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예수와의 만남(Encounters with Jesus)은 성경 읽기를 통해서, 특별히 복음서에 실린 예수와 만난 사람들이 겪었던 변화를 통해서 성경과 예수가 던지는 인생의 중요한 질문들에 접근하며, 그를 통해서 신앙을 변호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책입니다. 이미 알려드린대로, 이번 서평과 다음 서평에서는 팀 켈러의 신앙 변증에 대해서 살펴볼 계획입니다. 이번 주에는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제가 이해하는 팀 켈러의 신앙 변증이 가진 세가지 특징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고, 다음 주에는 살아 있는 신(Reason for God)을 통해서 켈러의 신앙 변증이 변증학의 궤적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다른 변증적 접근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와의 만남을 읽으면서 제가 관찰한 켈러 변증학의 세가지 큰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신자와 비신자를 차별하지 않는 변증적인 복음 선포; 2) 수사의 중요성; 3) 비기독교 학자나 문화에 담긴 신앙적 요소들의 풍성한 인용을 통한 효과적 소통. 이번 서평은 켈러 변증학의 이 세가지 요소를 자세히 설명.분석할 것입니다.
기신자와 비신자를 차별하지 않는 변증적인 복음 선포
다음 주에 변증학의 학문적 궤적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현대 기독교 변증학은 많은 부분 신학자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것도 기독교 철학이나 조직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이 변증학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고, 그렇다보니 변증이라는 분야 자체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전유물로서, 학문적인 옷을 입고 진행되는 경향이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변증이 이루어지는 맥락이 지나치게 논쟁 중심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학자들간의 논쟁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이슈들, 예를 들면 신정론이나, 과학과 신앙의 관계, 성경의 권위 같은 주제들이 다루어지는 것을 흔하게 봅니다만, 목회자들이 설교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 특별히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변증을 그러한 복음 선포라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오해나 편견을 벗겨내는 차원에서의 변증을 보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가 이해하는 팀 켈러 변증의 첫번째 특징은 바로 변증이 맡은 역할인 복음 선포를 돕는 도구로서의 제 위치를 다시 회복할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면에서 그러합니다. 첫번째로, 켈러는 모든 목회자들이, 특별히 도시 지역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은 더더군다나 변증적이 되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두번째로, 켈러는 목회자들의 변증은 복음 선포와 따로 떨어져서는 안되며, 계속적으로 복음 선포를 위한 큰 그림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번째로, 켈러는 복음을 위한 신앙 변증은 특별히 초신자나 비신자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되며, 기신자와 초신자, 비신자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세가지 측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켈러가 복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전제를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신자나 초신자 모두 매주 계속적으로 복음을 들어야 하며, 그런 면에서 기신자를 위한 예배와 초신자나 비신자를 위한 추구자 예배 혹은 열린 예배를 따로 나누어서 드릴 필요가 전혀 없다는 켈러의 신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켈러에 의하면 삶의 많은 부분에서 기신자들은 복음을 믿지 않으며, 초신자나 비신자도 그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켈러에게 있어서 복음은 일반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무비판적으로 가정하듯이 초신자나 비신자가 신앙에 입문할 때 한 번만 들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켈러는 목회자인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포함해서 아무도 복음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켈러가 말하는 복음을 믿는 것이란, 이미 제가 이전 서평에서 얘기했던대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마음이란 우리의 근본적 동기 구조, 즉 우리가 근본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사랑하고 따르는 것들이 우리 삶을 형성해 나가는 구조인데, 그 구조는 많은 경우 굉장히 견고하고 단단하며, 그 구조를 바꾸는 일은 대부분의 경우에 반복적인 복음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구체적이고 친밀하게 경험할 수 있는 아주 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켈러는 설교를 할 때 자신은 오늘 아침에도 복음을 믿지 않는 행위를 했다고 (즉 복음을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믿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행위를 하고 말았다고 꽤나 자주 고백합니다. 자신도 복음을 믿지 않는 삶을 살 때가 많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먼저 복음이 어떤 소식인지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보기 시작하면 기신자를 위한 예배와 초신자나 비신자를 위한 열린 예배 혹은 추구자 예배를 따로 나눌 필요가 전혀 없어집니다. 기신자나 초신자, 혹은 비신자 모두 같은 복음이 다른 질문들이나 상황 속에서 선포되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들어야 하며, 여기에는 이미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가정이 끼어들 자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왜 변증과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런 얘기를 처음부터 꽤나 길게 하고 있느냐, 그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와 변증에 대한 이해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기신자나 초신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매주 반복적으로 들어야 할 기쁜 소식이라고 가정하면 변증이 그러한 복음 선포라는 목적에 가지게 되는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집니다. 요는, 매주 주일 예배에 기신자와 비신자, 초신자들이 모두 함께 참여한다고 가정하면, 그리고 매주 주일 예배마다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궁극적으로 복음 선포라고 가정하면, 기신자들의 경우 그들이 가진 신앙을 더욱 공고하게 해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세속 문화의 높은 파고 속에서 신앙을 변호하는 모델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또 초신자들과 비신자들의 경우 신앙이 가진 합리성을 변호하면서 신앙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세속 문화가 가진 논리적 허점에 대한 답변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차원에서 설교자에게는 변증적이 되어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켈러는 목회자들이 매주 설교에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 일을 변증적으로 해내는데 성공한다면, 기신자들의 신앙 변호를 돕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비신자 친구들, 즉 기신자들이 생각하기에 신앙 변호를 들었으면 하는, 믿지 않는 친구들이나 신앙에 별 관심이 없는 친구들을 데려오는 횟수가 늘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될 때 목회자는 기신자와 초신자에 대한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변증적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피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앞의 세가지 측면, 즉 목회자들은 변증적이 되어야 하며, 특별히 복음을 선포한다는 큰 그림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신앙 변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세가지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에는 신앙 변증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의 각 사람을 향한 사랑을 알고 깨닫게 하는 것이지 논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또한 사람은 논쟁으로는 변하지도, 신앙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은 기신자냐 초신자냐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떠나 있는, 아무리 신앙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리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신앙을 소통하고 변호한다는 차원에서의 켈러의 변증은 수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또 비기독교 학자들이나 문화들에 담긴 신앙과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두번째로 설명할 켈러의 신앙 변증이 가지는 특징은 켈러가 수사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보수적이며 성경적이라는 신앙인들은 신앙 변증과 소통에서 수사가 차지하는 역할을 가볍게 여길 뿐 아니라, 어떤 경우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어긋나는 비신앙적인 것,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신앙을 인간의 기술이나 인간적 지혜로 기만하려는 것으로 치부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인들 또한 사도 바울이 수사에 능했으며, 당대의 수사적 기술을 성경을 기록하는데 차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교 시절 저는 고린도 후서 12장 1-10절을 주해하면서 바울이 그 부분에서 보여주는 논증 방식이 그 당시 환상이나 신비 체험의 유무를 신앙이 좋으냐 나쁘냐의 기준으로 삼았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수사적 논리를 통해서 자신의 어리석음과 능력 없음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일깨우고자 했었다는 것을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켈러 또한 여기에 동의합니다. 신앙 변증과 변호에 있어서 수사가 가지는 중요성은 작지 않습니다. 특별히 켈러는 고린도 전서 2장 1-5절을 통해서 수사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는 부분을 보면 처음에는 어떤 식의 수사적 기술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신약 성경의 나머지 부분 전체는 바울이 논리나 논증, 수사, 혹은 자신의 학문을 복음을 선포할 때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가 보는대로,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각기 다른 청중을 향해서 각기 다른 논증을 펼치고 있습니다…. (켈러, 설교. 16)
켈러는 이미 우리가 살펴본대로 문화적 민감성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그러한 민감함을 가지고 소통하려는 변증적 목회자입니다. 특별히 이 책 예수와의 만남(Encounters with Jesus)에서 켈러는 복음서 기록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을 탁월한 수사적 기술을 가지고 예리하게 묻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 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던 질문을 절묘하게 현대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변방적 이미지와 연결시킵니다. 물론 어떤 곳에서는 기독교가 아직 변방의 위치로 후퇴하지 않은 곳도 있지만, 적어도 켈러가 사역하는 뉴욕에서, 그리고 세계를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중심 문화인 세속 문화에서 기독교는 변방으로 밀려난지 오래이며, 최신 문화라는 흐름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다나엘이 묻는 질문을 똑같이 기독교를 향해서 물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즉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켈러는 이 질문을 역으로 돌려서 현대인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과연 변방으로 밀려난 기독교에서는 현대인들이 배울 만한 아무런 통찰이 없는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물으면서, 현대인들이 의존하고 있는 바로 그 세속의 논리 안에 기독교에 기원을 둔 생각들이 의외로 많음을 밝혀냄으로서 (예: 약자와 소수자를 사랑하고 아끼라는 생각이 어떻게 기독교에 연원을 두었는가) 그들의 고정 관념을 깨버립니다. 이러한 수사적 예리함과 민감함은 현대인들의 정서를 정확히 파고들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질문을 똑같이 묻고, 그러한 질문을 넘어서는 더 깊은 차원의 질문을 던질 뿐만 아니라, 그 질문들에 대한 세속 문화의 답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답이 복음의 메시지 안에 담겨 있음을 설득함으로써 신앙 변증 작업을 복음 선포라는 맥락 속에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켈러가 이런 변증작업을 통해서 1차적으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청중들의 신뢰입니다. 신뢰를 얻지 못하면 설득을 하는 것이, 더 나아가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켈러의 변증에는 비기독교권 학자나 문화에 담겨 있는 신앙과의 연결고리의 풍성한 인용을 통한 효과적 소통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켈러의 변증이 가진 세번째 특징입니다.
비기독교 학자나 문화에 담긴 신앙과의 연결고리의 풍성한 인용을 통한 효과적 소통
이 마지막 부분은 사실 제가 켈러의 설교에서 했던 얘기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켈러의 신앙 변증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의 설교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의 설교가 복음 선포를 목적으로 하는 신앙 변증적 설교이기 때문에 켈러가 이러한 비기독교권의 학자나 문화 속에 있는 신앙과의 연결고리를 인용하는 장도 그의 설교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두 가지 예시만 들도록 하겠습니다. 각각의 예시에는 두 명의 문화.체육계 인사의 인터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예시를 들면서 켈러가 어떤 맥락에서 그러한 인용을 통해서 신앙 변증이라는 작업을 하는지를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로 내적 공허라는 주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켈러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적 공허를 자신을 이끄는 동력으로, 그리고 그러한 내적 공허에 따른 불안과 걱정을 희망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기가 너무 쉽다고 단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면서 현대 문화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어떻게 그러한 면이 드러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보리스 베커(Boris Becker)는 인터뷰를 통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두 번 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은 최연소 선수로서 였습니다. 나는 부자가 되었죠… 나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물질적 소유를 다 이루었습니다… 자살을 감행하는 스타 영화 배우나 가수들 얘기는 흔히 듣는 얘기들이죠. 그들은 모든 것을 가졌지만, 여전히 전혀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나 또한 내적 평화를 전혀 누리고 있지 못합니다.” 이와 아울러, 켈러는 영화 배우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의 인터뷰도 언급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했고 누렸습니다—상도 많이 받았고, 결혼도 했죠. 하지만 내 삶에는 채워지지 않는 내적 공허가 존재합니다.” 켈러가 이런 유명인들의 인터뷰를 언급하면서 사람들에게서 이끌어내고자 하는 공감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으로는 그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유명인들처럼 모든 것을 누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켈러는 또한 그들 마음 속에 있는 “그런 것들을 누려보기라도 한 번 하게 된다면 좋겠다”라는 마음도 간파합니다. 그와 동시에, 켈러는 그런 유명인들 또한 그런 것들을 누리기 전에는 동일한 마음이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그와 같은 위치에 올라간다면 결국 우리도 우리의 내적 공허를 채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밖에 없을 거라고 단언합니다. 결론적으로, 켈러는 이런 예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통해서 그러한 마음의 내적 공허를 채우려고 할 때, 그런 것들의 노예가 될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이 절대로 그러한 내적 공허를 채울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런 비기독교 문화권의 인터뷰를 예로 들면서 신앙 변증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러한 내적 공허를 채워줄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공간을 현대인들의 삶 속에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자기 증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어떻게 자기 증명이라는 주제가 대중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지, 그리고 이미 관대한 정의(Generous Justice) 서평에서 얘기했듯이, 그러한 자기 증명에의 욕구가 결국 자신의 힘으로 이루는 구원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구원이 어떻게 그런 식의 자기 증명 욕구에서 자유롭게 해주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번에 켈러가 인용하는 예 두가지는 영화입니다. 영화 록키의 대사를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을 뿐이야-나는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말야… 경기에 져도 상관없어… 내 머리를 그 놈이 부숴버린다고 해도 괜찮아… 내가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은 끝까지 가보는거야-그게 다라구. 아무도 크리드(Creed) 녀석하고 맞서서 15라운드까지 간 적이 없다구. 내가 15라운드까지 가게 된다면, 15라운드를 끝마치는 벨이 울렸을 때, 내가 여전히 서 있기만 한다면, 나는 내가 이 동네 출신의 또 다른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게 될 거니까.
켈러가 이 대사를 인용하면서 부연하는 다음의 설명에는 구원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일을 잘 하기 위해서, 그리고 성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그 모든 꿈들은 결국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에게 여러분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말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켈러가 인용하는 영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다시 개봉하기도 했던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해롤드 아브람스는 자신을 최고의 100미터 선수가 되게 하는 동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눈을 들어서 저 멀리 복도를 바라보지.. 단 10초 안에 나는 내 존재 전체를 증명해 내야 하니까…” 켈러는 설명을 덧붙이기를, 우리 안에 이런 욕구가 존재한다고 하면서, 그 욕구의 이면에는 단지 무언가를 잘 해내고 싶은 욕구, 단지 그 일을 잘 해냄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욕구를 넘어서는 욕구와 두려움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사실은 “혹시 우리가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라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우리가 쓸모있는 인간이고, 우리가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토록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서평에서도 계속해서 말했듯이, 이것은 바로 자기 구원에의 시도입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자기 스스로 정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에게 주어진 정체성과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러한 받아들임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이러한 자기 증명에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켈러는 정확히 이런 차원에서 영화 록키와 불의 전차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켈러의 신앙 변증이 가진 세가지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좀 더 본격적인 신앙 변증서인 살아있는 신(Reason for God)을 통해서 켈러의 신앙 변증이 현대 변증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의 변증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