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이 교회에 올 때

나르시시스트들(narcissist)에게도 희망은 있다—척 드그로우트(Chuck DeGroat)의 나르시시즘이 교회에 올 때(When Narcissism Comes to Church)

 “’정상적 인간’이란 사실 평균적인 의미에서 정상일 뿐이다. 그의 자아는 여기저기에서 크게 또는 작게 정신병자의 자아와 비슷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척 드그로우트(Chuck DeGroat)의 나르시시즘이 교회에 올 때(When Narcissism Comes to Church)를 읽었습니다. 드그로우트는 미시간 주 홀란드라는 작은 도시에 위치한 화란 개혁주의 계열의 신학교인 웨스턴 신학교에서 목회 상담을 가르치고 있으며, 또 상담 치료사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르시시즘이 교회에 올 때(When Narcissism Comes to Church)는 사람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나르시시즘에 관한 첫번째 책인 먹잇감을 삼자(Let Us Prey)의 서평을 쓰면서 역시 인용했던 프로이트의 격언은 이번에도 역시 주효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냐고요? 두가지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1. 우리 안에는 모두 나르시시스트가 살고 있다.
    2. 정신병적으로 나르시시스트로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구제 불능이거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악의 화신이 아니다

이 두가지 교훈은 저자인 드그로우트가 책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입니다. 그는 정신병적으로 나르시시스트라고 진단을 받은 사람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지나친 선긋기 혹은 구분을 경계합니다. 즉 이분법적으로 “그들”과 “우리”를 나눠놓고, 우리는 모두 정상이고, 그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위험 대상들이다라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드그로우트는 우리 안에도 그들이 있으며, 그들 안에도 우리가 있다는 점을 좀 더 보여주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드그로우트는 그들 또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비단 나르시시스트들 뿐만이 아닐 겁니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 동영상 사이트인 웰컴투 비디오의 운영자였던 손정우, N번방 사건의 주범인 조주빈, 2008년 초등학생을 신체 일부가 불구가 될 정도로 성폭행 한 후 여전히 발뺌하고 있는 조두순. 우리는 이런 이들에게서 인간성의 끝을 보며, 그래서 절망합니다. 이들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드그로우트는 나르시시스트들만큼이나 다른 모든 인간들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도 구원이 임할 수 있고, 선한 삶을 살아갈 여지가 있다는 점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실 드그로우트의 이런 신념에 동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드그로우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서서히 감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리치(Richie)는 중학교 시절에 이미 아동 포르노를 시청하기 시작했고, 스물 다섯살 무렵에는 자신이 섬겼던 교회의 중고등부에 출석하던 남학생들 수명을 그루밍(grooming)에서 성적으로 학대했습니다. 그리고 리치가 상담 치료사인 드그로우트를 만났을 때, 리치는 이미 감옥에서 15년을 살고 나온 마흔살의 죄수였습니다. 리치는 드그로우트와의 상담을 통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리치의 분노와 수치의 이야기는 작은 소년에 관한 것이었다. 그 소년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고, 절망적으로 두려웠으며, 깊은 수치심에 싸여 있었다. (자신이 고속도로 휴게소의 트럭 운전사 전용 남성 샤워실에서 성추행과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트럭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하기가 두려웠던 리치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켰고, 강하고 무감정한 사람이 되어갔다. 리치가 고등학생 시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치는 사랑과 용서받음을 느꼈고, 자신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낫지 않았다. 구원을 위한 기도가 마술처럼 우리의 어두운 면을 치유하는 것은 아니다. 리치는 교회에서 중고등부 담당 파트타임 사역자로 일하게 되었음에도 자신이 여전히 계속해서 소년들에게 끌린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수치심이 너무나 컸다. 동시에 그의 분노는 스스로를 향했다. “너는 너무 더럽고, 아픈 사람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르시시즘이 교회에 올 때, 96-97쪽)

리치는 어린 시절 성인 남성들에게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고, 그 고통을 스스로 처리하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지 처리해야 했습니다. 드그로우트에 의하면, 많은 나르시시스트들이 이런 식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의식 너머로 밀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그 최선을 다하는 과정은 결국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투영시키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드그로우트의 설명을 다시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외적으로 리치는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약삭빠른 면이 있는, 열정적인 찬양 인도자였고, 그런 면이 어린 소년들이 리치를 동경하게 만들었으며, 리치는 바로 그런 소년들의 동경과 관심을 통해서 자신의 에고를 채워나갔다. 내적으로 리치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작은 소년이었고, 스스로가 가진 어둠을 무서워했다. 학대자들은 수치와 모멸감을 준다. 그들은 희생자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식 이면에 존재하는 것을 외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칼로 그음으로써 그 어둠을 피하고자 하며, 다른 이들은 마약을 복용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들을 영적인 무적으로 꾸밈으로써 그렇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폭력을 사용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느끼는 수치심을 깊이 묻어버리고, 그 수치심의 근원이 되었던 경험에 대한 분노를 바깥으로 쏟아 놓는다. (같은 책, 97쪽)

조두순도, 조주빈도, 그리고 손정우도, 아마 이런 식의 기억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을 감싸주고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대가인 형량을 낮추자는 말은 아닙니다. 리치의 경우 또한 스물 다섯살에 청소년들에게 그런 범죄를 저지른 이후 무려 십오년을 감옥에서 살고 난 후에야 치유의 과정이 되는 상담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최근 대한민국의 성범죄자들에 대한 형량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은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를 정당하게 치렀다면, 그 이후에는 그들 또한 다시는 그런 범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 모두가 그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리실 정도로 절망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드그로우트의 다음 말이 그래도 조금 이해가 갔습니다.

내가 가지는 희망은, 그들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단지 그들의 범죄에 대한 반응 차원이 아니라 예방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우리가 계속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같은 책, 97쪽)

물론 이런 희망이 미래가 아주 긍정적일 거라는 예측에 기반한 것은 아닙니다. 드그로우트는 특히 교회 개척자들 중에 나르시시스트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왜 그런지는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그게 책을 읽으면서 좀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교회 개척을 하기로 결심한 커플인 재크(Zak)와 그의 아내 안드레아(Andrea)는 안타깝게도 재크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서 비극을 겪어야 했던 경우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재크가 안드레아를 심하게 비난하고, 또 안드레아의 상처를 전혀 개의치 않는 성향을 보이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상담 치료를 요청했고, 드그로우트가 이들 커플의 상담을 맡게 됩니다. 검사 결과 재크는 나르시시즘적 성향이 심각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드그로우트는 이 커플을 교회 개척자로 임명하려는 교단 위원회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드그로우트의 판단은 묵살당했고, 이들은 교회 개척자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을 묻어버린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재크는 교회 개척 과정 내내 아내인 안드레아를 여러 방식으로 학대했고, 마침내 안드레아는 교회 개척 사역을 시작한지 3년만에 재크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점은, 재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을 돌아보고 치유를 받고자 하지 않았다는 점이죠. 이런 절망적인 사례는 사실 리치의 경우처럼 희망적인 사례보다 압도적으로 많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아픈 기억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어 기제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이미 그 방어 기제에 둘러 싸인 자신, 여러 성취를 이룬 자신, 사람들이 인정하는 자신이 진짜 자신이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오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의 모습, 어린 시절 학대의 경험을 다시 떠올려야 하는 자신, 그 고통을 매번 통과해야 하는 자신을 만나게 되고, 그건 그들에게 죽기보다 싫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단지 나르시시스트들만의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다는게 드그로우트가 힘주어 강조하는 부분이고, 저 또한 깊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채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물론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충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이런 면에서의 결핍을 덜 느끼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구를 덜 표현하게 될 겁니다. 드그로우트에 의하면, 나르시시스트들이란, 어린 시절에 이렇게 충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성장하면서, 아예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나르시시스트들은 겉으로 보면 자신을 엄청나게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실상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역설적인 사실이 말이 됩니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놓아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욕구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 자아를 만들어내고, 일반인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 거짓 자아를 통해서 다른 이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또한 그 거짓 자아를 통해서 권력을 누리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물론 일반인들도 이런 거짓 자아를 만들어 냅니다. 저 자신을 봐도 이런 거짓 자아를 만들어내서 나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꾸밀 때가 많습니다. 내가 사실 별볼일 없는,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기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스트들이 일반인들과 다른 점은 딱 두가지뿐입니다. 우선 그들은 그저 어린 시절에 충분한 사랑을 거의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들이며, 두번째로 그에 대한 방책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 자아를 성찰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거짓 자아가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죽음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일반인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며, 비록 거짓 자아를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그 거짓 자아를 벗을 용기를 가질 수 있고, 또 자신들이 만들어낸 거짓 자아가 거짓 자아라는 걸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나르시시스트들과 일반인들이 엄격하게 구분될 여지가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거의 없어 보입니다. 다만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조두순이거나, 조주빈이거나, 혹은 손정우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물론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하는 점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법이 정한 합당한 형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겁니다.)

이런 점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포기하지 않으시며, 따라서 우리도 아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아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 혹은 정말 대하기가 어려운, 그야말로 구제불능들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드그로우트의 이 책은 지난 서평을 통해서 읽었던 먹잇감을 삼자(Let Us Prey)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확증해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돋보였던 책이었습니다. 책의 페이지 수도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약 180쪽 정도로, 6-7시간 정도 집중하면 읽을 수 있는 분량이지만, 나르시시즘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가지고자 하는 분들에게, 또 나르시시스트를 통해서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성찰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정말 도움이 될 만한 책입니다. 그런 면에서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12월에 제가 들고 찾아올 나르시시즘 시리즈의 마지막 책은 이 분야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토퍼 래쉬의 나르시시즘의 문화(The Culture of Narcissism)입니다. 그 책 또한 많은 기대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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