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야기의 능력, 그리고 미국 복음주의의 예수 이야기 이해(the Power of Jesus Narrative, and the Appropriation of Jesus Narrative in American Evangelicalism)—피터 헬첼(Peter Heltzel)의 예수와 정의(Jesus and Justice)
예수 이야기는 매력적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 이야기에는 매력을 많이 느끼지요. 좀 더 넓게 보자면, 기독교 신학은 성경 전체를 모두 예수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 이야기에 침잠되어 살아가는 것이 결국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왜일까요? 이 서평에서 그 얘기도 해보겠습니다.) 각설하고, 우리는 모두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는 문화에도 이야기가 있지요.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 문화에 존재하는 까닭은 그 이야기들이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설득력을 가진다는 말은 우리가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우리의 이야기의 조각들을 문화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 틀을 통해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문화 안에 존재하는 이야기 틀을 조금씩 바꿔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는 그게 우리의 이야기든, 문화 안에 있는 이야기든, 현실의 특정한 면에 초점을 맞춘 재구성이며, 그런 특성상 제한적이 될 수 밖에 없지요. 그런 까닭에 이야기는 우리가 특정한 때에 현실의 어떤 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구성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의 심리학자 댄 맥아담스(Dan McAdams)는 우리가 살아내는 이야기들(The Stories We Live By)이라는 책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마침내 우리의 일부가 되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써내려 갑니다. 맥아담스에 의하면, 이야기의 기본적 구성 단위는 우리에게 호소력을 가지는 이미지들과 심상들입니다. 우리를 자극하고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진 이미지들과 심상들은 그런 이미지들과 심상들의 확장된 단위인 특정한 메세지 속에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TV나 잡지, 혹은 온라인 SNS에 뜨는 광고들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이런 광고들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심상들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있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그런 이미지들과 심상들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면, 우리는 그런 이미지들과 심상들 이변에 깔린 메세지를 매력적인 것으로, 즉 우리가 따라야 할 메세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런 메세지들은 항상 가장 큰 단위인 어떤 이야기라는 맥락 속에서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받아들인 이미지들과 심상들은 우리에게 메세지를 받아들이게 하고, 더 나아가서 특정한 이야기를 우리 삶의 이야기로 이해하도록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의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능력에 관해서, 그리고 그런 능력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이끄는 목적지에 대해서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가 그의 최근작인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에서 쇼핑몰의 비유를 통해서 간결하고도 설득력 있게 잘 설명한 것 같아서 여기에 인용합니다.
쇼핑몰은 그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짧은 글이나 교훈적인 강의를 통해서 소통하는 대신, 행복한 삶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서, 우리가 모방하고 싶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3차원 아이콘을 통해서 전달합니다.
행복한 삶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된다는 말은 그 안에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메세지가 있을 뿐 아니라, 그 메세지가 특정한 이야기라는 맥락 속에서 전달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제품 광고에는 항상 행복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우리는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직업에, 가족들은 모두 건강하며, 가족들의 관계 또한 너무 좋은, 그런 식의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가 설득되는 이야기들이고, 우리가 가치 있게 보는 삶의 이야기를 꿈꾸게 하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시각 이미지들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광고들이 보여주는 삶을 꿈꾸면서 살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해 갑니다.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예수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작용하는 방식도 똑같습니다. 예수 이야기가 성경에 실린 목적은 예수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이야기는 예수 이야기와 다른 메세지를 전하는 이야기들(예를 들면 쇼핑몰이 들려주는 이야기)과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야기들은, 특별히 궁극적인 삶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메세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본질적으로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히브리서 성경 공부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3장을 지난 주에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3장 첫 부분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을 던지더군요. 특히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기 위해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예수 이야기를 깊이 생각해보라는 말에 매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삶과 죽음, 그의 부활 속에 담긴 그 분의 이야기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 그의 부활 속에 담긴 그 분의 이야기를 깊이 생각해 본다는 말은, 쪼개서 생각해보면 결국 예수 이야기에 담긴 메세지를 생각해 보라는 말인데, 그 말은 우선적으로는 예수 이야기에 담긴 이미지와 심상을 생각해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반복적으로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TV에서 광고를 접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야 그 심상과 이미지가 우리의 것이 되고, 그를 통해서 그 메세지가 우리의 이야기에 통합되며, 그렇게 해야 비로소 예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려면 예수 이야기에 침잠되서 살아가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 안에 예수의 이야기가 들어와 살아 숨쉬고, 춤추고, 우리를 움직이고, 이끌며, 때로는 우리의 이야기와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기는 때가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이야기는 이미 말한대로 우리와 다른 시대에 완전히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쓰여진 이야기인 동시에, 굉장히 다층적이며 다양한 면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예수 이야기의 어떤 부분만을 취사적으로 우리의 이야기로 소화하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 이야기의 다른 어떤 부분은 우리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로 소화해내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번에 다루는 피터 헬첼(Peter Heltzel)의 예수와 정의(Jesus and Justice)는 이런 예수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이야기에 끼치는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읽으면 굉장히 흥미로울 책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 뿐 아니라, 어떤 조직이나 기관이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가 어떻게 그 조직이나 기관의 일하는 방식이나 여타 기관들과 관계 맺는 방식,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주목하면서 읽는다면 아주 흥미로울 겁니다. 책 자체는 미국 복음주의의 역사에 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굉장히 지루할 수 있는 책이긴 합니다. 미국 복음주의의 역사라는 딱딱한 주제를,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과 칼 헨리(Carl F. H. Henry) 라는 두 묵직한 사상가가 대변하는 두가지의 거대한 서로 다른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할 뿐 아니라, 그 두 큰 흐름이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네 개 단체, 즉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의 Focus on the Family, 리차드 시직(Richard Cizik)의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존 퍼킨스(John Perkins)의 Christian Community Development Association, 그리고 짐 월리스(Jim Wallis)의 The Sojourners라는 각각의 단체들이 가진 신학과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진화하는지를 추적해 가면서 미국 복음주의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생각해 보려는 시도를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책은 딱 그렇게 조직이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복음주의의 초기 역사를 추적하고, 그 속에서 복음주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 후에, 곧바로 킹과 헨리라는 두 인물의 신학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그리고 또 다시 곧바로 앞에서 언급한 네개 단체의 신학과 역사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런 각각의 인물들과 기관들이 어떻게 예수 이야기를 소화하고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에서 풀어내려고 하는가, 그 질문을 하면서 읽으면 이 책에 대한 독서 경험은 또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헬첼이 구분하는 백인 복음주의(White Evangelicalism)와 예언적 흑인 기독교(Prophetic Black Christianity)가 각각의 경험에 따라서 어떤 예수의 이미지와 심상을 취사선택했고, 그를 통해서 예수의 어떤 메세지를 선택적으로 소화했으며, 그런 메세지가 어떤 맥락 속에서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들의 이야기로 이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이 두 흐름이 겉으로만 보면 서로간에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이 두 흐름 모두 사실은 19세기 초반 케인 리지(Cane Ridge)의 부흥회에서 양측 모두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데서 기인합니다. 따라서 헬첼은 백인 복음주의와 예언자적 흑인 기독교가 서로 공유하는 요소가 사실은 18세기의 부흥주의이며, 따라서 두 흐름에는 모두 복음주의의 특성으로 자주 인정되는 요소들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항상 언급되는 David Bebbington이 규정한), 이를테면 1) 회심에 대한 강조, 2)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정, 3) 행동주의, 그리고 4)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강조와 같은 외형적 요소들이 공유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공통점은 여기까지이며, 백인 기독교가 예수 이야기 중에서 승리나 부활같은 이미지와 심상을 가져와서 자신들의 이야기로 삼는 반면, 흑인 기독교는 실패, 좌절, 절망같은 이미지와 심상을 자신들이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의 주된 요소로 가져오게 됩니다. 헬첼이 책 초반부에서 언급하는 여류 기독교 운동가였던 Harriet Jacobs (1813-1897)는, 성 토요일의 신학(theology of holy Saturday: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부터 부활하신 주일 사이, 토요일에 무덤에 계시던 때를 성경의 내용과 신학적 전통을 통해서 신학화) 을 통해서 노예로서 자신이 겪는 설움과 고통을 예수의 고난 이야기 속에서 통합해서 이해하며, 그를 통해서 신앙을 키워 갑니다. (이후에 Jacobs는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간구함을 통해서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평생을 노예 해방 운동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런 흐름이 단지 Jacobs라는 한 개인이 보여주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고, Sojourner Truth (1797-1883), Fanny Lou Hammer (1917-1977), 그리고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같은 인물들의 삶과 신학, 그리고 그들이 벌인 운동 속에 잘 녹여져서 나타난다는 것이 헬첼의 주된 논지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의 신학과 삶은 계속적으로 현대 복음주의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따라서 예언자적 흑인 기독교의 경험과 신학은 복음주의 역사와 신학의 합법적인 내러티브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헬첼이 책 전반을 통해서 주장하는 바라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는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여전히 흑인들에 대한 (전반적) 우월감과 (육체적) 열등감 속에서 계속적으로 흑인들을 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일조하거나, 암묵적으로 그런 탄압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복음주의의 부흥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D.L. Moody의 경우,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해서 명목상으로는 반대했지만, 자신의 부흥 집회는 흑.백이 분리된 채로 진행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맙니다. MLK Jr.와 함께 복음주의의 큰 흐름을 아우르는 인물로 대변되는 Carl Henry 또한 비록 인종 차별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는 그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MLK Jr.가 이끌었던 흑인들의 인종간 평등과 해방을 위한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헬첼은 이런 Henry의 소극적 태도의 기저부에, 또 DL Moody의 인종 분리에 대한 소극적 인정의 기저부에 그들 각각이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지적합니다. Henry가 (그리고 Moody가) 자신의 정체성의 근거로 받아들인 예수 이야기는 예수의 주되심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를 지금의 신앙인들이 적극적으로 가야 할 길로 받아들이는 예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백인 복음주의는 계속적으로 노예제 이후에도 인종 차별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협력해 왔다는 것이 헬첼의 진단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의 그림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 운동은 이제 점점 예언자적 흑인 기독교가 가진 요소들을 복음주의 운동이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에 통합시켜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헬첼은 이런 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들로 Shane Claiborne, Malinda Berry, Bart and Tony Campolo, Ruth Padilla DeBorst, David Gushee, Lisa Sharon Harper, Gary Haugen, Sammy Rodriguez, Adam Taylor, Richard Twiss, Jonathan Wilson-Hartgrove같은 인물들을 언급합니다. 이런 인물들은 더 이상 백인 남성이 대다수가 아니며, 여성과 유색인종이 그 안에 많이 있으며, 이런 구성 비율은 앞으로도 더 다양해질 것이라는 것이 헬첼의 추측입니다. 최근 한국계나 아시아계 중에서도 복음주의권에서 발돋움하는 리더들이 꽤나 많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Soong-Chan Rah 교수를 비롯해서, Eugene Cho 목사, Francis Chan 목사 등등) 아마 미국의 복음주의는 앞으로 점점 다른 양태로 발전해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 이야기는 다층적입니다.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정말 다양하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히브리서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나 미국 복음주의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에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더 깊은 층위에 놓여있는 진리, 즉 우리가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음을 통해서, 우리 삶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 속에 통합되면서 신앙이 성장해 나가는 존재라는 사실일 겁니다. 이것은 사실 한국 기독교가 돌아봐야 할 진리이기도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백인 복음주의 계열에 속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한국 기독교 또한 백인 복음주의가 이해하는 예수 이야기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모습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성공을 추구하며, 승리의 내러티브만이 유일하게 유효하며, 실패나 절망은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이야기가 한국 기독교가 이제껏 붙잡고 달려온 예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던져주는 도전은, 예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어온 걸까요? 그 예수가 정말로 성경이 그려내는 온전한 예수가 맞는 건지, 우리가 예수 이야기에서 의도치 않게 빼먹고 고려하지 않은 요소는 없는 건지,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요. 한국 기독교는 이제 점점 성장세보다는 하향세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사실 교세가 성장하느냐 감소하느냐와 관계 없이, 예수 이야기에 계속적으로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름 뿐인 기독교인이 되고 말 겁니다. 그게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중요한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