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ert Joustra와 Alissa Wilkinson의 종말에서 살아 남는 법(How to Survive the Apocalypse)은 요한 계시록 읽기 시리즈의 첫번째 책입니다. 이 책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5권의 책들은 모두 요한 계시록 읽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하거나, 그 신학을 다루는 책이지만, 오직 이 책만이 이 시리즈에서 문화 비평(cultural criticism)적 성격이 강한 책입니다. 제가 어제 올린 저자들의 인터뷰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현대 대중 문화 (좀 더 좁게는 미국 대중 문화), 특별히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몇몇 드라마와 영화(예: Battlestar Gallactica, Hunger Games, Her 등등) 의 주된 주제와 각각의 영화나 드라마가 던지고자 하는 메세지를 분석함으로써 미국인들, 더 나아가서는 현대인들의 근심과 불안이 어떤 지점이며, 왜 그 지점에서 현대인들이 불안해하고 걱정하는지를 예리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 짚어내는 작업이며, 저자들은 그 작업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요한 계시록 읽기 시리즈의 첫번째 책으로 이 책을 택한 까닭은 이 책의 주요한 주제가 바로 종말론적인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반이상향(dystopia)적인) 주제에 탐닉하는 현대인의 정서의 기저부를 문화적인 분석을 통해서 알아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계시록 텍스트 자체에 대한 씨름을 하기에 앞서서, 요한 계시록을 읽어야 하는 주체인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문화적 맥락을 충분히 인지하게 된다면, 왜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읽어야 하는지도, 또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 어렵고도 신비한 책을 읽는다는 작업에 도전해야 하는지도 좀 더 명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체적으로는, 현대 문화와 현대성(modernity) 자체가 점점 더 반이상향(dystopian)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요한 계시록이라는 책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어떻게 현대인들이 처한 염세주의적인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인지를 앞으로 본격적으로 요한 계시록 읽기가 시작되면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이 책이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성 안에는 반이상향적인 종말론(dystopian eschatology)이라는 DNA가 그 본질 안에 심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요한 계시록이 전하는 메시지가 어떻게 그러한 반이상향적 종말론의 현대적 버전에 대한 처방전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이 말하는 현대성이란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일단 이 책이 현대성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는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책 전체를 통해서 저자들이 계속해서 주지하고 있듯이, 이 책은 캐나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바라보는 현대성과 세속화에 대한 관점을 분석의 도구로 삼아서 논지를 전개해 갑니다. 따라서 요한 계시록 읽기 시리즈에 대한 예비 작업을 하는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이 책은 현대성과 세속화에 관한 테일러의 사상을 알기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도 꽤나 매력적인 책이 될 것입니다. (이 책과 함께 테일러 사상에 대한 개론적 소개를 돕는 책으로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는 캘빈 칼리지의 철학자 James K.A. Smith의 How (Not) to be Secular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 또한 그 책을 사놓기는 했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마지막으로 주지하고 싶은 사항은, 이 책이 분석하고 인용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모두 전형적인 종말론 혹은 반이상향적인 종말론이라는 카테고리에 엄밀하게 들어맞지는 않습니다만 (예를 들어서 3장에서 다루고 있는 드라마 Mad Men이나 Breaking Bad같은 경우에는 굳이 종말론을 언급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적어도 그 드라마들이 현대성이 가진 반이상향적인 종말론이라는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증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었다고 보여집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종말론을 다루는 것 같지 않지만, 현상적으로 드러난 현대성의 병폐들의 기저부에는, 현대인들이 가진,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를 전혀 알지 못하겠는 혼란과 불확신에서 비롯된 불안과 공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흥미롭게도, 이 책이 분석하는 반이상향적 종말론의 핵심에는 정체성의 위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론에서는 왜 정체성의 위기가 현대성의 병폐로서의 반이상향적 종말론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지에 대해서 Battlestar Galactica와 Hunger Games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체성, 진정성과 인정 투쟁, 그리고 반이상향적 종말론이라는 병증
우선 용어 정의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 이미 종말론과 반이상향적 종말론을 많이 대비시켰습니다. 일단 종말론이란, 말 그대로 종말에 관한 큰 그림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대표적으로 요한 계시록이 있고, 그 밖에도 종말적 성격을 가진 책으로 다니엘서, 복음서 등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성격은 종말을 그려냄을 통해서 희망을 전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반이상향적 종말론은 종말론의 궁극적인 함의인 희망을 부정합니다. 이미 썼듯이, 영어로는 dystopia라고 하는 이 용어는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S. Mill)이 1880년대에 처음 썼습니다. 이후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년, 알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A Brave New World)등을 통해서 이런 전통은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 왔고, 마침내 TV 드라마에까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적 종말론과는 반대로, 반이상향적 종말론이 가진 가장 큰 공통점은 신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신이 언급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닥치게 될 비관적인 미래를 (특히나 기술 발전을 통해서) 그려내면서 희망없음의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 이런 반이상향적 종말론의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좀 더 재미있는 반이상향적 종말론의 공통점은 바로 정체성의 위기에서 그 절정이 드러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이 저자들이 가진 흥미로운 분석이기도 한데요. 저자들은 테일러를 인용하면서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진정성의 문화와 윤리(culture and ethics of authenticity)를 정체성의 위기와 연결시키면서, 반이상향적 종말론은 이 모든 것들의 저변에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좀 더 설명을 해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러려면 역사적인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진정성의 문화를 대중화시킨 인물은 장 쟈크 루소(Jean Jacque Rousseau)라고 여겨집니다. 루소는 자신의 사회 계약론(The Social Contract)를 통해서, 각 개인의 내면에는 자신만이 가진, 진정하고도 자연스러운(natural)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연으로부터의 소리가 있으며, 그 소리를 듣게 될 때 진정한 우리 자신으로 회복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이 가진 함의는 개인을 벗어나서 사회나 전통에서 가해지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거부이며, 따라서 (테일러에 따르면 이후에는 독일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드 허더(Johann Gottfried Herder)등을 통해서) 외적인 도덕이나 전통에 대한 추구보다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 현대성이 가진 진정성의 문화와 윤리의 토대를 놓게 됩니다. 자기 자신만이 가진, 본연적 자연이 전해주는 소리(voice of nature)를 찾아야 한다는 이런 대전제는 결국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생각과 연결되며, 이런 생각의 흐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성이 발현되기 이전의 사회나 전통에서는 사회 계급제와 전통적 도덕, 그리고 각 개인이 충실히 감당해야 할 수많은 역할들을 통해서 각 개인이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해하려고 할 때 기본적인 한계가 이미 주어졌고, 그러한 한계는 한편으로는 개인이 추구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제한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한계가 있었기에 개인이 자신을 이해하고 정의하는데 있어서 현대인들이 겪는 무제한적인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추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자신의 책 불안(Status Anxiety)에서도 자세하게 풀어내고 있는,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익숙한 서사 중에 하나죠.) 반면에 현대인들에게는 그러한 제한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적어도 원론적으로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것이든지 될 수 있습니다(물론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무한하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진정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렇게 무한하게 열린 선택지 속에서 현대인들은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인생 앞에서 선택지가 무한정으로 열려 있다는 사실은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것에도 묶이거나 헌신하는 것을 꺼려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원칙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진정성의 문화와 윤리에 기반을 둔, 즉 나 자신이 개인으로서 나만이 가진 진정한 나로서 성장해나가고 번영하는 것이며, 이 원칙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관계나 직업적, 문화적 추구도 현대문화 속에서 개인이 선택할 확률이 높은 선택지라는 맥락에서는 배제될 확률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 대신, 이미 말했듯이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나가고 번영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이 추구하게 되는 것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테일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해나가는데 있어서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또 자신이 인정(recognition)을 받고자 하는 존재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해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본연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욕구를 추구하고 충족시키는 것은 특별히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각각의 개인이 찾아내어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된 현대성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성이 보여주는 반이상향적 종말론은, 적어도 저자들에 따르면, i) 자신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ii) 대답을 찾는데 주어진 유일한 힌트가 진정성의 윤리와 문화이며, iii) 또한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선택지가 무한하고, iv) 그 대답의 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다른 이들의 인정을 구하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전체적으로 길을 잃어버렸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현대성과 현대인들의 안타까운 자아상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는 결국 현대인들이 미래에 대해서도 어떠한 확신도 가지지 못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미래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인 종말론에 이르게 되면, 현대인들이 할 수 있는 답이 거의 없어지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겁니다. 따라서 정체성의 위기는 필연적으로 종말론의 위기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고, 현대성의 필연적 동반자로 반이상향적 종말론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저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그림이 미국의 대중 드라마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요? 우선 Battlestar Galactica의 배경은 미래이며, 인간들은 이미 인간과 거의 흡사한 로봇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로봇은 Cylon이라고 불리며, 특히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인간의 피부를 입힌 로봇들은 skinjob이라고 불립니다. 이 로봇들은 인간보다 더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인간처럼 느낍니다. 이 로봇들이 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후손을 생산해내는 것 뿐이며, 이미 너무나 고차원적인 존재로 발전했기에,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도 인간과 똑같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기까지 합니다. 또한 자연스럽게 인간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인간들을 정복하고 싶어합니다. 여기에는 인류의 탄생 이후 우리 인간이 계속적으로 추구해온 질문들, 그리고 특별히 현대성을 가지게 된 인간이 추구하는 진정성에 관한 질문,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해서 자신을 찾고자 하는 질문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선 서구사회의 경우, 인간을 규정짓는데 있어서 이성의 존재를 통한 합리성은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중요한 잣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로봇은 인간보다 더 합리적입니다. 어느 쪽이 인간인 걸까요? 이런 상황이 펼쳐진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유일하게 합리성을 가진 존재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과 거의 다를 바가 없게 되어버린 로봇이 여전히 인간에게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진정성, 진정으로 인간과 똑같아지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인간들은 (테일러에 의하면) 그러한 진정성을 추구하다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Hunger Games의 경우, 어느 정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나름의 답을 제시하는 듯 합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Katnis Everdeen이라는 인물이며, 이 인물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진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한 구역의 이름은 District 12이며, 이 구역에 사는 사람들은 하층민들이고 그들은 또 다른 구역인 the Capitol에서 사는 이들에게 지배 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the Capitol에서 살아가는 이들 또한 궁극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한데, 그 까닭은 그들이 쾌락주의를 추구하면서 자신들의 욕망에 묶여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Capitol은 로마 제국의 타락기를 모델로 하고 있는데, 사실 현대성의 극치를 드러내는 사회를 모델로 하고 있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대로 현대인들에게 닥친 문제는 외적으로 정체성을 제시해줄 무언가가 거의 부재한 상태에서 스스로 정체성을 세워가야 하는 것이며,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현대인들이 가는 길은 the Capitol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거의 자신들의 욕망에 묶여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저자들도 언급했듯이, 현대성에서만 이러한 욕망에의 추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과거에도 사람들은 당연히 욕망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의 추구가 거의 정형화된 삶의 방식으로, 특별히 정체성을 찾는 하나의 방법으로 나타나는 시대는 현대가 거의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설명한대로 자연스럽게 반이상향적 종말론이 득세하게 되는 것이고, Battlestar Galactica나 Hunger Games같은 드라마들은, 그러한 현대인이 처한 정서와 정신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진단에 있어서는 탁월하기 때문에 앞으로의 요한 계시록 읽기 시리즈에서 첫번째 책으로 쓰기에는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진단에 비해서 처방이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에 읽고 나서 So what?이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요한 계시록 읽기 시리즈를 통해서 복음이 어떻게 이러한 현대성과 현대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희망을 제시해 줄 수 있는지, 특별히 단순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만이 소위 휴거를 통해서 세상을 빠져나가고, 세상은 망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식의 희망이 아닌, 세상 자체를 위한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앞으로의 요한 계시록 읽기를 통해서 생각해 볼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그 첫 시간으로 요한 서신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는 리처드 보캄(Richard Bauckham) 박사의 요한 계시록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LIKEELL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