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이런 상처는 여간해서 아주 사라지지 않는다—켈러의 ‘죽음에 관하여’

얇은 책입니다. 가벼운 주제가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볍진 않습니다. 주제 자체가 죽음이라는 점이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팀 켈러는 작년 초 태어남, 결혼, 그리고 죽음이라는 인생의 세가지 순간에 대해서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었습니다. 이 세가지 순간은 사람들의 삶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순간들이고, ‘태어남’의 경우 거듭남이라는 주제를 포함한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까지의 삶을 성찰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들입니다. 이 책, ‘죽음에 관하여’에서 켈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과연 삶의 마지막 순간에 관해서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복음이라는 메시지의 관점에서 다룹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켈러가 복음을 자신의 삶과는 분리된 무언가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40년간 일선 목회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복음과 신학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정리하면서 뽑아낸 귀중한 성찰들과 깨달음들이 담겨 있습니다. 책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이 부분이었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많은 시간을 죽어 가는 이들과 함께 보냈는데, 대부분 죽음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일생을 돌아보며 극심한 후회에 빠진다. (32)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제 1분 후, 2분 후면 죽는다, 삶의 마지막 숨이 곧 끊어질 것 같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지난 삶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그 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금 더 친절하게 할 걸” “뭐 얼마나 가지겠다고… 어차피 아무 것도 남는게 없는데”

켈러는 이런 생각을 단지 과거의 삶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미래에 ‘다가올지도 모를’ (다가올지도 모른다는게 중요합니다. 막연함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두려움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며, 그런 두려움은 확실한 무언가가 주는 두려움보다 혹은 적어도 그만큼은 크니까요)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정말 심판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심판이 나에게 곧, 5분 후에 닥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이제껏 잘못 많이 했는데, 어떻게 하지… 라는 두려움은 인류 전체에게 보편적입니다. 몇 년 전 개봉해서 크게 성공했던 영화 신과 함께 는 그런 사람들이 가진 막연한 두려움과 과거에 대한 회한을 잘 보여주는 예시가 아닐까 합니다. 심판의 순간에 무력하게 서서 자신의 죄와 잘못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 토설 당하는 일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한 일을 바라보고 거기에 집중해서 우리 스스로를 판단하는 ‘시선’은 그 자체로 자기 중심적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잘한 것들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가 심판 받을 만하냐 그렇지 않느냐를 우리 마음대로 판단하고 그에 따른 감정과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감정이며,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이렇게 자기 중심적인 감정과 생각에서 구해 줍니다. 우리의 시선이 우리가 한 일들, 우리가 잘 한 것들이든, 못한 것들이든, 거기에 시선이 묶여서 어떻게 해야 내 가치가 하나님 앞에서 올라갈까, 내가 보기에 좀 자랑스러울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까에 머물지 않게 하며, 이웃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켈러는 이런 복음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신자들은 알거니와 그리스도는 이를 테면 하늘의 법정에서 우리의 “대언자” 혹은 변호사 역할을 하신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므로 죄가 우리를 정죄할 없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이나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94)

만약 우리의 시선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사랑받은 자이며, 그 사랑을 누리는데 집중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가지고 계산하고 점수를 매겨서 죽음의 순간에 이제껏 살아오면서 잘한 일들과 잘못한 일들을 후회하기를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그런 후회와 회한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후회와 회한 앞에서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면서 생을 마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새로운 소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부터 복음을 믿는 삶을 살기로 경주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근본적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으로 넘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보다 훨씬 더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진다면, 복음이라는 새로운 소망이 생겼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잘한 것과 못한 것에 시선이 집중되지 않고 이웃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는 삶으로 바뀐다면, 동일한 소망인 복음은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바꿀까요. 켈러는 바울의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말은 “이중 부정이므로 실제로는 소망을 품고 슬퍼하라”는 말이라고 말합니다 (46).

소망을 품고 슬퍼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하나 하나 살펴봅시다. 일단 슬퍼함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켈러는 죽음이 마땅히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일이며, 죽음 앞에서 초연하거나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누르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유족에게 건네는 조언은 대부분 모종의 극기다. [일리아스]나오는 고대의 예를 보면, 죽은 헥토르의 아버지에게 아킬레스가 “견디시오… 아들 때문에 슬퍼해봐야 아무 것도 나올 없소”라고 말한다. 현대 회의론자들이 하는 말과 같다. “죽으면 끝이다. 그뿐이다. 슬퍼한다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부질 없는 짓이다. 그냥 이게 현실이다. 세련된 현대판 세속 관점은 우리에게 죽음을 그저 생명 순환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부로 보라며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일 뿐이며 전혀 두려워할 아니다. 죽으면 우리 몸도 풀과 나무와 기타 동물처럼 땅을 기름지게 한다. 결국 우리는 우주의 먼지가 된다. 여전히 우주의 일부이니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죽음을 이렇게 보는 것이 우리 심연의 직관에 과연 들어맞는가? (50-51)

죽음을 견디라고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 켈러는 그게 과연 인간이 죽음 앞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감정에 합당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오히려 켈러는 소망을 가지셨으면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시고 우셨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나사로의] 유가족인 마리아와 마르다를 찾아가신 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분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5) (48)

죽음은 부조리입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며, 켈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 앞에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은 마땅한 인간의 도리이며, 인간은 그 앞에서 울고 아파하도록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슬픔은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아파함의 표시일 수 있지만, 절망의 표시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생생한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그 소망을 더더욱 바라면서 아파하고 힘들어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슬픔과 소망이 상호 배타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55)는 것입니다.   

오히려 소망을 더욱 간절히 바라면서 슬퍼하는 슬픔은 우리 안에 죽음을 슬퍼하고 아파하되, 거기에 묶이지 않게 해줍니다. 비록 우리가 죽음을 절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지만, 죽음을 넘어서는 소망을 가져다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죽음의 부조리함 앞에서 예수께서 하셨듯이 인간적으로, 지극히 인간적으로 슬퍼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켈러의 책은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성경적으로 예리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목회적으로는 현대 문화를 잘 고려하면서 복음을 믿는 일이 죽음이라는 실재 앞에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잘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켈러는 이 책에서 1) 죽음을 둘러싼 현대 문화의 태도와 2) 죽음이 가져다주는 여러 부정적 결과들에 대해서 성경이 뭐라고 말하며, 3) 또한 복음이 어떻게 우리의 죽음에 대한 관점과 가치관, 태도를 바꿔주는지에 집중하다보니 정작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는 좀 약하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물론 100쪽이 약간 넘는 이 얇은 책에서 그런 상당한 탐구를 요하는 주제를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이긴 하지만, 적어도 죽음 자체가 가진 신학적 탐구가 죄에 대한 신학적 탐구를 주로 하는 개신교권을 벗어나면 상당히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탐구를 간단하게라도 언급하고 또 켈러의 책을 읽는 독자들이 죽음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겼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성공회 신자이자 변호사로 활동했던 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 1928-1985)의 저서들이나, 혹은 죽음과 죄 사이의 역동을 심리학적으로 파고든 리차드 벡(Richard Beck, 아빌린 크리스쳔 대학교 심리학 교수)의 the slavery of death(죽음의 노예제), 그리고 최근에 출간된 매튜 티센(Matthew Thiessen)의 죽음의 세력과 싸우는 예수(Jesus and the Forces of Death) 등을 참고한다면 켈러의 논증에서 부족한 부분을 좀 더 채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켈러는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의 실재관이 어떤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낳는지를 탁월하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켈러가 보여주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이상적이지 않으며,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켈러는 죽음이 우리의 삶에 남기는 상처와 흔적을 가볍게 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한대로, “이런 상처는 여간해서 아주 사라지지 않는다”(101)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부활이 자칫 잘못하면 쉬운 승리주의(glib triumphalism)으로 해석될 여지를 철저하게 차단하면서도 복음이 가져다주는 소망을 놓지 않는, 복음을 믿을 때 우리 삶에 생기는 변화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서평의 제목을 이런 상처는 여간해서 아주 사라지지 않는다로 정해보았습니다. 이 말이 켈러가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관점, 복음이 가져다주는 변화,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소망을 총체적으로 잘 드러내준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셸리 램보가 예수의 부활 전날을 다룬 성토요일 교리가 트라우마를 경험하며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는지를 신학적으로, 하지만 또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정직하게 다루어내는 그의 역작 성령과 트라우마(Spirit and Trauma)의 서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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