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find the English version below.]
악한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C.S. Lewis는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무신론자 시절의 자신의 무신론에 대한 방어 논리에 대해서 회상합니다. 무신론자 루이스의 논리에 따르면, 이 세상과 우주가 돌아가는 모습에는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고 선하다면, 왜 우주는 그토록 냉혈한 같은, 악이 창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가? 라는 것이 루이스의 질문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세상은 불공평하며, 악은 넘쳐 흐릅니다. 악인은 융성하며, 의인은 망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사랑과 정의라고 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능할까요? 더 나아가서, 세상이 그런 곳이라면, 과연 이런 세상 속에서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울러, 하나님을 말하는 학문인 신학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또한, 결국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라면, 그리고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 계시기는 한 거라면, 적어도 그 분은 당신을 믿고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악과 고난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하시는 것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구티레에즈는 “교환의 종교”(barter religion)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에게는 그 섬김에 대한 대가로 당연히 돌아오는 배상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을 낸 것에 대한 교환적 대가로서의 무언가가 주어지는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는 반대로 고난이나 고통이 사람에게 임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며, 대개 하나님의 징벌일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티에레즈는 징벌 교리(doctrine of retribution)라고 부릅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내가 아버지한테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라고 한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욥기의 질문이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가 자신의 책 욥에 관하여 에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구티에레스는 이와 함께 자신이 처한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고난과 고통을 욥이 겪는 고난과 고통과 상치시켜서 바라봅니다. 이런 상황적 성경 묵상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신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서 돌아오는, 삶에 대한 그만큼이나 깊은 성찰입니다. 특별히 서평자는 구티에레스가 묻는 질문을 통해서 개인적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 모두에서 사랑을 통한 정의의 회복이라는 복음의 본질을 다시 한 번 보게 되었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서평에서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교환의 종교, 하나님의 무한한 요구, 그리고 복음
욥기를 다루는 구티에레즈의 관점, 특별히 “교환의 종교”의 피상성(현대적 버전으로는 조엘 오스틴으로 대표되는 “번영의 복음”이 있음)을 폭로하려는 그의 분석을 살피기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분석으로 해석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악의 상징(Symbolism of Evil)에서 예리하게 살피고 있듯이 히브리 종교에서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요구의 무한성을 참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리쾨르에 따르면, 신명기 6:4-5에 나오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무한정의 사랑을 뜻합니다. 하지만 유한한 인간이 신이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고, 지킬 것들을 허락하심으로서 그것들을 준수하는 것으로 무한한 신의 요구를 현실화시켰다고 리쾨르는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화된 요구를 지키는 것이 과연 상을 줄 만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즉, 애초부터 신이 인간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것이 상을 줄 만하기에 베푸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본질 그 자체이신 신이 아무 대가없이, 아무 조건없이 베푸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구티에레즈의 주장입니다. 물론 이 논리는그 반대에도 적용됩니다. 신이 만약 사랑의 본질이라면, 고난과 고통 또한 신비의 영역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 부분은 아마도 영원히 논란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긴 합니다만), 처벌이나 징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구티에레즈의 책 전체를 꿰뚫고 있고, 구티에레즈는 이것을 gratuitous love of God(이유 없는,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욥이 왜 처음에는 자신의 고난과 고통에서 시작해서 가난한 자들과 고난 받는 자들에게 그의 눈을 향하게 되는지가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예리하게 깨달을 만한 위치에 놓여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보았을 때, 이 대목에서 그의 남미 해방신학적 상황이 겹쳐지게 되고, 그가 왜 해방 신학의 캐치 프레이즈 격인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선호(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를 외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앞서 보았듯이, 욥기를 통해서 구티에레즈가 던지는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는, 악이 창궐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가? 였고, 여기에 대한 구티에레즈의 답은, 비록 악의 원인에 대해서, 욥 개인이 겪는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남미의 수많은 민초들이 당하는 압제에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답도 줄 수 없지만, 그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것, 그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견지에서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God-talk)은 곧 구티에레즈에게 있어서 예언자적인 언어(the language of prophecy)를 배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구약의 예언자들이 외쳤던 하나님의 사랑에 부합하는 정의의 언어를 외치고 실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구티에레즈가 욥기를 통해서 읽어내는 주된 메시지 중에 하나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예언자적인 언어와 함께 아울러서, 구티에레즈는 징벌 교리에 대해서 토론하는 욥과 욥의 친구들의 태도의 차이를 주시합니다. 구티에레즈가 볼 때, 욥의 고난은 단순히 그가 겪는 고통이 너무나 크고 견디기 어렵다는 것 뿐 아니라, 그 고난과 고통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래서 욥의 경우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본문 가운데서 보입니다만(물론 하나님은 욥기 마지막이 되어서야 욥의 친구들과 욥 사이에서 누가 옳은지 밝혀 주시고, 처음부터 마지막 전까지 욥이 그토록 간절히 대화하기를 간청함에도 아무런 응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경우 굉장히 날카롭고 정교한 신학적 논리를 갖추고 자신들의 입장을 잘 방어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하지 않습니다. 즉, 구티레에즈의 관점에서 고난과 고통 속에서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어떻게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예언자적인 언어와 함께 배워야 하는 것은 묵상의 언어(the language of contemplation)입니다. 곧 하나님과 직접 씨름하는 법, 그러한 침묵의 순간, 고통과 고난의 순간을 배우지 않고는 하나님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서평자는 복음의 본질에 깊이 접근한 구티에레즈를 발견합니다. 비록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구티에레즈와 그를 비롯한 남미 해방신학자들의 신학을 지나치게 경험 중심적일 뿐 아니라(즉 하나님 중심적이 아닌, 인간 중심적일 뿐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들의 힘으로 건설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고, 또 특정 계층(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지나치게 선호한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어떤 해방 신학자들의 경우 그러한 비판이 정당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자가 구티에레즈의 욥기 묵상을 읽으면서 보게 되는 것은 교환의 종교가 말하는 정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져 있는가에 대한 예리한 폭로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어찌하여 이유가 없는지, 또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대가를 치르는 차원이 될 수 없으며, 그저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자신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알던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과 직접 씨름하면서 체험하고 배워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교환의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복음이라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고통은 교훈을 가져다준다는 말이 일견 맞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또 고통과 고난을 겪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하나님의 뜻이 있고, 교훈이 있을거야”라고 얘기하는 것 또한 엘리바스나 빌닷, 소발, 심지어 엘리후처럼 되는 것일 수 있음을 경계하게 됩니다.
다음 주에는 무신론자이자 맑시스트인 안토니오 네그리가 읽는 욥기를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네그리의 욥기 읽기를 통해서 가장 기대하는 바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와 생산의 구조가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우리의 정체성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러한 경제와 생산의 구조에서 완전히 제외된 인간이 바라보는 세상을 통해서 어떻게 복음을 읽어낼 수 있는가 입니다. 다음 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LIKEELLUL
Evil God, God of Love?
C.S. Lewis recalls his arguments as a former atheist in his book Mere Christianity. According to his logic, no evidence can be found for the existence of God from the way this world and universe operate. Lewis’s question was, if God is omnipotent, omniscient, and all-good, why does the universe seem so cold-blooded, full of evil? That is in fact the case empirically made and defended. The world is unjust, and evil is overflowing in that world. The wicked prospers, while the good perishes. Amidst this world, is it even possible to believe in a God of love and justice? Moreover, if the world we live in is as such, what does it mean to speak of a God of love and justice? (Alongside which, how does one proceed with doing theology as an academic discourse of speaking of God?)
Also, if this is what the world looks like, and if God does exist in (and beyond) it, is it not too much to ask God to protect God’s children from suffering and evil? (Gutierrez calls this set of ideas “a barter religion.” Namely, those who serve God faithfully need to be reciprocated in return for their service, and they have every lawful right to expect some sort of reward from God. (Of course in the case of suffering and trouble, there is also a reason for it, which is likely to be God’s punishment toward those who suffer. Gutierrez calls this a doctrine of retribution). It is akin to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in Luke 15, where the elder son is complaining to the father, lamenting, “I have not served you and kept all your commandments to be treated like this!”) This is also the same question the book of Job and Gustavo Gutierrez’s reading of Job in his book On Job: God-Talk and the Suffering of the Innocent raise together. Together with this, Gutierrez juxtaposes the suffering reality of many Latin Americans with that of Job. Out of this fruitful contextual biblical meditation on the book of Job is a profound reflection on the existence and character of who God is, as a result of which is an equally profound reflection on what life is all about. Particularly speaking, I have come to a deeper understanding of the core of the gospel as restoration of justice through love both on individual and communal levels.
Barter Religion, Infinite Demand of God, and the Gospel
What would be helpful in understanding Gutierrez’s perspective on reading Job, particularly his attempt to debunk the superficiality of “a barter religion” (a modern version of which is “a prosperity gospel” led by Joel Osteen), is a hermeneutic philosopher Paul Ricoeur’s analysis from his book Symbolism of Evil on the infinite demand of God in the Hebrew religious tradition. According to Ricoeur, as shown in Deuteronomy 6:4-5, humans ought to love God with all their heart and will and mind and might, which means that humans ought to love God infinitely at all possible levels and dimensions. Even so, it amounts to impossibility for humans to love God that intensely, which is why God gave them law, giving them something to keep and observe, thereby realizing (in the mitigating manner!) the infinite demand of God at the human level. However, is keeping God’s commandments at this level worthy of being rewarded in the eyes of God? Probably not. Putting this differently, Gutierrez argues that what seems to be God’s reward is not really a reward for someone who deserves it, but since God is quintessential love itself, God provides God’s gifts to whomever God wills out of pure mercy. And this logic is also applied on the inverse side. In other words, if God is the quintessential love, then why we suffer ought to remain in the realm of mystery (which is likely to be a topic for perennial debate), and not approached as the divine retribution or punishment. This topic penetrates through Gutierrez book on Job, which he calls the gratuitous love of God.
Seen from this angle, it is increasingly understandable as to why Job begins to look beyond his own suffering and pain, toward the suffering and pain of others, particularly those who are poor and oppressed. Rather than approaching them as particularly unfavorable in the eyes of God, we should look at them whose location gives them a peculiar advantage of need to be in search of God more deeply and acutely. Another that becomes apparent is, in light of his liberation theology in Latin America, why he is known for “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 As we have looked at in the foregoing, one of the core questions which Gutierrez raises through Job is how one speaks of good, loving God in the midst of the world where evil is widespread. In response to this question, Gutierrez contends that while he cannot provide any concrete solution regarding the cause of evil, regarding why Job had to go through such excruciating suffering and pain, and also particularly regarding the oppression of so many Latin Americans, all he knows is that we have to love them as God loves them, for true obedience in his understanding is giving freely what one has received freely (94). It is in this light that speaking of God for Gutierrez is to learn the language of prophecy. Namely, proclaiming and living out the prophets’ language in accordance with justice fulfilling God’s love is one of the primary messages Gutierrez reads out of Job.
On the other hand, alongside the language of prophecy, Gutierrez pays close attention to the attitudes of Job and Job’s friends as they engage in the debate on the doctrine of retribution. In the eyes of Gutierrez, Job’s suffering is not just about its enormity he was going through, but also about the confrontation with God that Job has had in the face of his suffering and pain, which is that Job clearly makes every effort in encountering God (of course God becomes the judge between Job and his three friends in the latter part of the book, yet avoiding any conversation with Job up until that moment.) Whereas Job’s friends are well-equipped with incisive theological logic, defending their position as much as they can, they never engage in direct conversation with God. In other words, in order to respond to the question of how to speak of a good, loving God in the midst of suffering and pain, Gutierrez points out that we also have to learn the language of contemplation. We have to learn to wrestle with God in that moment of silence, that moment of agony, apart from which no one can speak of God in a manner faithful to the biblical and historic Christian witnesses.
Through all these things, I discover the liberation theologian Gutierrez who approaches the gospel message as close as anyone else. Even though some conservative theologians criticize liberation theology (and Gutierrez as well) to be overly empirical (that is, its human-centered tendency rather than God-centered), disposed to building God’s kingdom here and now, which is eschatologically heretical, and favoring a particular economic class over others (and for some liberation theologians such critique is justified). Nonetheless, what I uncover through reading Gutierrez’s meditation on Job is his sharp divulging of how far away such a barter religion is from the love of God, as well as how and why God’s love is gratuitous, and equally how and why the human response to God’s love can never amount to reciprocating, i.e., our inability to match what God has done for humanity, but a mere expression of gratitude, and lastly, how and why the believer gets to overcome the ideology of barter religion, only through actually struggling with God whose image formerly the believer had only as something cerebral, finally embodying the message of the gospel. It is in this regard that pain and suffering yield an important life lesson, yet speaking of pain in this way invariably to everyone undergoing suffering would not be wise, endangering the speaker to be identified with the smugness of Eliphaz, Bildad, Zophar, and even Elihu.
Next week I will review atheist and communist Antonio Negri’s reading of Job. What I am most highly anticipating in Negri’s reading is that how our personal identities are affected by the system of economic production and consumption, which controls modern society, and how one person who was completely off the chart of that systemic map of economic production and consumption finds the ultimate meaning of his life. I will see you next week.
LIKEELL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