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Ethic for Christians and Other Aliens in a Strange Land

죽음 앞에서 사람답게 살라는 부르심(The Calling to Live Humanly in the Face of Death)—윌리암 스트링펠로우의 An Ethic for Christians and Other Aliens in a Strange Land

혹시 사탄과 악한 영, 그리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엡 2:2)에 대해서 말하는 기독교 윤리 관련 책을 읽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계몽주의 이후, 과학과 이성, 합리성의 시대 정신이 문화를 지배하게 되면서 악한 영이나 악마가 윤리적인 질문이나 이슈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고, 그 점은 교회 바깥이나 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누군가가 교회 안에서 귀신이나 악마 얘기를 하려고 하면 이단 취급을 받거나 심각한 광신자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악한 세력이 실존하며,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다루는 분야인 기독교 윤리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악한 세력이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력을 살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합니다. 오늘 서평할 윌리암 스트링펠로우의 An Ethic for Christians and Other Aliens in a Strange Land는 성경이 말하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책입니다. 스트링펠로우는 특히 이 책에서 악한 영과 사탄의 세력이 원하는 것은 ‘죽음’(단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피조계의 구성원들이 가진 생명을 억압하고 빼앗아가고 멸절에 이르게 하는 모든 활동)이라고 설파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삶이란, 어떤 특별히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그저 이런 1) 죽음의 현실 앞에서 2) 우리가 인간으로서 양심을 따라서 살라는 3) 부르심을 따르는 뿐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어떤 거창한 종교적 헌신의 삶이 아니라, (굳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양심의 회복이 일어나는 삶, 진정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데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서평에서는, 이 세가지, 즉 1) 죽음 앞에서, 2)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사는 3) 부르심에 대해서 각각 다룸으로써 책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 앞에서

스트링펠로우는 죽음과 악한 세력,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킵니다.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악한 세력,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하는 역할은 피조계의 모든 것들을 죽음으로 빨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근거를 제시할까요? 스트링펠로우는 여러 성경 구절을 제시하지만, 대표적으로 누가복음 8:12을 보겠습니다.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귀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그 분께서 부르신 삶을 살아가는데 어떤 방해를 하느냐입니다.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며, 그들의 양심을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1-2)) 하지만 사탄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은 누가복음 말씀이 말하듯이, 디모데 전서 말씀이 가리키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양심이 회복되는 것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양심이 화인 맞아서 스스로 원하는대로, 다른 이들을 짓밟고 심지어 망하게 하거나 죽이기까지 하더라도 오직 스스로가 꿈꾸는 자기 유익에 목숨을 걸게 만듭니다.

하지만 현대적 학문으로서의 윤리학은 디모데 전서나 누가복음이 말하는 마귀나 미혹하는 영, 귀신의 영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윤리적인 삶, 올바른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은 단지 각 개인이 얼마나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지, 즉 그런 삶을 추구하려는 의지와 노력, 행동력과 지혜에 달린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스트링펠로우는 이런 견해가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피조계에 오직 인간만 존재한다고 보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역설합니다.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성경이 모든 피조계의 타락을 말할 때, 타락한 것은 단지 인간만이 아닙니다. 천사와 영적인 세력들도 타락했으며, 그들은 살아서 자기들 나름대로 의지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또한 타락한 영적인 세력은 계속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을 믿도록, 즉 하나님의 다스리심(dominion) 속에서 사는 대신, 자신들의 지배(domination)를 받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여기서 다스리심(dominion)과 지배(domination)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창세기는 인간에게 전체 피조계를 다스리고 그 안에서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어떤 피조물도 억압하거나 짓밟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스림과는 달리, 지배함은 지배자 자신의 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들을 짓밟고 무너뜨립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죽음으로 이끕니다. 나는, 혹은 특정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주로 사회적 강자들)은 나의, 그리고 자신들의 명예와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깎아내려야 합니다. 굳이 나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이미 어떤 기준 (학벌, 권력, 돈, 명예 등등)을 세우고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을 우대하고, 그런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입니다. 그런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수치심과 자기 존재의 무가치함을 경험합니다. 사람이 계속적으로 스스로의 존재가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면 자살을 꿈꾸게 됩니다. 사회적인 죽음은 곧 육체적인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런 죽음의 문화에서, 죽음의 실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강자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약자를 밟고 일어서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주의해야 점은, 이것이 굳이 누군가가 강자 그룹에 속했지만 상당히 좋은 인품과 인성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돕는 삶을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 시스템과 문화의 문제이고, 안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누군가가 사회적 실재 속에서 스스로를 강자로 인정하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인정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다른 이들을 짓밟는 문화적/영적 실재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개인이 좋은 사람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스트링펠로우는 우리는 모두 폭력(=피조계의 생명을 무너뜨리는 일)책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사탄과 악한 영의 세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자신들의 지배 하에서 생명이 아닌 죽음을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스트링펠로우는 단언합니다. 그것은 양심이 회복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사람답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양심이 회복되는 삶입니다. 스트링펠로우는 양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양심을 행사하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 양쪽 모두에게 말입니다 (62).

우리는 나 자신의 유익과 이해 관계 앞에서 얼마나 다른 이들의 생명을 고려할까요? 기업주는 자신들의 유익과 이해 관계 앞에서 과연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고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정치 권력을 쥔 자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몇 명의 생명이 미묘한 방식으로 희생되어야 할 때 과연 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선거 승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요? 스트링펠로우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바로 이런 양심의 회복으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이렇게 단순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한 번도 양심을 속이지 않고 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요. 때로는 가족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이웃이 희생되는 것을 눈감고 살아야 하는 경우를 당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로 이런 때 우리로 하여금 양심에 눈감지 않도록, 힘들지만 양심이 말하는 바를 따르도록 도우신다는게 스트링펠로우의 주장이며, 그게 바로 스트링펠로우가 말하는 인간다운 삶,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르심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부르심을 따라

우리의 부르심은 무엇보다도 사람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삶이란, 양심이 회복되는 삶이며, 회복된 양심은 항상 나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 앞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양심을 따라서 책임 있게 살아가려면 악한 세력의 영향력, 즉 우리가 양심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계속해서 스스로 속게 만드는 세력의 영향력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그들이 우리를 지배(domination)하려고 한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트링펠로우가 인간과 피조계 타락의 모든 원인을 오직 이런 악한 영적 세력에게 전적으로 돌리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8장은 악한 세력이 타락한 만큼이나 인간 스스로도 타락했으며, 따라서 인간이 양심을 따라서 살지 못하게 되는 원인은 단지 악한 세력의 꾀임이나 미혹만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든 피조계를 다스리도록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피조계에서 인간은 피조계를 다스리는 대신, 악한 영들을 비롯한 피조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 이데올로기(진보냐 보수냐)에 끌려가고, 권력욕에 끌려가며, 자기의 커리어를 실현하는데 끌려 갑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며, 동시에 그들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죽음의 현실 앞에서 인간이 생명을 추구하도록 이끄십니다. 하지만 죽음의 실재는 너무나 가공할 정도로 강고하고 단단해서, 어떤 인간적인 노력도 그 앞에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스트링펠로우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죽음의 실재에 맞서는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혁명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일단 혁명이 성공한다고 해도 혁명이 만들어낸 세상 또한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피조계 안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 또한 온전히 양심에 따라서 다른 이들과 자신들의 생명을 온전히 지키기만 하면서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트링펠로우는 혁명 대신 저항을 말합니다. 가공할 만한 죽음의 세력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은 그저 계속적으로 죽음 대신 생명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인간이 (설사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타락한 피조계의 일부로서 그런 타락에 일조하고 있음을 철저하게 인정하면서도,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신 생명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스트링펠로우는 우리의 부르심은 어쩌면 “서로 사랑하는 것”(129)이라고 말하며,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죽음의 현실 앞에서 혁명을 택하시는 대신, 계속적으로 생명을 택하셨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죽음의 세력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셨던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삶은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 대신 생명을 택하셨습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낙오자들을 찾아가셨으며,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과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악한 세력의 미혹에 넘어갔던 그리스도 당시의 종교 세력과 정치 세력들은, 체제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지켜내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죽이는 길을 택했습니다. 스트링펠로우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서 지속적으로 죽음 대신 생명을 택한다면, 우리에게는 죽음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런 죽음의 실재를 이기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트링펠로우는 이 책에서, 그리고 여러 다른 책에서도 계속해서 소망을 말합니다. 비록 현실은 어둡지만, 우리를 불러주신 분은 신실하시며 (고전 1:9), 그 분은 계속해서 우리가 그 분께서 우리를 불러 주신 그 부르심을 따를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우리는 오늘도 사람답게 사는 삶, 양심에 따르는 삶,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윌리암 스트링펠로우가 자신의 책 An Ethic for Christians and Other Aliens in a Strange Land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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