서 묻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입니다. 같은 차원에서 브린 브라운의 모든 책들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 또한 계속해서 브라운의 책들을 읽어나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