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복음을 잘 모른다

지금까지 우리는 팀 켈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을 살펴보고 그의 프로젝트를 개관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는 켈러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을 통해 켈러가 평생 추구했던 질문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반추해 보았고,[1] 두 번째 글에서는 켈러의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바가 복음을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y)의 차원에까지 끌어내리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2]

이런 큰 그림을 가지고, 지금부터는 켈러가 다루는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책들을 하나씩 소개하고자 합니다. 특히 지난 두 번의 연재에서 다룬 주제가 어떻게 켈러의 책들에서 통합적으로 드러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필자는 앞으로 소개할 각 책이 어떻게 그 내용들을 심화시키는지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입니다. 『탕부 하나님』은 켈러의 복음 이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책입니다. 첫 번째 글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이 책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비유를 통해서 복음을 제시합니다. 켈러는 이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현대인들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두 가지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켈러의 해석틀(interpretive grid)은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제시할 때 여러 면에서 유용합니다. 특히 죄와 믿음의 온전한 의미를 제시할 때 유용하며, 또한 복음이 일상의 사회적 상상이 되게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첫 번째, 죄에 관하여. 켈러는 아버지의 명령을 대놓고 어긴 둘째 아들만큼이나, 아버지의 명령에 모두 순종한 맏아들 또한 죄를 짓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켈러는 편의상 둘째 아들은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맏아들을 교회 안에 있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을 각각 상징하는 것으로 상정합니다. 이런 구분은 임의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염두에 두신 직접적인 대상은 두 부류의 청중(눅 15:1-2) 중에서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더 자신이 있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두 번째 부류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애초에 그들의 태도에 대한 반응으로 이 비유가 나왔다. 두 아들의 비유는 형의 영혼을 예의주시하다가 그에게 마음을 돌리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한다. 예로부터 교회나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에서 이 본문을 가르칠 때면, 아버지가 회개하는 둘째 아들을 거저 받아준다는데 거의 전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 이 이야기의 과녁은 ‘제멋대로 사는 죄인들’이 아니라 매사에 성경의 규정대로 행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타이르시는 대상은 부도덕한 외부인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내부인이다. (34-35)

따라서 켈러는 이 책에서 죄를 단지 외적인 규범을 어기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모든 규범과 율법을 다 지킨, 혹은 다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까닭에 자신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롭다고 ‘착각’하는, 교회의 내부자들이야말로 예수께서 이 비유의 대상으로 생각하신 사람들입니다. 죄에 대한 이런 이해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과 하나님 앞에서의 종교적 헌신에 관한 범주를 무너뜨립니다. 켈러는 어떤 이는 착하고 어떤 이는 악하다는 구분법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중요한 이유라고 지적합니다. 죄 자체에 대한 이런 도덕적 범주화가 무너지면, 교회 생활에 충실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눈멀어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형 같은 바리새인의 상태가 영적으로 더 절망적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행여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는 말이라도 들으면 이렇게 반응한다. “나한테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교회 문이 열려 있을 때마다 항상 교회에 있는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일찍이 이렇게 가르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0-81)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이 하나님과 가깝다고 자부하기 쉽습니다. 이런 이들이 도덕적이기까지 하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둘째 아들처럼 용서받아야 할 명백한 범과가 있는 경우와는 달리, 맏아들로 대표되는 이런 이들은 규율이나 규칙을 어기지 않으므로 별로 뉘우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회개는 어떤 것일까요.

바리새인은 죄를 지으면 비참한 심정으로 회개한다. 자신을 벌하거나 자기 연약함 때문에 비탄에 잠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끝나면 그들은 여전히 형이다. … 바리새인의 회개는 깊이가 없어 문제의 핵심에 가닿지 못한다. 그 핵심이란 무엇인가? 형을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이다. … 내 신학교 시절의 한 교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주된 장벽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받을 선행”이다. (116-117)

필자가 이번 글의 제목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복음을 잘 모른다’라고 붙인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면 피상적일수록,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켈러는 교회에 다니는 대다수 사람들의 죄 이해가 이런 피상적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래서는 복음을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믿음에 관하여. 이처럼 죄에 대한 통속적인 범주를 무너뜨림으로써 켈러는 믿음을 좀 더 심오한 차원에서 보도록 돕습니다.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죄악과 착한 행실 양쪽 모두의 배후에 스스로 구주와 주인이 되려는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 사실을 알아야만 당신은 비로소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직전까지 온 것이다. 악행의 해법이 단지 선행이 아님을 깨달았다면 문턱까지 이른 셈이다. 거기서 내처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즉 하나님, 자아, 타인, 세상, 직업, 자신의 죄와 덕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를 거듭남, 즉 새로운 출생이라고 부름은 그만큼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만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지 문턱에 이를 수 있을 뿐 핵심에는 가 닿을 수 없다. 무엇으로부터 돌이켜야 하는지만 알 수 있을 뿐 무엇 또는 누구를 향해 돌이켜야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118-119)

믿음이 일으키는 변화는 ‘거듭남’이라고 불릴 정도의 변화라고 말합니다. 즉, 켈러는 복음을 믿는 것은 우리의 일상 전체를 뒤흔들 만한 것(즉, 믿음은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을 촉발할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켈러가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이 비유를 이해하는 독특한 관점을 제시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 비유에 대해 흔히 가지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서 시작합니다.

지난 세월 수많은 독자가 동생의 복권(復權)에 아무런 대가나 속죄도 수반되지 않았다는 피상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그들은 동생이 배상하려 했으나 아버지가 말렸음을 지적한다. (123)

하지만 켈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생이 합법적인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미 탕진한 재산 대신에 맏아들 몫의 재산의 일부를 다시 둘째 아들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동생이 온전히 회복되려면 형의 희생이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이 비유의 형은 그런 희생을 할 마음이 없고, 오히려 동생과 아버지를 향해서 분을 내고 있습니다. 켈러는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정한 형은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고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구원할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형을 비유 속에 등장시키지 않으신다. 참으로 가슴 아픈 상황이다. 이 동생의 형은 오히려 바리새인 같다. 다행히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 결격된 형을 비유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님은 진정한 형을 상상하고 동경하도록 우리를 유도하신다. 우리에게는 그런 형이 계신다. … 우리의 진정한 형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다. (124-125)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큰 형이 되셨습니다. 믿음이란 진정한 큰 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라봄에서 켈러는 특히 정서적인 요소를 강조합니다. 켈러에 의하면 믿음은 단지 지적인 동의가 아니며, 우리의 전인격이 예수의 희생하심을 보고 마음의 감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음 깊은 곳의 역동이 어떻게 두려움과 분노에서 사랑과 기쁨과 감사로 바뀔 수 있을까? 여기 그 길이 있다. 당신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치러진 대가를 보고 가슴이 뭉클해져야 한다. 바리새인과 예수님 제자의 핵심적 차이는 마음 깊은 곳의 동기다. 바리새인들이 착한 것은 하나님을 통제하려는 욕구 때문이고, 그 욕구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뭔가를 보았기에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변화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 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다. (126)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바라보면 볼수록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더욱 깊어지며 성숙해집니다. 켈러가 이미 말한 대로, 이런 믿음은 삶 전체를 바꿉니다. 우리가 살고, 사랑하며, 일하고, 관계 맺는 모든 것에서 마음속 깊은 동기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묻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런 메시지입니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지만 기저부에서는 계속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심해층의 묵직한 움직임처럼, 복음을 믿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조용한 변화를 일으켜 결국 삶 전체를 흔듭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의 삶이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역동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가 우리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죄의 작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다룬 책인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을 살펴보겠습니다.

[1] 그 세 가지 질문은 (1) 복음이란 무엇인가; (2)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해야 변하는가; (3) 어떻게 복음을 상황화할 수 있는가입니다.
[2] ‘사회적 상상’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이면에 깔려 있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규범 체계, 내러티브, 이미지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고안한 용어인 ‘사회적 상상’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지난 두 번째 글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