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문화야, 멍청아! – J.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 (Hillbilly Elegy)
힐빌리(hillbilly)라는 말은 미국 중남부 지역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서 살아가는 백인 노동자 계층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사실 백인에게 힐빌리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인에게 김치와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고, 일본인들에게 쪽바리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모욕적인 말이라고 하네요. 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고 하니 절대로 백인들 앞에서는 그 말을 꺼내면 안된답니다.
그런데 J.D. 밴스의 책 힐빌리의 노래는 스스로를 힐빌리로 자처하는 밴스가 자신이 최근에 낸 자조적 회고록에 붙인 이름입니다. 약간은 자기비하적이지요. 책을 읽어보면 왜 제목을 그렇게 붙였는지 이해가 됩니다. 사실 원제는 힐빌리의 노래가 아니라 힐빌리의 애가입니다. 즉 미국의 백인 노동자 계층이 부르는 슬픈 노래가 이 책의 제목입니요. 왜 그럴까요. 그리고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져 주려고 하는 걸까요.
일단 당신이 어떤 전형적인 힐빌리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의 삶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무직에, 마약쟁이이고, 이혼했으며, 3학년부터 9학년까지 (미국 학제 기준), 7년 동안 당신을 데리고 7명의 남자 친구와 동거를 시작했다가 깨지기를 반복합니다. 평균 1년에 한 번 꼴이죠. 당신은 “이번에는 이 사람을 내 아버지처럼 여길 수 있을까”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합니다. 그 사이에 어머니가 남자 친구들과 싸우느라 밤마다 소리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보냈던 시간 속에서 망가진 당신의 정서적 친밀감은 누가 보상해 줄까요. 이제는 누구를 아버지로 삼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150). 게다가 당신은 이미 그런 일을 겪기 전에 당신의 친 아버지가 고작 양육비를 아낄려고 당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이 부분은 친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서 오해였음이 드러나긴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경험을 ACE(Adverse Childhood Experience) 라고 부릅니다(226). ACE라는 말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의 학문적 표현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 안정감을 키워야 하며, 평생 밑거름이 되어 줄 정서적 자원을 채워가야 할 어린 시절에 바로 그 부모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은 것이죠.
그 뿐이 아닙니다. 당신이 사는 동네에서 당신과 어울리는 친구들, 그들의 부모들 또한 당신의 집과 사정이 비슷합니다. 아무도 대학에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의 부모 중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없습니다. 동네에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도 일주일에 20시간도 일하지 않고, 허구헌날 아내를 패고 술에 취해 아이들을 학대하는 놈팽이들이 가득합니다. 거기에 이전에 당신이 살던 동네를 거의 먹여살리다시피 했던 철강 회사는 인건비 탓을 하면서 당신 동네에서 철수했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당신의 동네를 떠났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떠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남아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청소년기의 많은 부분을 당신이 보고 자란 것이 이런 것들 뿐이라면 당신의 내면은 어떨까요. 당신의 마음 상태는 어떨까요. 패배감이 가득하겠죠. 하지만 심각한 것은 당신이 느끼는 패배감이 당신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는 동네의 지배적인 문화가 되어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잠식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게 무서운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게 잘못된 것인지 조차도 모르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런 문화적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는 어떤 동기도 얻을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밴스는 자신이 자라난 동네의 지배적 정서, 힐빌리들이 가진 지배적 정서를 “무슨 선택을 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느낌”(feelings our choices don’t matter)이며, 심리학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말한다면, 학습된 절망(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말합니다 (163, 177). 쉽게 말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지금의 절망적인 상태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느낌, 그 느낌이 문화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굳이 노력을 할 이유도 없죠.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그냥 그렇게 살다 가는 겁니다. 이 책이 소설이 아니라는게 중요합니다. 밴스는 자신이 겪었던 엄연한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극적이라서 더더군다나 슬픈 현실 말이죠.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한가지 이유는 아마 소득 불평등일 겁니다. 버클리 대(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의 저명한 정책 학자 로버트 라이히(Robert Reich)는 2013년에 나온 다큐멘터리 영화 Inequality for All에서 소득 불평등에 대해서 말합니다. 라이히에 의하면, 1978년 기준으로 평범한 백인 노동자가 벌었던 연봉은 48,000불이었고, 상위 1%는 그에 반해 393,000불이었는데, 2010년 현재 백인 노동자들은 그보다 더 적은 33,000불을 벌고 있고, 상위 1%는 백만불을 넘게 벌어 들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1978년과 2010년에 백인 노동자 계층이 느끼는 박탈감은 단순히 숫자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겁니다. 백인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왜 부모님 세대가 누렸던 경제적 안정을 자신들은 누릴 수 없는 건지, 자신들과 부모님 세대 사이에 학력만을 놓고 본다면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왜 자신들의 경제적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인지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우리가 작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보았던 (트럼프가 뽑히는!) 말이 안되는 현상들은 바로 이런 백인 노동자 계층의 박탈감에 많은 부분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백인 노동자 계층의 박탈감을 이해하는 것은 이 책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배경이 됩니다. 이 책은 그냥 보면 J.D. 밴스라는 올해 서른 네살의 청년 변호사가 어떻게 그런 절망의 문화를 뚫고 예일대 법대에 합격하고, 이제는 촉망 받는 작가이자 국회 의원 후보로까지 거론되게 되기까지 했는지를 밴스 나름대로 회고록의 형식을 빌려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 책인 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흔하디 흔한 내러티브죠. 하지만 만약 이 책이 그런 류의 책일 뿐이었다면 저는 절대로 이 책을 서평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니, 그랬다면 이 책이 2016년 6월말에 나왔음에도 여전히 2017년 9월 현재까지도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 4위에 올라 있고, 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평을 남기며, 유튜브에는 이 책과 관련한 동영상이 5000개 가깝게 올라와 있고, 구글에도 42만여개의 관련 자료가 올라와 있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책은 그 이상에 대해서 말합니다. 밴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성공했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자신이 그런 절망스러운 문화 속에서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지금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문화”의 맛을 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문제는 문화라는 겁니다. (이 서평의 제목을 “문제는 문화야 멍청아!”라고, 클린턴 전 대통령의 유명한 어록을 패러디해서 붙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밴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던 문화의 원천은 밴스가 할모(Mamaw)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친 할머니, 그리고 자신의 해병대 입대였습니다. 밴스에게 할모는 구원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할모는 절망과 무력감이 창궐하는 사악한 힐빌리의 문화 속에서 밴스에게 여전히 공부를 하는 것만이 희망임을 가르쳐준 사람이었습니다. 할모는 힐빌리들을 패배자라며 조롱하는 사회도, 또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힐빌리들도 모두 싫어했습니다. 어머니가 갈아 치우는 남자 친구들 때문에7년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낸 이후, 할모는 밴스에게 자신과 함께 살자고 제안했고, 밴스는 어머니를 떠나서 이후 12학년 말까지 할모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됩니다. 밴스는 자신이 대학에 가기 전까지 이후 3년의 기간을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할모의 집에서는 아무도 싸우지 않았고 (그래서 마음에 안정을 얻을 수 있었고), 대신 할모가 자신에게 매일매일 공부하라고 말해 주었으며, 숙제를 체크해 주었고, 공부에 조금이라도 게을러지는 듯 할 때마다 무섭게 화를 냈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밴스에게 할모는 구원이었습니다. (실제로 밴스는 할모가 자신을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시절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유난히 행복했다고 강조합니다.) (151)
할모의 도움으로 교육을 통해 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가능성에 눈 뜬 밴스는, 이후 두번째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해병대 입대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할모와 함께 지낸 덕분에 밴스는 이전에 바닥 끝까지 추락했던 성적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하이오 주립대(Ohio State University)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고, 해병대에 입대하면 학비를 스스로 마련할 수 있다는 사촌의 조언을 듣고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기로 합니다. 해병대의 문화는 밴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엄청난 양의 육체적 훈련,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일어나고 취침하는 스케쥴, 음식 관리를 비롯해서 엄격한 자기 관리를 강조하는 분위기 등은 자신이 성장했던 힐빌리 문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162). 한마디로, 해병대가 밴스에게 맛보게 해주었던 문화는 노력하면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문화였습니다. 힐빌리 문화가 밴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 노력해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면, 그 반대의 문화를 배우게 된 것이죠. 이후 오하이오 주립대에 입학한 이후, 밴스는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밴스는 하루에 3-4시간 씩 밖에 자지 않고 계속 공부에만 집중하는, 한국인들에게는 꽤나 흔한 노력형 인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포도상구균 염증(staph infection:중이염, 폐렴, 식중독 등을 일으키는 염증)에 전염성 단핵증(mono:바이러스에 의해서 감염되며, 목이 따갑고 열이 나고 임파선이 붓고 고름이 생기는 병)까지 걸리게 되어 병원 입원 신세를 지기도 하게 되지만, 밴스가 한 번 경험한 자신감이라는 자유는 육체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게 해주었고, 피나는 노력 끝에 마침내 예일대 법대에 합격하게 됩니다.
이런 밴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성공의 원인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만, 밴스는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 단어 하나, 즉 “문화”를 언급합니다. 책 전체를 통해서 문화는 그가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물론 할모나 할보, 가족에 대한 명칭을 제외하고 말이죠.) 밴스가 이 책에서 던지는 질문은 왜 힐빌리 문화가 절망의 문화가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런 문화 속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은 오직 대안적인 문화를 (운좋게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밴스가 보기에 공화당이나 민주당 할 것 없이 미국의 정치가들은 모두 문화의 문제를 무시했습니다. 공화당은 한 개인이 책임있는 사회인으로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는데에는 단지 그 개인의 노력만이 전부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고, 민주당은 정부가 지원만 해주면, 정책만 바꾸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문제를 호도했다는 것이 밴스의 진단입니다. (127, 194) 밴스는 이 책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교육의 문제, 빈곤의 문제, 그리고 백인 노동자 계층을 바라보는 방식 모두에 한 방씩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화의 문제는 생각보다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예일대의 신학자 캐트린 태너(Kathryn Tanner)는 자신의 책 문화 이론(Theories of Culture)에서 “문화”라는 말은 “자연”이라는 말 다음으로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1). 문화는 개인이나 공동체 어느 한 쪽만을 고려해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문화는 개인과 공동체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 관계를 맺는 방식, 그 이면에 깔린 전제, 그 외에도 특정 집단에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모든 방식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한마디로 개인이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방식이며, 공동체가 개인을 구성원으로 맞아들이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혹은 공동체의 문제로 환원하기보다는, 좀 더 총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제대로 이해가 가능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밴스는 이런 문화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특정 문화가 어떻게 사람과 관계와 가정과 사회를 모두 망가뜨리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대안적인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백인 노동자 계층이, 도시 빈민 지역의 흑인들이, 그리고 그 외에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거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에 불편한 오버랩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은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나라를 오직 교육만이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일념이 문화가 되어 일어선 나라입니다. 그래서 밴스가 오하이오 주립대 시절 3-4시간을 자면서 공부했던 그런 노력이 대다수 국민의 삶에서 일상화가 되어야 했었고, 또 실제로도 그런 사람들이 문화적 분위기를 주도했던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십년 간 그런 노력이 먹혔던 것은 한국 사회를 이끌고 왔던 그런 노력의 기저부에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또 실제로도 희망이 있었고요. 하지만 현재 한국의 젊은이들이 절망하게 되는 것은 사실 안타깝게도 밴스가 말하는 백인 노동자 계층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노력이 아니라 노력 할아버지를 한다고 해도 현실이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인식이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팽배해가고 있습니다. 학계와 언론 또한 그러한 인식을 어느 정도 지지하는 진단을 하고 있지요. 만약 그 진단이 맞다고 한다면, 밴스는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화를 다른 요소들(특별히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소득의 균형)과 뚝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할 것입니다만, 한국 사회에 점점 더 퍼지는 힐빌리의 문화가 끼칠 악영향이 뻔하게 예상이 되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미국 사회 또한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에 이 책이 미국 안에서 그다지도 크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는 판단이고요. 그리고 이런 문제가 사회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집단 (인종별, 지역별, 경제 수준별 등등)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식해야 할 겁니다. 한국 또한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기에 이런 문제를 무시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 중요한 문제 제기와는 별개로,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책이 시원하게 잘 결말을 맺었다기 보다는, 뭔가 찝찝한 것이 남았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아마도 밴스가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이 책을 마무리했기 때문일 겁니다. 밴스는 책의 말미에 자신이 여전히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와 씨름하고 있고, 또 자신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힐빌리 문화와는 상반된 미국의 엘리트 문화 속에서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갈등을 잘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음을 언급합니다. 밴스가 아직 30대 중반 정도의 나이임을 고려할 때, 이런 갈등은 앞으로도 꽤 오래 지속될 것 같고, 이후에 이런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이후에 힐빌리의 노래 후속편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밴스 정도로 개인적 내러티브를 중대한 사회적 이슈들과 잘 섞어서 조화롭게 풀어낼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작가라면, 후속작 또한 충분히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