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남에 관하여

태어남과 성장에 관한 기독교 신앙의 지혜- 켈러의 태어남에 관하여 (On Birth)

팀 켈러가 이번에 얇은 책 3권을 한 박스에 담아서 출간한 시리즈의 주제는 하나님을 만나는 법(how to find God)입니다. 켈러는 자신의 와이프인 캐시 켈러와 함께 지난 목회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인생의 세가지 순간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그 세가지 순간은 인생의 큰 변화가 일어나는 때이며, 이제껏 살아오던 삶의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삶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는 순간들입니다. 싱글로 살던 사람은 결혼하게 되면 그런 변화를 겪습니다. 둘만의 생활을 만끽하던 부부는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더 이상 이전 방식으로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삶을 거의 다 마칠 때가 되면 사람들에게는 이제껏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서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자녀가 태어날 때, 결혼할 때,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때라는 세가지 인생의 순간들이 켈러에 의하면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확률이 가장 높은 때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우리의 관점에서 완벽하게 세워갈 때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싶으시다가, 어떤 이유로든지 우리의 인생에 기존의 삶의 방식으로는 이상 설명할 없는 구멍이 생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주로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로 출간된 얇은 책 3권은 각각 태어남에 관해서, 결혼에 관해서, 그리고 죽음에 관해서 다룹니다. 각각의 책의 제목도 이 세가지 주제와 동일합니다. 이 서평은 그 세 권의 책들 중에서 태어남에 관하여(On Birth)에 대한 서평입니다.

켈러는 태어남에 관하여(On Birth)를 크게 육체적 출생(physical birth)과 영적 거듭남(being born again)이라는 두가지 주제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켈러가 이 두 종류의 태어남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에 대해서 책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연결 고리를 찾아나간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도 영적인 거듭남을 육체적 출생에 비유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을 보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나눈 거듭남에 관한 대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런 연결은 상당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거듭남이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려고 할 때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영적인 거듭남 또한 일종의 출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나서 성장해온 순간과 유사한 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냥 거듭남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워집니다. 그래서 이 서평에서는 1) 육체적 태어남과 성장에 관해서 한 부분을 할애하고, 또 2) 영적인 거듭남과 성장에 관해서 한 부분을 할애해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서평을 써보고자 합니다. 사실 책은 크게 1. 육체적 태어남과 성장; 2. 영적인 거듭남; 3. 영적인 성장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2와 3이 결국 1과의 유사성을 통해서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2, 3 두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다루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육체적 태어남과 성장에 관하여

켈러는 육체적 태어남과 성장에 관해서 먼저 다룹니다. 먼저 태어남에 관해서입니다. 켈러가 이 문제를 접근하는 관점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부모들이 아이를 키우는데 굉장한 시간과 에너지의 희생이 요구된다는 점입니다. 켈러는 현대 문화의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이 현대인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이 즐기는 것들을 쉽사리 희생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부모가 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켈러의 통찰은 그가 바라보는 현대 문화가 그 문화의 구성원들을 특정한 모습의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형성적 능력(formative power)입니다. 켈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We absorb the reigning narratives of the culture through commercials, movies and TV episodes, social media, and innumerable other forms—“You have to be true to yourself”; “You have to do what makes you happy and not sacrifice it”; “You should be free to live as you choose as long as you harm no one else”… (20-21)

(우리는 광고를 통해서, 영화를 통해서, TV드라마를 통해서, SNS를 통해서, 그리고 수많은 다른 형태를 통해서 문화의 지배적 내러티브를 빨아들이듯이 받아들입니다. “스스로에게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해야 하고, 스스로를 희생하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원하는대로 살 수 있어야 한다”)  (20-21)

이런 생각들은 딱히 어떤 과학적이고 합리적 근거를 가진 생각들이 아니며,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화가 좋게 보고, 그 문화의 구성원들에게 주입하는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켈러가 말한대로, 이런 생각들은 명령의 형태로 우리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접하는 드라마와 영화, SNS 등을 통해서 우리가 당연히 그런 것으로 별 의심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주입됩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여러가지 문화적 메세지들은 사람들에게 그 메세지가 좋아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게 여기는 것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아름다움이 개입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현대인들은 스스로에게 진정성을 가질 수 있는 삶,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하고 싶은대로 자유롭게 삶을 누릴 수 있는 삶, 희생할 필요가 없는 삶을 가장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들 또한 이런 메세지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실 겁니다. 이미 우리는 문화의 이런 형성적 능력의 영향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켈러는 이런 문화의 형성 능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며, 어떤 메세지가 우리에게 주입되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문화가 말하는 것들을 별 생각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녀를 키울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If you think that merely taking a child to church or sending them to a youth group once a week will be sufficient to overcome all this and form them as thoughtful Christians, you are wrong.  What will most likely happen is that inwardly their deepest habits of the heart and instinctive ways of judgment will become disconnected from the Bible stories they still publicly profess” (23).

(만약 여러분이 자녀를 일주일에 한 번 교회나 중고등부에 보내는 것만으로 문화의 이런 형성적 능력을 극복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틀렸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일어나게 될 일은 우리 아이들의 가장 깊은 마음의 습관이나 본능적인 판단 방식이 아이들이 여전히 공적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성경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23)

그러므로 정말로 아이들을 문화가 주입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서 키우고자 한다면, 문화의 형성적 능력에 맞설 수 있을 만한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켈러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예를 든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어떻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될 수 있었을까?가 그가 묻는 질문입니다. 켈러가 여기서 참고하는 버지니아 대학(the University of Virignia)의 사회학자 제임스 헌터(James Hunter)의 책 인격의 죽음(the death of the character)에 의하면, 비록 현대의 공교육 제도가 여러가지 방식의 인성 교육과 인격 교육을 통해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인격과 인류를 향한 사랑을 가진 인간을 만들어내려고 하지만, 어떤 공교육적인 시도도 이제껏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공교육적인 시도는 문화가 사람을 형성하듯이 교육해야 한다는 통찰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켈러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흑인 교회라는 전방위적 공동체 속에서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이고 바람직한 삶이며,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삶인지를 스펀지 빨아들이듯이 흡수할 수 있는 문화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인격과 인성을 가진 인물로 키우고자 한다면 5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6장 본문을 통해서 켈러는 다음이 그 5가지라고 말합니다: 1. 도덕적 우주론(moral cosmology); 2. 도덕 교본(moral sourcebook); 3. 도덕 담론(moral discourse); 4. 도덕적 상상력(moral imagination); 5. 본보기 되기(modelling).

도덕적 우주론이란, 자녀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삶을 살 때 그것을 지켜보시고 기뻐하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과 우주가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기뻐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자녀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도덕 교본이란 성경을 가리킵니다. 성경의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서 올바른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도덕적 담론이란, 성경의 이야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아이들이 자신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도덕적 상상력이란, 이 모든 것들이 단지 명령이나 명제의 형태로 전달되는 대신, 현대 문화가 그 구성원들에게 하듯이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명령을 듣고 배운다고 그에 따라서 형성되는 존재가 아니며,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반복적으로 거부감 없이 전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 메세지가 사람의 삶에 스며들어야 그 메세지가 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 상상력에 큰 관심을 가지고 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특히나 와닿았고, 또 켈러가 말한 다섯 가지 요소를 제임스 헌터의 책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본보기 보이기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녀들에게 어떤 것이 바람직한 삶인지를 가르친다고 해도, 본보기를 보이는데 실패하면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위선자의 모습만 보게 될 뿐입니다. 이 다섯가지를 모두 아우르면서 켈러는 마지막으로 한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인물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인물들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실패하는 인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주입하는 일은 단지 아이들이 도덕적으로 완벽한 바리새인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올바른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켈러는 우리 자녀들이 신앙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 혹은 강력한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내적인 경외심과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일”(27)이라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켈러는 사람들이 형성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을 아름답게 여기느냐의 문제라는 점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영적 거듭남과 성장에 관하여

이제 켈러는 영적 거듭남의 문제를 다룹니다. 켈러는 영적 거듭남을 육체적 태어남과의 유사성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영적 거듭남이 이런 점에서 육체적 태어남과 유사한 점은 크게 두가지—영적 감각과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우선 어린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아이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고, 보는 눈과 듣는 귀, 냄새 맡는 코와 만질 수 있는 손을 갖게 되듯이, 영적 거듭남은 사람들에게 이전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해주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듣게 해주며,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차리게 해줍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켈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Jesus says you need to be born again to “see” the kingdom (verse 3)… to be spiritually alive means you can sense spiritual realities because now you have spiritual sight and taste… You had heard “God loves you” or “God is holy and just” or “God watches over you,” and you may have agreed with some of them as propositions, but now they become life-transforming realities that shape your daily life and actions.” (53-54)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절)…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영적 실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이제 영적인 시각과 미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나,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십니다”라든지, 혹은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와 같은 말들을 들어보셨을 것이고, 어쩌면 그런 명제들 가운데 몇가지에는 동의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거듭나게 되면 그런 명제들은 여러분의 일상의 삶과 행동을 형성하는 변혁적인 실재가 됩니다.” (53-54)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거듭남의 실재에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실제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를 잘 믿고 싶어서, 누구보다 예수를 믿는데 열심을 내고 싶어서 신학교에 갔지만, 사실 돌아보면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복음이 뭔지 잘 모른 채로 신학교 수업들을 듣고, 전도사로 교회에서 일했던 것 같습니다. 흥미롭게도 팀 켈러를 만나면서 그 때까지 제가 기독교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고정 관념이 완전히 깨져 버렸고, 그 이후에는 켈러가 말한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셨다는 말씀이 이전하고는 비교도 안되게 달콤하게 다가오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다는 말씀 또한 굉장히 심오하게 저의 삶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런 영적 감각이 생겼다는 말이, 단지 새로운 부담이 커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켈러가 육체적인 태어남과 성장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이 성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가 어떤 것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으며, 영적 거듭남 또한 어떤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방식이 내 삶에 이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내적인 경외심과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일”(27)이 더 많아지고 잦아지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거듭남이 매일매일 이렇게 놀라운 일들로만 가득찬 것은 아닙니다. 켈러는 영적 거듭남 또한 육체적 태어남이나 성장과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각각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적 감각은 마치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커가면서 그의 감각 또한 더 성장하듯이, 계속해서 더 성장하게 됩니다.

두번째로 영적 거듭남은 새로운 정체성을 동반합니다. 켈러가 여기서 가장 강조하는 점은 이전까지의 정체성과의 비교를 통해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The “newness,” then, of the new birth is not that all the various features of your life—your gender, nationality, social class, and so on—pass away.  Rather, none of them function any longer as your chief identity factor.  They no longer serve as your main significance and security, or as the main makers of your self-regard and self-definition.” (62)

(거듭남의 새로운 점은 당신의 삶을 이루는 모든 특징들—당신의 성별, 국적, 사회적 신분 등등—이 사라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되려, 그것들 중 무엇도 더 이상 당신을 규정짓는 주된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들은 더 이상 당신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나 안정감의 기반으로 삼는 것 혹은 당신의 자존감이나 자기 이해를 규정짓는 것으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62)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켈러는 야고보서 1:9-10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설합니다. 야고보서 1:9-10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약 1:9-10)

“but the Christian who has embraced the gospel has received a message that we are sinful and in ourselves worthy of condemnation, yet loved perfectly and unconditionally in Christ and free from condemnation (Romans 8:1). That means we always have a low position and an even greater high position in our minds at the same time.  James points out that, at various times and in various situations, it is good for Christians to dwell more on one of those truth than the other.  If you are poor and have been told all your life you are worthless, then the high position that comes with the gospel should be meditated on constantly in order to heal your soul.  But if you are successful and have been getting accolades all your life, then you should think long and often about the low position that comes with the gospel.” (66)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죄인이며 우리 자체로는 저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메세지를 받았습니다 (롬 8:1). 그 말은 우리는 항상 동시에 낮은 위치와 높은 위치에 동시에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다양한 때와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가지 진리 중 한가지를 깊이 묵상하는 일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난하며, 평생동안 여러분이 가치 없다는 말을 들어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을 낫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복음 안에서 누리는 높은 지위를 묵상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계속적으로 칭찬을 받아 왔다면, 여러분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낮은 지위에 대해서 오랫동안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66)

하지만 이런 복음의 정체성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에 대한 계속적인 묵상과 숙고를 반복적으로 이어갈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복음이 주는 높고도 낮은 정체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켈러 또한 자신이 여전히 이런 복음의 정체성을 누리는 일에 실패할 때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휴가지에서 한 패스트푸드 음식점에 들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주문을 받는 여자분이 영어를 잘 못하는 이민자였고, 순간 켈러는 자기도 모르게 “왜 저렇게 영어도 못하는 여자를 주문을 받게 한 거지”라는 불평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고 난 후 즉시 켈러는 자신이 복음의 정체성이 아닌 미국 안에서 사는, 영어가 능숙한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을 깔보았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변화는 이미 언급한대로 단지 의지적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복음의 정체성을 내 것으로 밀어 넣는 일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복음이 나를 나의 인종이나 성별, 내가 이룬 모든 성취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소식이기에, 그런 사랑을 받은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성별이나 인종, 국적, 혹은 언어를 잘하냐 못하냐의 유무,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유무로 판단하는 대신, 오직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아무 조건없이 받아들여주시고 사랑하신 그 사실 때문에 그렇게 대하는 그런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내 마음이 참으로 바라고 갈망할 때에만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켈러의 “하나님을 만나는 법” 시리즈에서 첫번째로 읽은 “태어남에 관하여”는 여러 면에서 짧지만 굉장히 꽉찬 독서 경험을 안겨준 책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이 공간에서 함께 나눈 것들만 봐도 아마 여러분 또한 거기에 충분히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제 서평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실제 켈러의 책을 집어 들고 읽게 만들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 서평을 마칩니다. 조만간 결혼에 관하여(On Marriage)의 서평으로 저는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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