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을 변호하다—제임스 스미스의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Imagining the Kingdom)
독자 여러분은 상상, 혹은 상상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저는 임의성, 비현실성, 허구성, 윤리적인 기준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그렇다고 비윤리적이거나 반윤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따라서 신앙하고도 별 관련이 없는 것 등등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래서 사실 제임스 스미스의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영어 원제로는 Imagining the Kingdom)를 손에 집어 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저도 그렇지만 아마 그냥 책 제목만 보신 여러분들은 “흠… 상상이라… 무슨 얘기를 할까…”라는 생각을 하셨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임스 스미스는 현대의 걸출한 인문학자 2명(모리스 메를로퐁티와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작들 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그들이 하는 얘기를 풀어내면서 상상이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는데 얼마나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요소인지를 보여줍니다. 즉, 우리가 상상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게 되는 임의성이나 비현실성, 허구성, 윤리적 기준과 별 관계 없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과도 별 관계 없는 것 같아 보이는 등등의 대중적 이미지들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스미스는 이 책에서 왜 상상이 신앙인들이 신앙적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필수적인지, 그리고 상상이 어떻게 우리의 욕망과 우리가 숭배하는 것들에 선행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가치관 형성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저는 스미스의 책에서 (가능하면 복잡한 철학 이론을 언급하는 것을 피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어 가는 길에 도움이 될만한 통찰들을 (당연히!) 보게 됐습니다. 그런 통찰들을 3가지 정도로 정리해서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나눠볼까 합니다.
상상은 우리의 가치관 형성에 필수적이다
일단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스미스가 말하는 상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미스는 책 전체를 통해서 자신이 이해하는 상상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스미스가 말하는 상상이란, “우리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이해하는 것들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들에 더 깊이 영향을 끼치는 우리 존재의 한 부분으로써 (마치 우리가 가진 이성이 비록 우리 몸을 구성하는 기관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이듯이), 그러한 무의식적인 이해가 우리 삶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몸으로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습득되게 만드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부분”(19)입니다. 다시 (좀 더 간단하게) 반복하자면, 스미스는 유명한 철학자 폴 리쾨르의 말을 빌려서 “상상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 그런 현실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형성되는 가치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감당한다”(128)고 말합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지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특히 상상이 어떻게 우리의 무의식적인 이해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예는 스미스가 가족들과 코스트코(Costco)에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8-10). 스미스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건강한 식습관과 지역 농장에서 재배되는 과일과 야채 사먹기 등과 같이 음식과 환경이 자본에 잠식 당하는 흐름에서 탈출하려는 시도에 관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저명한 농부이자 문명 비평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저작들에 깊이 동의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코스트코의 푸드 코트에서 웬델 베리의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지적이고 의식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들은 코스트코의 푸드 코트를 정말 싫어하고 거부하도록 이끄는 반면,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코스트코의 푸드 코트에서 인스턴트 식품들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스미스가 의식적으로는 코스트코의 푸드 코트를 반대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은 스미스의 의식적인 이해와 무의식적인 이해 사이에 간극이 있었을 뿐 아니라, (즉 스미스가 말하고 생각하며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믿는 것 사이에) 더 나아가서 그가 바라고 원한다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과, 그가 정말로 바라고 원하는 것들 사이에도 간극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스미스의 깨달음은 일단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배움은 인지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질 뿐, 무의식적인 차원의 배움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들(교리 교육이나 설교 등)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배움은 우리가 정말로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들(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짜 가치관)을 변혁하는 교육이어야 하는데, 그러한 무의식적 가치관의 변혁은 오직 우리가 상상하는 것들의 변혁을 통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스미스의 책 제목인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가 굉장히 시급한 문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상상일까요? 스미스가 거기에 대해서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저러저러한 환경을 가진 곳으로 그려내게 되면, 그 이후에 나는 그런 그림에 따라서 “올바른 삶”에 대한 그림을 가지게 되고, 그에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의무들과 책임들이 무엇인지도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125). 즉 서평 초반부에서 우리가 상상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게 되는 임의성이나 비현실성과는 달리, 우리는 누구나 세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상하는 능력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이 임의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임의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 우리의 상상은 많은 부분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가 세상을 상상하는 방식,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윤리적인 삶을 상정하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비록 스미스는 이런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지는 않습니다만, 개인적인 상상의 차원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개인이 속한 문화의 상상이 곧 개인의 상상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점에서 문화의 중요성은 엄청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상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바라고 갈망하는 것들, 더 나아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윤리적인 비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미스는 “[우리의] 상상은 우리의 욕망에 앞선다(imagination precedes desire)”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전작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스미스가 인간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욕망(삶에서 우리가 가장 바라고 꿈꾸는 것)을 따라서 움직이는 존재라고 했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이번 편인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미 앞서 말했다시피 스미스는 두 명의 걸출한 인문학자인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작들 속으로 깊숙히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까닭은 상상이 우리의 가치관 형성에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스미스는 우리의 상상이 몸과 이야기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the intertwinement of the body and the story). 즉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되도록 해주는 매개체는 우리의 몸이며, 우리의 몸은 그런 면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게 해주는 필요 조건이 되는데, 상상은 이렇게 우리 삶의 이야기가 우리 몸에 전달되어 녹아 들어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중개적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용한대로,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저러저러한 환경을 가진 곳으로 그려내게 되면, 그 이후에 나는 그런 그림에 따라서 “올바른 삶”에 대한 그림을 가지게 되고, 그에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의무들과 책임들이 무엇인지도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125).
이런 맥락 속에서 스미스는 메를로퐁티와 부르디외의 저작들을 다룹니다. 메를로퐁티의 “인식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erception)”은 우리의 “몸”이 어떻게 무언가를 알게 되는지에 대한 철학적 묘사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피에르 부르디외의 “실천의 논리(The Logic of Practice)”는 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통해서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이 어떻게 사회적 배움을 통해서 무언가를 습득해가는지에 대한 철학적 탐구서입니다. 이런 면에서 두 철학자의 탐구는 적어도 스미스가 논증하는 목적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겹치는 면이 존재하고, 메를로 퐁티의 경우 그런 탐구의 핵심에 실천지(praktognosia) 개념이, 그리고 부르디외의 경우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 있습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실천지(praktognosia: practical know-how)란, “우리 몸의 운동(movement) 경험은 세상과 객체를 인식하는 방식을 제공하게 되는데, 그러한 인식 방식 자체를 가리킵니다”(56). 한편으로 아비투스(habitus: practical sense) 또한 스미스의 실천지 개념과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아비투스란 “우리 몸이 우리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펼쳐지는 사회적 경험을 습득하면서 얻게 되는 인식의 틀”(157)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두 개념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나 차이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메를로퐁티와 부르디외가 각각 어떤 문제 의식을 가지고 각각의 개념을 창안했는지에 대해서는 이 서평이 다루고자 하는 범위를 벗어나기에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자 합니다. 오히려 저는 독자들에게 스미스의 책을 읽어보시고, 스미스가 참고한 이 두 학자의 저서들을 자세하게 살펴보심으로써 그 차이점과 유사성을 찾아나가시기를 권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미스가 주장하는 몸의 앎과 습관의 형성에 관한 한, 두 개념 모두 스미스의 주장을 지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예로 영화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스미스가 드는 예입니다; 66-69).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은 공공 연설에 능해야 하는 영국의 왕 조지 6세가 말더듬이라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조지 6세의 부인인 엘리자베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고용하는데, 그들 중에는 조지 6세의 문제를 단순히 “생물학”적인 문제로 생각해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조지 6세에게 혀 연습을 시키고, 또 다른 다양한 몸의 연습을 시키지만, 허사로 돌아갑니다. 또 다른 이들은 조지 6세의 문제를 의지의 문제로 생각하고 용기를 내서 의지를 가지면 말더듬이 문제가 고쳐질 거라고 다그치지만 역시 허사임이 드러납니다. 이런 가운데 엘리자베스는 조지 6세의 언어 치료사로 리오넬 로그를 고용하고, 로그는 이전의 두가지 접근법과는 다르게 조지 6세의 과거 이야기를 물어보기 시작합니다. 즉 조지 6세의 삶의 이야기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조지 6세는 처음에는 왜 리오넬이 자신의 말더듬이 컴플렉스를 고치는 대신, 쓸데 없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들추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지만, 리오넬은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컴플렉스가 정확하게 그의 과거 삶의 이야기가 그의 몸에 녹아들게 된 결과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지 6세의 과거 이야기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조지 6세의 어린 시절에 그의 아버지가 그의 형에게 그의 말더듬이 습관을 놀리라고 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의 의도는 조지 6세가 형에게 놀림을 받으면 말더듬이 습관을 고치지 않을까 했던 것이었습니다만, 습관은 그런 식으로 간단히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울러 조지 6세는 어린 시절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보모가 자신의 형을 편애했던 경험을 다시 떠올리며 이야기합니다. 리오넬이 이렇게 조지 6세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까닭은 조지 6세가 말더듬이 습관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자신의 과거 삶의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다시 이해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리오넬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이전과는 다르게 이해하게 되면서 신기하게도, 그리고 스미스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하게도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습관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스미스의 논점을 정확하게 증명하는 동시에, 서평자인 저에게 우리의 구원이 왜 몸의 구원일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스미스가 말하는 것들을 조금 확장해서 생각하면, 우리의 가치관 (즉 우리가 말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믿고 붙잡고 있는 것들)은 항상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몸에 녹아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구이냐는,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에 어떤 가치관이 녹아들어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이야기는 우리의 가치관이 우리 몸에 녹아들게 되는 수단이 됩니다. 그렇기에 조지 6세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르게 풀어내게 되었을 때 자신의 가치관이 바뀌게 되었고, 그러한 가치관의 “변혁”은 그의 몸의 습관을 바꿀 수 있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님 편에서 정확하게 아실 수 있는 기준은 우리의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보여주는 가치관이라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의 몸에는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이 습득하게 된 여러분의 가치관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쩔 수 없이 몸의 구원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가, 즉 우리의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가 우리의 몸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왜 몸을 입고 오셨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보충 설명이 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 제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자, 여기서 다시 킹스 스피치를 생각해 본다면, 리오넬 로그가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했던 것은 조지 6세의 삶의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갈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습관과 가치관은 이미 얘기한대로 우리 몸이 경험한 우리 삶의 이야기의 흔적입니다. 이제껏 우리 각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왔는지가 우리 몸에 고스란히 다 남아 있습니다. 비록 그런 흔적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서, 특히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중요한 이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의 가치관은 모두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기독교적인 교육에 대한 대안은 어쩌면 너무나 명백할 겁니다. 즉 복음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갈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 삶의 이야기를 복음의 이야기에 내어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새롭게 다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의 상처와 아픔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하심이 우리 삶의 이야기의 각 순간순간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또 실제로 현존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은 그러한 재해석이 그저 우리가 꾸며낸, 임의적이고 비현실적인 “상상”이 아니라, 현존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상상이 될 수 있게끔 해줍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삶을 재해석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기독교 교육이며, 이런 과정 가운데 우리의 예배 참여가 필수적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푸신 구원의 복음을 우리가 실제로 누리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실천 신학과 함께 기독교인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로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자로써, 저에게 스미스의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는 정말 그 내용을 거의 100% 암기해도 좋을 만큼 앞으로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인의 실천이나 교육, 그리고 예배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있으신 모든 분들에게 분명히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적극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