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구원은 몸의 구원일 수 밖에 없는가?
오늘은 좀 흥미로운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글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구원이 몸의 구원일 수밖에 없는지에 관해서 생각했던 것들을 좀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흔히들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는다고 말합니다.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드러나느냐의 문제가 될 겁니다.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믿음은 항상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야고보 사도의 다음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4)
야고보 사도는 이 구절에서 믿음의 시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이 무엇일까요. 야고보 사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믿음의 시련인지 여기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시련이 가져오는 결과에 관해서 그는 누구보다도 명확합니다. 바로 “온전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를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 우리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한계 상황에 다다를 때에야 우리는 우리의 입의 고백이나 우리의 생각의 진실함이 때로는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께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신만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마 26:35)
하지만 바로 몇 구절 아래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정말 믿는 것이 자신의 입의 고백과는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마 26:74)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정말 확신을 가지고 고백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의 고백이 사실 자신이 정말로 믿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마 26:75) 하고 맙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하는 믿음의 시련이란 이런 경험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진정성이 곧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과 동일하다는 착각을 할 때, 이런 믿음의 시련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자기 기만을 고발하고 폭로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다시 겸손하게 합니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우리가 정말 믿는 것은 우리의 입의 고백으로, 혹은 우리의 생각의 진실함을 통해서 드러나기보다는, 항상 우리의 몸이 움직이는 방향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성경이 일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1장 후반부에서 진짜 믿음은 곧 실천으로 이끄는 믿음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 1:21-27)
실천하는 믿음은 항상 몸의 실천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아니고는 우리가 무언가를 실천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몸은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을 파고들어서 우리가 믿는 것들을 형성하는 마력을 가진 도구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바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사람의 몸에 파고 들어서 사람의 기억, 느낌, 감정, 욕구, 관계, 그 밖에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과 관련된 요소들에 영향을 끼칩니다. 정성국 교수가 자신의 책 묵상과 해석에서 이야기의 마력에 관해서 하는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구나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면서, 우리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어떤 이야기들은 사람들을 휘어잡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조그만 시골 학교에서 삶으로 써내려가는 이야기를 보고 나는 선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등장하는 최영신의 이야기를 읽고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단다. 이야기가 가치를 전수하고 메시지를 퍼뜨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묵상과 해석, 199쪽)
정성국 교수의 자전적 고백은 제가 좋아하는 팀 켈러 목사의 고백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납니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의 행동이란 ‘몸으로 구현해 내는 내러티브’라고 주장한다. 저마다 삶의 의미를 주는 정신세계의 이야기를 살아 내고 있다. 환경을 지키자는 등의 대의를 실현하려는 이야기든지, 불리한 사회적 신분과 기대를 딛고 일어서서 성공하려는 갈망과 씨름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또는 한 가정을 억압받는 상황에서 끌어내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자유와 평등에 관한 내용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남들의 편견에 저항해서 저만의 성적,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해 가는 사연일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참한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거라고 굳게 믿는 커다란 이야기 속으로 자신을 끌고 들어간다. (『일과 영성』, 196-197)
켈러 목사는 자신의 [일과 영성]에서 저명한 철학자 알라스데어 매킨타이어를 인용하면서 몸과 내러티브 사이의 필연적이고 불가분적인 관계를 잘 설명합니다. 매킨타이어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우리 삶의 내러티브, 즉 우리가 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를 우리의 몸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구현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왜일까요.
좀 부정적인 얘기일 수 있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 겪은 기분 나쁜 경험은 우리의 기억에 남고,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그 일을 경험했던 순간에 느꼈던 것들, 깨닫게 된 것들, 결심하게 된 것들은 모두 다시 살아서 우리 몸에 돌아옵니다. 그렇게 살아서 돌아오는 느낌, 감각, 감정, 욕구, 결심, 의지 등등은 이미 우리 몸에 새겨진 것들이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지배하며,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의 몸으로 우리가 행하는 것들은 우리가 정말 무엇을 믿는지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지배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이야기가 될 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야기가 우리의 감각을 지배하고, 우리의 느낌을 지배하며, 우리의 욕구와 감각,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는 일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했던 믿음의 실천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야기가 우리의 몸에 새겨질 때에만 우리가 정말 믿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이며, 그렇게 될 때에만 우리의 믿음이 구원 받는 믿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통한 구원은 항상, 언제나 변함없이 몸의 구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들은 항상 우리 몸에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내려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가 우리가 무엇을 통해서, 혹은 누구를 통해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지를 결정 짓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항상 몸의 구원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의 구원이 항상 몸의 구원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살아내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매순간 순간마다, 우리가 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이야기에서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점검해야 한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정말로 살아내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구원은 몸의 구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가치관, 우리가 정말로 옳다고 믿는 것, 정말로 따르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한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몸의 구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몸을 입고 오셔서 몸으로 죽으신 까닭 또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믿고 따르시는 바,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온전히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고, 그런 삶이 온전한 인간의 삶이라는 점을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 예수께서 살아내셨던 것만큼 완벽해야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고, 또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완벽한 믿음을 가지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일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그 길로 걸어가도록 촉구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저와 여러분의 몸이 움직이는 길이, 우리가 살아내는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라는 것을 점저 더 드러내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