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자들의 교수법

주체성의 회복을 향하여-파울로 프레이리의 억압된 자들의 교수법(Pedagogy of the Oppressed)

올해 광복절을 기점으로 지금 한국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는 기관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다만, 그런 세간의 주목이 긍정적인 이유가 아니라 부정적인 때문이라는 점이 참 안타깝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는 코로나-19가 올초에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이후, 정부의 단체 및 모임에 대한 제한 혹은 금지 정책에 가장 격렬하게 반발하는 몇 안되는 기관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광훈 목사의 사랑 제일 교회와 그 성도들이 한국 사회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2차 대유행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 집회 이후에 사랑 제일 교회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행태를 너무나 많이 드러냈습니다. 방역을 게을리한 나머지 사랑 제일 교회 성도들 중에 확진자가 집단으로 발생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코로나-19 진단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확진 이후에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도망쳐 나오는, 이유를 모르겠는 일들을 벌였습니다.

저 또한 그들과 같은 신앙인이긴 하지만, 신앙이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지, 이웃에게 병을 옮기면서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라는 것이 좀 더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에 합당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사이에는 애초부터 갈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기까지 온 세상을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사랑하면 할수록, 마치 자식이 부모를 닮아가듯이, 남편이 아내를 닮아가듯이 우리는 그 분을 닮아갑니다. 그 분과 똑같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병을 옮길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과 조국을 위해서 집회에 나오겠다는 말은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과는 대치된다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적인 여러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외부인의 눈으로 볼 때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해서,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고 해서 그들에게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9월 5일에 SBS 에서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런 이해 못할 행태의 기저부에 현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신과 공포,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 정부가 사회주의 체제를 추구하고 있으며, 머지 않아 대한민국을 김정은의 북한 정권에 갖다 바칠 것이라는 비합리적인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문재인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한 전적인 불신과 불만이 코로나-19에 대한 정부의 대처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반발과 대항을 민족과 국가를 위한,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거룩한 저항 운동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안타까운 점은, 한국 교회 마저도 그 상당수가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성에 경도되어 한국 사회 전체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증거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은 먼저는 목회자들에게서, 그리고 그 목회자들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을 보이는 성도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그것이 알고 싶다 2020년 9월 5일 방송분에서 MC인 김상중 씨는 방송 말미에 전광훈 목사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다가 코로나-19 확진을 받은 교인을 두고 이런 멘트를 남깁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전광훈 목사를 위해 교회를 지켰다는 교인. 전화를 끊은 뒤 그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 목자를 믿고 따르는 신도를 위기로 몰고 있는 이는 대체 누구인걸까” (김상중, 그것이 알고 싶다 2020년 9월 5일)

김상중 씨의 멘트는 이 모든 사태에 연루된 한국 교회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나, 자신들이 받아들이는 메세지가 과연 정말 성경에 비추어 맞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입니다. 목회자들의 경우, 한국 기독교가 기본적으로 우파 사상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우파 이데올로기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이 시대의 한국 목회자들 중 특히 영향력을 가진 중장년층의 목회자들 다수가 이데올로기를 성경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즉 목회자들은 성경에 비추어서 주체적으로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를 분별하고 걸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도들의 경우, 만약 목회자들이 한 쪽으로 치우쳐서 성도들을 그 방향으로 이끌려고 하더라도 성경에 비추어서 목회자들의 메시지를 걸러낼 수 있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훨씬 더 그 부정적인 충격파가 작았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뢰아의 성도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바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그게 정말 그런지를 확인하려고 했듯이 말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성경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읽는 사람들은 비록 다른 이들의 안내를 받고 도움을 구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마치 다른 이들이 성경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가르쳐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실 종교 개혁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단지 내 안에 있는 죄에게만 종노릇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나를 향해서 짓는 죄, 즉 나를 주체성을 가지고 스스로 하나님과 함께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신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자신들이 언제든지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유익하게 부려먹을 수 있는 존재처럼 대하려고 할 때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CBS 신학펀치 2에서 방영된 “물의만 빚는 요한 계시록,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나요?”에서 연세대 신과 대학의 김학철 교수는 요한 계시록 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를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가시는 나라는 당신의 백성 한 명 한 명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그야말로 각자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나라임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이런 주체성은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대로 살아감으로써 누리는 특권 중 하나입니다. 비록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안에 주체성이 포함된다는 말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늘 함께 살펴볼 파울로 프레이리의 <억압된 자들의 교수법(Pedagogy of the Oppressed)>은 현대 교육 사상 분야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책이며, 특히 지금까지 얘기했던 주체성의 회복이란 어떤 것인지, 또 그렇게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교육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 교회의 목회자-성도 관계라는 맥락에서, 특히 최근의 전광훈 사태가 왜 벌어졌는지와 관련해서 저는 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점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이 책이 가진 통찰을 전달해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책이 가진 한계 또한 있다는 것도 빼놓지 않고 지적하면서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책의 주된 문제 의식과 그 배경에 대해서 먼저 다루면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은 프레이리가 개척한 소위 “비판적 교수법(critical pedagogy)”의 교과서 격으로 대접받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이 가진 문제 의식은 비판적 교수법을 어떻게 펼쳐낼 것인지에 관한 성찰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비판적 교수법이란, 학생과 교사,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모두가 스스로의 인간됨, 즉 주체성을 회복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수법을 말합니다. 프레이리는 비판적 교수법의 대척점에 소위 은행 저금 모델 교육(banking model education)을 놓습니다. 은행 저금 모델 교육이란 교사가 학생을, 혹은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을 아무런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아무런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로 상정하고 오직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마치 은행에 돈을 예금하듯이 주입시키는 방식의 교육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 교육에 대한 은행식의 접근은 그들로 하여금 실재를 비판적으로 살피라고 절대 주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74).

현재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교회 안에 왜 이런 비판적 교수법이 꼭 필요한지, 왜 성도들이, 또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성경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 볼 것을 가열차게 촉구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모든 것들을 비판적으로,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예언자들 중 하나님을 비판하면서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던 사람들(하박국,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등등)을 수없이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당한 고통의 현실 앞에서 무조건 하나님 앞에 고개 숙이지 않았고, 하나님께 따지고 물었습니다. 시편은 어떨까요. 자신이 처한 상황과 끊임없이 씨름하면서 하나님께 거기에 대해서 묻고 싸우는게 시편의 주요한 내용 중 하나라는 것을 아마 독자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 저자들 중 누구도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을 아무 의문이나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프레이리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주된 논지는 성경이 말하는 주체적 인간에 관한 메시지와 잘 합치하며, 한국 교회가 지금 맞닥뜨린 분별 없는 권위자/목회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존이 왜 성경이 말하는 인간상이 아닌지를 잘 설명합니다.

그러면 프레이리는 이런 문제 의식을 어떻게 가지게 된 걸까요? 영남대 교육학과 허준 교수에 의하면, 프레이리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주변 친구들과 그 가정의 비참한 현실을 자주 목도했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한 프레이리는 “1946년 헤시페의 산업복지국(SESI, Service of Industry)의 교육 책임자로 8년간 일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프레이리는 학생, 부모, 교사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반이상주의, 반엘리트주의 교육학의 뿌리를 발견한 것은 이때였다. 기존의 교육 이론(예컨대 피아제이론)들은 “아이들을 때리는 아버지”의 문제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1] 이런 경험을 통해서 프레이리는 교육의 문제가 사회 해방의 문제, 좀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대우하는, 소위 인간화(humanization)의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부모들과 더불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프레이리는 깨달았다.”[2]

이런 문제 의식과 개인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쓰여진 책이 바로 <억압된 자들의 교수법(Pedagogy of the Oppressed)>입니다. 책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장에서는 억압된 자들의 의식 상태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2장으로 넘어가면 이렇게 억압된 자들의 의식 상태를 생산해 낸 교육 방식으로서의 은행 저금 모델 교육(banking model of education)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3장에서는 은행 저금 모델 교육의 대안으로서의 대화의 교육(dialogical education)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 4장에서는 압제자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억압의 상태로 몰아넣는지, 그들의 주된 전략에 대해서 다루며, 또한 3장에서 다루었던 대화의 교육이 어떻게 이런 여러 억압적 메카니즘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지, 진정한 주체성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마칩니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1장에서 압제 당한 자들의 의식을 말할 때 프레이리는 결국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삶의 모델로 삼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굉장히 중요한 지렛대로 삼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압제 당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신과 다른 이들의 주체성 회복을 위해서 일하는 일에 헌신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농경 개혁을 원했던 것은 자유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토지를 차지하고 토지 소유주가 되기 위함이었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른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부려먹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농부 개인의 상황이 여전히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46). 바꿔 말하면, 억압 당하는 사람들의 삶의 지향점은 억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노예 근성이 어떻게 지배자와 피지배자, 압제자와 피압제자 사이에서 작동하는지 잘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만약 억압 당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현재 신분에서 풀려나는 대신,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토지 소유주가 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될 겁니다. 억압 당하거나 억압 하거나 하는게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에게 아무도 억압하지도, 스스로 억압 당하지도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엄청난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폭력과 억압의 상황이 또아리를 틀고 나면, 그 자체가 완벽한 삶의 방식이 되며 그 안에 갇혀 버린 사람들—압제자든 억압 당하는 자든—의 행동 양식이 된다”(58). 억압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존재 방식은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 뿐이며(64), 억압 당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존재 방식은 누군가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것 뿐입니다 (65). 그래서 프레이리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유에 대한 두려움”(47)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유에 대한 두려움은 단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닙니다. 프레이리가 말한 대로, 억압 당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주체적인 의식이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의식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믿지 못하며, 자신들을 억압했던 자들의 능력을 은연 중에 믿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들 안에는 그들의 지배자가 살고 있다”(64)는 말은 참입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를 억압 당하는 자로 인식하고 스스로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자기들은 주체적으로 스스로 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불신합니다(63). 이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면서 겪는 불안정성과 두려움과는 또 다른 감정입니다. 이런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억압당하던 자들의 의식 속에 자신들의 압제자들이 자신들의 생각만큼 완벽하지도, 능력이 많지도 않으며, 자신들 또한 그만큼 능력이 많고 완벽해질 수 있다는 의식이 생겨야 합니다. “억압 당하는 자들은 압제자들의 취약성을 실제로 목격해야 한다”(64).

이런 억압 당하는 자들의 의식을 만들어내는 교육이 바로 2장에서 다루는 은행 저금 모델 교육입니다. 은행 저금 모델 교육은 이미 설명한대로 수직적 관계, 상하 계층 관계에서의 교육이며, 억압하는 자들이 억압 당하는 자들을 길들이기 위한 교육 방식입니다. 프레이리는 이런 교육 방식을 넘어서는 대안적 교육 방식으로 문제 제기 교육(problem-posing education)을 제안합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억압 당하는 자들로 하여금, 약자들로 하여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문제를 제기할 만큼의 주체성과 자존감, 독립심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만이 은행 저금 모델 교육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 교육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 바로 대화이며, 3장의 주된 주제가 됩니다. 프레이리에 의하면, 대화란 “세상을 매개로 해서 사람과 사람이 세상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조우하는 것”(88)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은, 프레이리가 ‘이름 붙이는 행위’를 주체성의 상징으로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인간에게 세상 만물의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이끄신 것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창 2:20). (비록 아담이 이름을 지을 때 하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하와의 소명이 ‘아담을 돕는 배필’이라는 걸 고려할 때, 그리고 ‘돕는 배필’이라는 히브리어가 열등한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였다는 걸 고려할 때 하와 또한 아담과 같은 소명을 받았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대화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프레이리가 말하는 주체성이 자기 충분성(self-sufficiency)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프레이리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유한성과 죽음이라는 한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온전히 주체로 인정하면서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90).

궁극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붙이는 이런 능력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체적인 존재로 인식할 때에만 가능하며, 자신의 실재 인식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실재 인식 능력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더 나은 실재 인식의 방식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프레이리에게 있어서 “인간적이지 않은 역사적 실재는 없”습니다 (130).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현실에 대한, 실재에 대한 자세한 관찰이 대화의 교육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됩니다. 압제자들의 언어가 명령(prescription)인 반면, 해방자들의 언어는 묘사 혹은 설명(description)입니다. 묘사와 묘사가 만나면 더 실재를 온전하게 보게 해주는 대안적인 묘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오직 주체적인 인간들이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프레이리는 이런 대화를 통해서 행동과 성찰이 하나가 되어 삶 전체를 움직이는 일을 실천(praxis)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레이리에 의하면, 대화의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인간화를 이루는 교육이며, 실천으로 이끄는 교육입니다. 또한 주체성을 회복시키는 교육입니다.

프레이리를 읽으면서 저는 계속적으로 현재 교회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은행 저금 모델식의 교육이 판을 치고 있는 교회 교육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 비판적 교수법을 접목하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교육을 펼칠 수 있게 될까요. 책을 읽는 동안 한국 교회가 겪는 작금의 상황이 계속해서 오버랩되어 머릿 속에서 스쳐갔고, 신앙 교육을 연구하고 실제로 현장에서 적용해보려고 하는 사람으로서 깊은 절망감과 함께 여전히 꺼지지 않는 소망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프레이리가 가진 한계도 몇가지 발견했습니다. 두가지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우선은 프레이리가 억압받는 자들이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모델로 삼아야 할 누군가를 너무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프레이리는 억압의 상황 속에서 억압받던 자들이 압제자들을 모델로 삼는 것은 그들을 오히려 더 심각한 억압의 길로 불러 들일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어떤 해방의 모델이 있을 수가 없고, 오직 스스로를 그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억압 당하는 자들은 해방을 향한 자신들의 투쟁에서 스스로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54).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만약 따라야 할 모델의 부재를 그토록 쉽게 넘어설 수 있다면, 수많은 현대 남성들이 아버지의 부재 때문에 힘들어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남성성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리차드 로어(Richard Rohr)는 자신의 강연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남성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버지 모델의 부재가 현대 남성성의 깊은 빈곤을 만들어냈다고 그의 책 From Wild Man to Wise Man에서 주장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럴 경우 예수 그리스도께서 좋은 모델이 되어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억압 당하는 이들에게 함께 억압 당하면서도 궁극적으로 그 억압을 벗어났을 때 또 다른 압제자가 되어 괴물로 변하는 대신, 다른 이들과 자신을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고 대우하게 해주는 좋은 모델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어느 분이 계실까 싶습니다. 물론 타종교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독교의 내적 논리 안에 닮아감과 모델 삼음에 대한 담론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전 4:16)) 굉장히 풍성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모델의 문제를 충분히 잘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한 편으로 발견하는 프레이리의 한계는 선물에 대한 경시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신학적인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프레이리의 책 전체에서 프레이리는 진정한 해방과 주체성의 회복, 인간성의 회복은 절대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거듭 반복합니다 (47, 66, 72, 93). 물론 프레이리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존해서 스스로의 주체성을 얻어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진정한 전인적 해방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자기의 업적이나 신분, 인종이나 성별 등에 두는 대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시며, 나 또한 그렇게 소중하게 보신다는, 그 선물 주심에 두게 될 때 오히려 스스로를 다른 이들보다 더 우월하게 볼 필요도, 열등하게 볼 필요도 없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인간화(humanization)가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더군다나, 현대 성경 신학과 종교 철학 분야에서는 선물(the gift)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기에, 프레이리의 이런 선물에 대한 가벼운 취급은 아마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수치심과 취약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룬 브레네 브라운의 Braving the Wilderness를 서평합니다. 많은 기대 바랍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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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wasuwon.net/76166
[2] http://www.wasuwon.net/76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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