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문화 비평,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팀 켈러의 당신을 위한 사사기
팀 켈러는 이제까지 단행본으로만 총 24권의 책을 냈습니다. 24권의 책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지는데요. 신앙 생활에 꼭 필요한 주제들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 주제별 단행본들이 있고, 성경 각 권에 대한 해설을 담은 단행본들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복음에 대해서 다룬 탕부 하나님, 기도에 대해서 다룬 기도, 변증에 대해서 다룬 하나님을 말하다와 답이 되는 기독교, 고통에 대해서 다룬 고통을 말하다, 우상에 대해서 다룬 내가 만든 신, 정의에 대해서 다룬 정의란 무엇인가 등이 대표적이고, 후자의 경우로는 신약에서는 갈라디아서, 로마서, 마가복음 등이 있고, 구약에서는 시편과 잠언같은 지혜 문학에 속한 문서들, 그리고 사사기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성경 자체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들이 특정 주제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책들보다 훨씬 적습니다. 구약의 경우, 시편이나 잠언같은 지혜 문학에 대해서 다루는 묵상집들을 빼고는 사사기에 대해서 다룬 당신을 위한 사사기가 지금까지로는 거의 유일합니다. (올해 가을에 요나서에 대해서 다룬 The Prodigal Prophet(탕자 선지자?)가 나오게 될 예정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켈러는 왜 구약 39권 중에서 지혜 문학 (시편, 잠언)에 대한 해설서를 낸 것을 빼면, 예언서도 아니고, 모세 오경도 아니며, 유독 사사기 해설서를 낸 것일까요? 거기에는 크게 세가지—교리적, 전략적, 그리고 문화적—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이 세가지 이유들의 공통 분모는 우상 숭배입니다.)
첫번째로 사사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해설이 팀 켈러의 죄론의 핵심인 우상론의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켈러는 그의 책 내가 만든 신(Counterfeit Gods)과 일과 영성(Every Good Endeavor)에서,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설교들에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죄론이 우상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사실 죄론의 핵심을 우상론으로 보는 그의 관점 때문에 보수 장로교 목회자들이 켈러 신학에 대해서 비평한 유일한 비평서인 Engaging Keller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Ian Campbell이 켈러의 죄론을 혹평하는데, 그 주된 까닭은 켈러가 장로교 전통이 보여주는 죄론의 특징적 요소인 법정적 측면을 대체로 배제하고, 죄의 관계적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모든 동기와 행위로써의 죄에 대한 강조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면서, 우상 숭배로써의 죄에 대한 이해를 더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자신의 사사기 읽기를 통해서 성경적 죄론의 핵심이 우상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변명들이 뭐였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죄와 우리의 죄의 핵심은 우상숭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09). 그리고 거기에는 충분한 성경적 근거와 토대가 있습니다. (성경적 죄론의 핵심에 우상론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에 대해서는 Raymond Ortlund Jr.의 God’s Unfaithful Wife나, Richard Lints의 Identity and Idolatry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켈러는 전략적인 이유에서 사사기 해설서를 냈습니다. 전략적인 이유란, 사사기가 그려내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가 현대 세속 사회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공감할 만한 부분이 사사기에 굉장히 많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한 사사기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켈러는 저명한 구약 학자인 Daniel Block을 인용합니다.
“구약의 어느 책도 이 책만큼 현대 교회를 잘 반영하지 않는다. 이 책은 이기적 추구 속에 빈사 상태인 교회에 경종을 울린다. 진실로 경건한 리더들의 부름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대신에, 어디서나 회중들과 그들의 리더들은 자기 눈에 옳은대로 하고 있다” (Daniel Block, The Book of Judges, 당신을 위한 사사기 328)
실로 Block의 견해가 옳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사기 전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멈추고 다른 것들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기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서구 교회나 한국 교회의 상황과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일단 켈러는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적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삶은 여호와 예배하기를 전면 중단하고, 대신 다른 신을 예배하겠다는 단순한 결정보다 복잡한 것이었다. 사실 이스라엘이 한 것은 여호와에 대한 예배를 우상 숭배와 결합한 것이었다…. 이교적 세계관 속에는 많은 신이 있고 (농업, 사업, 사랑, 음악, 전쟁의 신 등), 각 신이 영향력을 미치는 특정한 영역이 있으며, 그 중 어느 신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하여 주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 관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취향과 필요대로 선택한 자신의 신(들)을 갖는다” (55).
바로 다음에 이어서 켈러는 현대 교회가 왜 이스라엘의 상황과 비슷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게 전달합니다.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풍성한 결실을 약속하는 신상 같은 것은 별로 유혹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느 크리스천이 경제 활동이 단순한 생업이 아니라 정체성과 안정감을 주는 등의, 우상의 기능을 하는 도시에 산다면 (서평자 주: 예를 들면 뉴욕 맨하탄이나 한국의 서울 같은), 교리적 믿음을 지키고 윤리적 처신을 하면서도 마음의 예배는 여호와와 돈. 직업으로 양분될 위험이 있다” (56).
마지막으로, 켈러는 문화적인 이유 때문에, 좀 더 제대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문화 비평(cultural criticism)의 필수불가결성에 관해서 역설하기 위해서 사사기 해설서를 냈습니다. 우리는 흔히 문화 비평이라고 하면 가방끈이 긴 식자층이 지적 유희를 위해서 하는, 우리의 삶에는 별 쓸모 없는 작업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문화 비평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죠), 켈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문화 비평은 필수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또한 사사기가 그러한 문화 비평의 필요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 안에는 항상 우상이 존재하고, 켈러가 이해하기로는 그런 우상들을 분별하는 일이 바로 문화 비평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는 항상 어떤 특정한 이상을 그 문화에 속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믿는 복음은 그런 문화적 이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비판적으로 분별하면서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경영인들의 문화는 이윤을 많이 내는 것을 이상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이윤을 내는데 실패하게 되면 그 압박과 두려움에 못 이겨 자살하는 기업인들이 많습니다.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서두 부분에 그런 안타까운 얘기들이 몇 사례 등장합니다), 한국의 남성 문화는 강함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흔히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남성을 가장 이상적인 사람으로 그려내곤 하지요. 심지어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는 격언이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군대 문화는 그러한 남성 문화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농경 문화는 풍작을 내는 것을 우상으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농경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풍작에 대한 열망을 농업의 신에게 투영시켜서 그 신에게 제사를 드리곤 했지요. 그리고 흉년이 지속될 경우에 왕이나 지배 계층을 향해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면은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익숙할 뿐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도 꽤나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켈러는 이 책 전체를 통해서 계속해서 우상 분별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질적으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주인이 되고 계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첫째로 우리 주변 사회 속에 있는 거짓 신들의 정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삶의 모든 영역, 즉 우리의 가정, 경력, 소유, 야망, 시간 등을 정직하게 살펴보며, 두 질문을 해야 한다.
- 나는 이 영역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 그대로 하려고 하는가?
- 나는 하나님이 이 영역에 무엇을 보내시든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56-57)
켈러에게 문화 비평을 통한 우상 분별은 또한 회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켈러에게 있어서 회개란 도덕적인 범과로부터 행동적인 차원에서 돌이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 또한 죄를 계속 지을 때 내가 당하게 될 손해가 죄를 짓지 않을 때 내가 얻게 될 유익보다 크기 때문에, 즉 손익 계산을 해서 돌이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란, 복음 메세지에 기반한 돌이킴입니다. 복음 메세지는 내 마음의 동기를 성찰하도록 이끕니다. 따라서 회개란, 단지 죄의 결과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닌, 죄를 짓게 하는 내 마음의 동기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죄를 짓는 사람들은 죄를 지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기쁨이나 유익이 있고, 그 기쁨이나 유익에 비해서 만약 죄가 발각되었을 때 당하게 될 손실이 너무 클 경우 죄 짓기를 그만 둡니다. 즉 손익 계산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켈러는 복음에 기반한 회개는 손익 계산이 없는, 하나님의 마음이 신자의 마음에 닿아서 일어나게 되는 슬픔이며, 따라서 죄의 결과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죄의 동기에 대한, 즉 내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복음 메세지는 절대로 나 자신에 대한 후회나 혐오로 이끌지 않기에, 복음 메세지에 기반한 회개 또한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죄의 유일하고 진정하고 영구적인 결과인 주님의 ‘상실’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회개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그냥 지나가게’ 해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땅의 결과들은 비교적 작게 느껴진다. “나는 일어난 일보다 훨씬 더 심한 결과를 겪었어야 마땅해. 진짜 처벌은 예수님이 당하셨고, 나에게 임하지 않을거야” (112-113).
사실 회개는 이 책 전체에서 켈러가 계속해서 설명하는 주제입니다. 그 이유는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회개가 없이 자신들이 외세의 압제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당신의 구원의 대리인인 사사를 보내심으로써 응답하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들을 섬기는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갑니다. 켈러는 이러한 우상 숭배가 삼손 시대(13-16장)에 와서 회복 불가능 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진단합니다. 왜냐하면 삼손 시대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외세에 대한 예속이 처음에는 정치적, 군사적인 예속에 지나지 않았기에 탄압과 핍박이 있었고, 거기에 저항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들이 있었지만, 삼손 시대 이후에는 그러한 예속이 문화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점점 더 저항조차도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음하거나 그들의 ‘포획자들’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블레셋의 가치, 풍습, 우상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순응했기 때문이다. 삼손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블레셋 사회와 결혼하기를 갈망했다. 필시 그것은 문화적 ‘상향 이동’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없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기반을 둔 고유 문화가 없었다” (232).
켈러는 여기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현대 문화에 예속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오버랩으로 떠올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문화적 예속이란 가장 심각한 상태의 우상 숭배이며, 아무런 정치적, 군사적 압제를 경험하지 않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하지만 가장 강력한 종류의 예속이기 떄문입니다. 따라서 켈러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우상을 분별하라고 촉구하며, 특별히 사사기의 메세지가 담고 있는 우상 분별과 회개, 그리고 궁극적 변혁의 지혜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켈러가 세속 문화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경계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켈러는 어느 문화에나 복음의 정신과 합치하는 요소와 그렇지 않는 요소가 혼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켈러에게 있어서 문화는 단지 변혁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켈러는 자신의 문화관에 대해서 센터 처치의 두번째 파트인 “도시”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적 예속이 무서운 점은 우상을 분별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미 내가 만든 신 서평에서 언급한대로, 켈러는 현대의 세속 문화 안에 일과 직업이라는 우상, 로맨스라는 우상, 자녀나 부모님이라는 우상 등 다양한 우상이 존재하며, 그러한 우상들을 분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음을 주지했습니다. 이런 우상들이 무서운 점은 우상을 구원자로 삼고 있는 자들은 우상을 통해서 만족을 얻지도 못하며, 우상이 결국 그들의 패망의 원인이 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자녀를 자기 인생의 궁극적 의미로 삼는 부모는 자녀에게 과도한 기대를 쏟아부음으로서 자녀가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과, 그렇게 되었을 때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정감을 가지게 만듭니다. 또한 자녀가 성장해서 부모 곁을 떠나게 되면 자신들의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소위 ‘빈 둥지 증후군’에 걸리기도 합니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이죠. 돈이나 성공, 혹은 낭만적 사랑이라는 우상들이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넣는지를 우리는 매일매일 신문과 뉴스를 통해서 목격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고 있을 때에도 먼저 당신의 대리인인 사사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켈러는 사사기 안에도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력한 메세지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의 반응을 보이는가? 그런 징후는 없다! 사사기 6장 11절에는 백성의 진심어린 회개, 우상들을 불태우기 등등이 나오지 않는다… 백성이 회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의 사사에게 임무를 부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롬 5:8)… 하나님은 백성이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행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자를 모집하고 준비시키신다. 만일 누가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주면서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그런 사람에게 보일 반응보다 훨씬 더 은혜로운 것이 하나님의 반응이다” (116-117).
여기서 켈러는 사사들을 그리스도의 전조(foreshadow)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보다 불완전하며, 흠이 많고, 구원할 수 있는 범위 또한 제한적입니다. 특히 삼손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조시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삼손의 죽음은 두가지 중대한 면에서, 주 예수님의 죽음과 매우 다르다. 첫째로, 삼손이 다곤의 신전에 있는 것은 그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손의 몰락은 삼손의 불순종으로 자초되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항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고, 다른 사람들, 즉 우리들의 불순종 때문에 죽으셨다. 둘째로, 삼손의 죽음은 하나님이 삼손을 일으키시며 맡기신 제한적 역할, 즉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는 것”을 완수했다.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은 ‘단번에 완전한 해방’을 이룬 최종 구조였다” (270).
즉 예수 그리스도는 삼손과 비교하면 (아니 어떤 인간 구원자와 비교해도) 흠이 없고 무결하며, 또한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다른 이들의 잘못을 위해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우상들과는 달리, 또한 현대 세속 문화의 우상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희생시키시는 대신, 스스로 희생하셨으며, 우리가 그 분 안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다른 어떤 우상도 줄 수 없는 만족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이런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구약 읽기는 전통적 장로교 신학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만, 그의 그리스도 중심적 구약 읽기가 가진 특징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읽기가 그리스도인의 신앙 형성에 아주 구체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켈러의 이러한 구약 읽기를 신앙 형성의 모방 원리(mimetic principle of Christian formation)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비록 켈러가 이 책에서는 이런 자신의 원리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지 않습니다만, 그의 왕의 십자가 나 설교에서 이런 면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기에, 7월에 하게 될 저의 강의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사사기에서 논쟁이 될 만한 부분들, 예를 들면 여성 사사의 문제를 여성 목회자 안수의 문제로 연결시키면서도 목회자를 제사장이라고 이해하면서 제사장직이 여성에게 주어진 적이 없다고 해설하면서 여성 안수를 부정하는 것은 조금 비약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특별히 신약의 만인 제사장론을 고려하면, 목회자직을 제사장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왜 켈러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할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만큼 실소를 금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분입니다. 자신이 속한 PCA 교단이 여성 안수를 반대하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일 수 있겠습니다만, 평소에는 굉장히 논리적인 켈러가 여성 안수 반대를 위해서 제사장 직과 목회자 직을 동일 선상에 놓고 이해한다는 것은 글쎄요.
또한 성전(holy war)의 문제를 뒷 부분에서만 짤막하게 다룬 것은 조금 부족하다는 감이 들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다루면서 치열하게 논증하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책은 언급한대로 우상을 이해하고 분별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기에 가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독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