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잇감을 삼자

우리는 모두 크고 작게는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들이다-R. Glenn Ball과 Darrell Puls의 먹잇감을 삼자(Let Us Prey)

 “’정상적 인간’이란 사실 평균적인 의미에서 정상일 뿐이다. 그의 자아는 여기저기에서 크게 또는 작게 정신병자의 자아와 비슷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서평자는 인간 심리나 내면을 분석하는 책들을 좋아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욕구,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신념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 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내면에 대한 일종의 메타인지(인지 과정에 대해서 인지하는 능력)를 제공해 준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이 책 [먹잇감을 삼자(Let Us Prey)]를 처음 집어 들었을 때 사실 나의 내면에 대해서 뭔가 알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은 딱히 없었습니다. 책이 나르시시스트들에 대한 분석서이고, 더군다나 교회라는 맥락 속에서 나르시시스트 목회자들이 얼마나 활개를 치고 다니는지에 대한 상황 분석과 함께 어떻게 하면 교회와 신앙 공동체가 나르시시스트 목회자들에게 당할지도 모를 피해를 예방할지, 또는 이미 피해를 당한 교회가 있다면 그 피해 때문에 생긴 상처로부터 어떻게 치유를 경험할지를 다룬 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목회자도 아니며, 나르시시스트는 더군다나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심리나 내면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교회에 대한 얘기라는 점 때문에 이 책을 펼쳐 들긴 했지만, 책에서 나 자신의 얘기를 발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르시시스트들은 나하고는 다른 사람들, 내가 공감하기에는 너무 심리적으로 이상한(?) 사람들이니까 내 내면을 성찰하거나 할 얘기는 별로 없을거야’라고 암묵적으로 생각하면서 너무 나 자신을 착한 존재로, 나르시시스트들은 나하고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나의 편견을 보기 좋게 날려 주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 또한 나르시시스트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며, 사실 내 주변에는 모르긴 몰라도 나르시시스트이지만, 그런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점이었습니다. (책은 여러 군데에서 우리 모두 나르시시스트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나르시시스트적인 면을 많이 성찰하게 되었고, 또 책의 원래 목적인 교회 안에서의 나르시시스트 목회자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이 책이 논의를 펼치는 맥락이 교회이긴 하지만, 교회 또한 다른 여타의 기관이나 단체들과 똑같이 흠많은 사람들이 모인 단체일 뿐이라는 점에서 아마 교회 바깥의 다른 단체나 기관, 예를 들면 학교나 기업, 비영리 단체 등등에서 나르시시스트들의 활동에 대해서 배우는 데도 꽤나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서평에서는 여러분과 그런 점에 대해서 나눠보려고 합니다.

우선 책은 나르시시스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들의 특성을 밝힙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 전제해야 하는 점은, 서평자가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나르시시스트적인 성향과 치료가 필요한 나르시시스트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냐고요? 저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특성들이 고정적이고, 상황 적응적이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기능하는데 심각한 폐해를 끼치거나 그렇게 될 만한 원인 요소를 만들어 낼 때”(46) 이런 이들은 치료가 필요한 나르시시스트들이라고 진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 또한 많은 목회자들의 경우 나르시시스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성향이 다른 이들을 이용해서 자기 유익을 추구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의 감정이나 피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게까지 만들지는 않습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저자들에 의하면, 나르시시스트의 주된 존재 모드는 자기과장감(grandiosity)과 취약성(vulnerability)입니다. 자기 과장감은 나르시시스트들로 하여금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완벽한 존재로 표현하게 만듭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누구보다도 지적으로 우월하며,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지고자 합니다. 만약 그가 권력을 가장 많이 가지지 못했다면 그는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이들과 자신이 특별한 친분 관계에 있다는 점을 자랑합니다 (59). 그들이 권력을 가진 이들과 자신이 특별한 친분 관계에 있다는 점을 드러내놓고 공공연히 자랑하는 까닭은 궁극적으로는 권력을 가진 이들을 누르고 자신들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함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르시시스트들은 하나님조차도 자신들의 경쟁자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31). (개인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최근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켰던 전 모 목사의 발언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했던.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의 내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비록 확실하게 확증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그가 나르시시스트일 확률이 높다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들의 주요한 존재 모드가 이런 자기과장감만은 아닙니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들의 내면 깊이 이미 자신에 대한 깊은 환멸과 수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많은 연구가 보고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밝힙니다 (32). 이런 자신에 대한 깊은 환멸과 수치는 어렸을 적 경험한 것들, 특별히 부모님이나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즉 어렸을 때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 밑에서 아무런 인정이나 애정을 제대로 된 방식으로 누리면서 자라지 못한 아이들이 나르시시스트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은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사랑과 인정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되면서 본능적인 방어 수단으로서 감정을 느끼는 부분을 모두 차단시켜 버리고, 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들의 인정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깊은 확신에서 벗어나기 너무 어려워하게 된다는 겁니다 (2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누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여전히 남아서, 비록 자신 안의 깊은 자기 환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적으로는 그런 자기 환멸을 완벽하게 감추고 권력과 인정을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들은 모두 깊은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며, 그들의 삶의 기본 모드인 자기 과장감과 취약성은 모두 자신들에 대한 깊은 수치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가치 없는 존재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수치심은, 더 깊은 자기 환멸을 낳는 반면 (취약성), 그 수치를 덮기 위해서 외적으로는 계속해서 자기를 과시하고 사람들을 조종하면서 사는게 (자기과장감) 그들의 삶의 기본 모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점은, 나르시시스트들은 바로 이런 까닭에 자기 스스로와의 연결이 끊어진 존재들이며, 특히나 자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아니 느끼긴 하지만 감정의 스펙트럼이 아주 제한적인 사람들입니다. 수치심에 대한 저명한 저자인 브레네 브라운이 이미 얘기했듯이, 자기 감정의 스펙트럼이 좁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감정 또한 느끼지 못하는데, 이 책의 저자들 또한 그런 부분을 동일하게 지적했습니다. 특별히 나르시시스트들은 감정 포비아 (emotion-phobia)를 가지고 있다는 지적이 아주 날카로우면서도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58). 감정 포비아란, 다른 이들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이미 감정을 느끼는 능력을 스스로 페쇄해 버렸지만, 그나마 남아 있는 감정 기능이 다른 이들의 아픔이나 고통을 보고 공감하려고 할 때, 그조차도 스스로 닫아버리고 아예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존재로 스스로를 만들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즉 나르시시스트들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공감이란, “다른 이들의 감정을 총체적으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인데, 만약 나르시시스트들이 목회자가 될 경우 다른 이들의 감정을 마치 자신도 느끼는 것처럼 흉내낼 수는 있는 반면, 절대로 그런 감정을 느끼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이런 흉내냄 또한 오직 자신이 그런 흉내냄을 통해서 더 많은 권력과 인정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인식할 때에만 나타난다고 합니다. 서평자가 이 지점에서 상당히 흥미롭게 느꼈던 부분은, 나르시시스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방”할 수 있는 능력은 탁월하다는 점입니다. 즉 나르시시스트들도 다른 이들이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는 말이긴 한데, 그들에게는 다른 이들이 느끼는 그런 감정적 스펙트럼이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가진 기계나 로봇이 인간의 감정을 보고 그 감정에 동화되서 함께 그 감정을 느끼는 대신, 그 감정을 수치화 혹은 객관화해서 인식하고는, 그런 데이터를 가지고 오직 자기 권력과 인정을 더 키우는데 쓰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한달까요. 뭔가 굉장히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책은 이렇게 나르시시스트들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들을 상당히 통찰력 있는 방식으로 나눈 후에, 실제 사례들을 저자들 개인의 경험에 비추어서 제시합니다. 이런 부분도 실제 교회 사역에서 나르시시스트적인 목회자가 얼마나 교회 전체에 큰 피해를 남기는지를 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어서 참 좋았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글렌(Glenn)의 경우, 메리 제인(Mary Jane)이라는, 자신이 후임으로 가게 된 교회의 이전 담임 목회자의 얘기를 통해서 나르시시스트 목회자의 폐해를 설득력 있게 전합니다. 글렌에 의하면, 메리 제인은 자신이 부임한 교회가 장로교회 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오순절적인 신앙을 강요했고, 그런 강요에 맞서서 저항했던 신자들을 모두 내쫓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신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자기의 방식에 맞출 것을 강요하면서, 자신만이 영적으로 온전하고 강인한 유일한 권위자이며, 교회의 다른 모든 신자들은 모두 부족하고 약하며, 따라서 자신을 의지해야 한다고 세뇌시킴으로써, 남은 신자들이 모두 아주 의존적인 존재가 되게 해버렸다고 폭로합니다 (79-82).

비록 이 책이 미국의 교회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긴 하지만, 또 하나 흥미로웠던 지점은 한인 이민 교회에 대한 사례 또한 책이 제시하고 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한인 이민 교회 문화가 목회자에 대한 심각하리만치 이상적인 기대치를 세워놓고, 거기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혹은 부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경우) 가차없이 비판하고 심지어 강제로 사임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지만, 한국 목회자들의 경우 이루어 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문화적 기대치-아무런 약점이나 흠이 없는 완벽한 목회자상-를 충족해야 한다고 강요받게 됩니다. 이런 현실은 건강한 목회자 후보생들로 하여금 목회 현장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반면, 건강하지 않은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목회자 후보생들, 예를 들면 나르시시스트들을 끌어 당기게 되고, 이런 목회자 후보생들은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모습을 회중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나르시시스트로서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다른 이들의 칭송, 권력, 조종 등을 누립니다”(98).

모든 한인 이민 교회 목회자들이 이렇지는 않을 겁니다만, 적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한인 이민 교회의 문화가 나르시시스트 목회자들이 ‘서식’하기에 상당히 좋은 문화인 것은 맞다는 점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나르시시스트 목회자들을 치료하는 건 가능할까요? 저자들은 나르시시즘이라는 병 자체가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병이라는 전제를 먼저 하긴 합니다만, 아주 드문 경우, 나르시시스트 목회자들 중에 자신의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닌, 나르시시즘에 동반하는 여러가지 증상들 (공포나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그런 면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 상담을 받거나 치료사를 찾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나르시시스트 목회자들이 이런 증상의 치료를 위해서 상담사나 치료사와 깊은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만 된다면 (사실 확률적으로 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치료의 가능성이 그나마 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자들의 제안은 나르시시즘 목회자가 사역하는 교회에 출석하는 일은 가능하면 피해야 하며, 일단 교회의 목회자가 계속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며, 권력을 전횡적으로 휘두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 온 힘을 기울이며, 더 나아가서 그를 위해서 사람들을 마구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지체하지 말고 그 교회를 떠나라고 조언합니다. 언제 나와 내 가족이 나르시시스트 목회자의 먹잇감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은 이 문제를 아예 뿌리부터 해결하려면 교회 차원이 아니라 신학교와 교단 차원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신학교 안에, 교단의 목회자 양성 시스템 안에 나르시시스트를 필터링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며, 애초에 나르시시스트로 진단받은 목회자 후보생들을 미리 걸러내든지, 치료를 받게 하든지 하는 방식으로 신학교를 운영해야 이후에 발생할 비극적인 일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175) 여러 면에서 공감가는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의 서두에서 밝힌 대로, 서평자는 이 책을 통해서 서평자 자신의 나르시시스트적인 성향을 성찰할 수 있었던 면이 참 좋았습니다. 프로이트가 말한대로, 우리 모두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정신병자와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성취 지향적인 사람의 경우, 다른 이들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 상태에 대해서도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직업적 성공을 통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자신이 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관계는 단지 내가 바깥에 나가서 직업 현장에서 성공함으로써 물질적 풍요를 가족에게 누리게 해주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거면 충분하지, 뭘 더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나르시시스트적인 성향이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러 면에서 나르시시스트들은 우리와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최악이 안타까운 가족사를 통해서 드러나게 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면에서 좀 더 알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적극 권장합니다. 서평자는 앞으로도 이렇게 인간을 이해하고 내면을 성찰하게 해주는 책들을 계속 읽어냄으로써 여러분들이 공감할 뿐만 아니라 배움의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서평을 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브레네 브라운이 수치심과 취약성에 관한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리더십에 대해서 다룬 리더의 용기(Dare to Lead)를 서평합니다. 감사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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