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믿음에 관한 생각 나눔
하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믿음’이라는 말은 어쩌면 신앙 생활 속에서 가장 오해를 많이 사는 단어인 동시에 가장 오용되는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저 또한 신앙 생활을 해오면서 믿음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최근 4-5년 사이에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믿음에 대해서 오랜 기간 혼동하고 헛갈려 했던 지점은 팀 켈러를 공부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켈러를 공부하기 전에는 믿음에 대해서 그다지 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의 표현이 믿음이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무언가를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니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간절히 구하자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특히나 믿음에 대한 누가복음 11:5-8같은 말씀들은 성찰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았던 저에게 믿음이 개인의 의지나 노력과 똑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강화시키는데 일조했습니다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눅 11:5-8)
물론 이런 저의 이해는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읽기였습니다. 이 구절은 주기도문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라는 맥락 속에서 보아야 하며, 이 구절의 후반부에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 성령이심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단지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조금 더 기독교적으로 바꾼 것일 뿐이라는 저의 오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둘: 복음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팀 켈러의 도전)
믿음이 그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의 일환일 뿐이다라는 저의 성찰 없는 생각은 팀 켈러를 만나서 무참히 깨집니다. 켈러는 우상을 다룬 그의 책인 [내가 만든 신]에서 켈러는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믿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설득력 있으면서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켈러가 권력의 우상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풀어낸 다음의 예시는 우리가 믿는다는 것,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지, 얼마나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는 일을 요구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내가 대학 시절에 알았던 제임스는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여색을 밝히기로 유명했다. 매번 그는 여자를 유혹해 일단 잠자리를 갖고 나면 이내 흥미를 잃고 헤어졌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는 성적 일탈을 금방 끊고 기독교 사역에 열중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들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
게 대해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 옮겨진 게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하사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런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침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고 나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암논과 다말). 그가 기독교 사역에 들어서려 한 것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옳고 자기에게 진리가 있다는 그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인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 우상은 꼭꼭 숨어 있었다.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제임스는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인 이후 스스로 복음을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복음을 믿는다고 스스로에 대해서 믿었습니다. 하지만 제임스가 정말 믿고 따랐던 것은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 욕구였다는 것을 켈러는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켈러는 자신의 모든 저작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얕고 자기 성찰이 없는지를 폭로하며,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깊어지거나 강해질 수 없다는 명확한 성경의 진리를 계속해서 가르칩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얼마나 믿을 만하신 분인지, 그 분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우리가 점점 더 깨달아 갈 때에만 깊어지고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라는 점을 켈러는 저에게 확실히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저의 생각은 무참히 깨졌고, 이후 저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의지나 노력을 사용해서 성장하게 하거나 성숙하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강한 신념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나서 성경을 읽는데 제 깨달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을 만났습니다. 바로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마가복음 5장의 혈루병 걸린 여자의 믿음이었습니다.
셋: 믿음은 시선의 문제이며, 한 사람의 믿음의 시선이 자신의 의지나 노력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은 그런 믿음의 순간을 옳게 보시며 좋게 보신다.
24이에 그와 함께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막 5:24-34)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의 믿음은 켈러가 저에게 가르쳐 준 믿음에 대한 깨달음, 즉 믿음이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기 성찰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며, 더 나아가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오직 하나님이 얼마나 믿을 만한 분인지를 알게 될 때에만 일어난다는 저의 깨달음에 큰 도전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자기 성찰을 하고 있지도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의 바짓 가랑이를 붙잡았을 뿐이었고, 그렇게 여자가 예수님을 붙잡았던 것이 믿음이라고 하기에는 제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기 이전에 제가 생각했던, 개인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의지와 노력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과 너무나 유사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제가 이 여자의 믿음을 왜 예수께서 병이 나을 만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는지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까닭은,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발휘해서 하나님을 붙잡을 때 거의 모든 경우에 그렇게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된 결과를 자신의 믿음 때문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교회 문화 안에는 믿음 또한 구원의 조건인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 즉 믿음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의 일환이라면, 믿음을 통해서 얻는 구원이 행위 구원과 다를게 없지 않느냐는 의문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의문 제기에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제가 켈러에게 배운 믿음에 대한 통찰이 정말 귀하게 다가왔던 까닭 또한 믿음을 통해서 얻는 구원이라는 말이 믿음을 행위의 일환으로 보게 만들지 않느냐는 의심에 대해서 이미 설명한 대로 켈러가 상당히 만족할 만한 답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믿음이 (제가 보기에는)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의 일환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예수께서 이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더더군다나 이 여자의 믿음 때문에 이 여자가 나음을 얻었다고 말씀하기까지 하셨다? 이 여자가 과연 자기 성찰의 시간을 통해서 자신이 사실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믿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을까? 아마 아닐 겁니다. 이 여자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까? 그것도 아마 아닐 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이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일까? 이게 저에게는 상당한 기간 동안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왜 예수께서 이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셨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자의 믿음은 비록 하나님 앞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의 일환이었을지언정, 적어도 그 믿음의 순간에 이 여자는 자신의 시선을 자신이 믿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실 거라고는 전혀 여기지 않았고 (즉 자신의 믿음을 자신의 크레딧으로 삼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모든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했던 것입니다. 즉 믿음이 아무 성찰이 없어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어도, 또 믿음을 자기 노력이나 의지의 표현으로 드러낸다고 해도, 적어도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만이 자신을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그 사실에 모든 것을 건다면,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잘 믿는지 따위는 전혀 생각할 겨를 조차도 없다면, 바로 그런 믿음을 예수께서는 살리는 믿음, 낫게 하는 믿음, 회복시키는 믿음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칫 잘못 하면 행위의 일환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행위 또한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 마음의 시선이 오직 사람을 돕고 사랑하는 것에 온 집중을 했던 행위였다면, 그 행위는 구원을 얻는 믿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예수께서 찾으시는 것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노력하고 의지를 불살랐는지를 주장하는 것 따위는 아무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믿음, 그런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는 믿음이 성숙하지 않아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믿음이 성숙하기를 바라시는 건 당연할 겁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믿음에 관한 생각의 정-반-합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1) 믿음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노력과 의지의 일환이라고 보았지만, 2) 그런 믿음이 얼마나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하는지,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성 또한 깨닫게 되었고, 또 마지막으로 3) 믿음이 행위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또 행위가 구원 얻는 믿음의 일환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믿는 사람의 마음의 시선이 자신의 믿음의 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향해 있느냐 아니면 믿음의 대상을 정말로 절실하게 붙잡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무시하거나 가벼이 보시는 분이 아니시며, 작고 약한 믿음이라도 귀하게 보시고 기꺼이 보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배웁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