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정치

미국제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성육신적 비판-윌리암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의 영성의 정치(The Politics of Spirituality)

 이 책의 제목이 ‘영성의 정치’(The Politics of Spirituality) 라는걸 처음 알게 됐을 때 뭔지 모를 부조화가 느껴졌습니다. “영성의 정치라… 뭐를 말하려고 하는거지?” 라는 게 저의 이 책에 대한 첫 인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성은 현대 사회에서 (미국이나 한국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정치와는 가장 거리가 먼 무언가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윌리암 스트링펠로우는 애초에 영성이라는 단어가 이런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영성이 현대 문화 속에서 이해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단어들을 나열합니다. 그 단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성(religiosity), 상업화(commercialization), 흐릿함(vagueness), 애매모호함(ambiguity), 피상성(superficiality), 자기 만족(self-indulgence)” (29) 요약하면,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경이 말하는 성령(the Holy Spirit)의 역사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 책 영성의 정치는 성경이 말하는 영성이 지극히 정치적인 실재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영성의 정치라는 제목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 성경이 말하는 영성이 정치적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2) 모든 정치에는 나름의 영성이 있다는 의미 또한 전제되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정치’라고 할 때 정치는 단지 정치가들의 활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 말한대로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 한 목사님으로부터 영은 의식이다(spirit is consciousness)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 분의 말씀에 의하면 결국 영이라는 것은 특정한 의식을 통해서 전파되며, 특정한 의식은 특정한 메시지의 반복적인 학습(혹은 듣기)를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참 일리가 있는 것이, 무언가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우리는 저절로 그 메시지가 말하는 바를 흡수하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못 생겼다’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얘기를 오랜 기간 듣는다면, 우리는 그 메시지에 크든 작든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식은 영이며, 영은 의식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고 피조계 전체에 역사하시는 방식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음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드러내도록 하시는데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런 의식화의 영역이 종교적이거나 내면적이거나 피상적인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까지 확장되는데 성령의 목표가 있다고 하면, ‘영성의 정치’라는 말은 적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의 영으로 깨우시고 새롭게 하시는 일에 관한 한, 아주 합당한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서평에서 “영성의 정치”가 말하는 이런 이중적 의미—영성이 정치적일 뿐 아니라 정치 또한 영성적이라는—를 중심으로 책을 통해서 스트링펠로우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책의 서론과 1장에서는 책 전체의 목적과 주장을 밝힙니다. 책의 주장은 “영성을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실재로 바라보는 것”(25)입니다. 왜 그런 지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밝혔습니다만,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스트링펠로우는 성경이 말하는 영성은 성육신(the Incarnation)에 기반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성육신 하심은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육화하셨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고 역사하시는지를 보여주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공생애를 펼치실 때, 예수의 영성은 종교적이지 않았습니다. 개인주의적이거나 애매모호하지도 않았으며, 상업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분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며, 그런 면에서 그 분의 영성은 정치적이었습니다. 또한 현실에 발을 딛고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바로 그 분의 영성이었습니다. 그 분이 선포하신 나라는 로마 제국도 아니었고, 유대 열혈 분자들의 폭력 혁명을 통한 정치적 독립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도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요소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였습니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심으로서 인간이 되셨을 때 그 모든 실재들을 피하시지 않고, 철저히 당시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아가심으로써 성령의 일하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트링펠로우는 영성이라는 말 대신 성화(sanctification)나 거룩(holiness)이라는 말을 쓰기를 더 선호한다고 밝힙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창조 행위가 반복되는 것”(30)이며, 거룩함이란, “급진적인 자기 지식이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이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의식이 되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과 혼동되지 않는, 혹은 하나님의 정체성과도, 우상의 정체성과도 혼동되지 않는 것”(32)입니다. 즉 스트링펠로우가 바라보는 영성이란,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간됨을 철저히 인식하고, 인간다운 삶을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스트링펠로우는 그러한 영성의 두가지 기본 요소를 “온전함(sanity)과 양심(conscience)”(33)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타락(the fall)이란 무엇일까요? 타락이란, “방향 감각의 심대한 상실이다. 그러한 상실은 피조계 전체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끼치며, 그런 영향은 정체성, 장소, 연결, 목적, 소명과 모두 관련이 있다”(38). 종합적으로 보자면, 스트링펠로우가 바라보는 영성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규정하는 정치가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정치란, 사람, 기관, 그리고 또 다른 공중의 권세들과 피조계의 다른 부분 모두가 관계 맺는 방식을 총체적으로 지칭한다”(26). 타락이 피조계 전체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방향 감각의 심대한 상실이라면, 당연히 영성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2장에서 스트링펠로우는 그가 서론과 1장에서 주장했던 영성의 정치성을 문화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풀어냅니다. 제목인 Justice and Justification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칭의(의롭게 하심)입니다. 스트링펠로우는 미국 문화 안에 있는 타락의 증상을 여러가지로 파헤칩니다만, 그 중 그가 가장 집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심과 반대되는, 특정 그룹에 대한 비하와 격하입니다. 하나님의 칭의란,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도덕적 가치를 획득하느냐를 가리키며, 이런 가치는 정체성과 소명에 관한 확신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온전해지는 경험, 거룩해지는 경험이 지속되면서 유지된다”(47). 하지만 타락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를 정당화(justify)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초한 정체성과 소명을 획득하고,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소중한 가치 위에 자신의 삶을 펼쳐나가는 대신,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자기의 가치를 정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가치도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정하고 깔보거나 우러러 보거나 하게 됩니다. 그런 사회적 증상 중 하나가 젊음에 대한 지나친 찬양과 강조이며, 그런 현상의 이면이 늙음에 대한 멸시와 방조입니다. 스트링펠로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나이든 사람들에게 퇴직이라는 법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든 후에, 그들을 페쇄된 공간인 퇴직자 마을, 요양원, 병원, 공공 요양소 등으로 밀어넣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가진 공통적 전제는 나이 든 사람들을 시야에서 멀리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류 사회, 젊은이들의 사회는 늙은이들의 침입을 받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49).

이런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개인적이거나 문화적인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서 국가라는 차원까지 확장됩니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영성의 정치인지, 왜 영성이 정치적인 실재일 뿐만 아니라, 정치 또한 영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확증하는 순간입니다.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진 영성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과는 관계없이,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는 영성이 국가로서의 미국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영성이라는, 예리한 주장이 이 장에서 나타납니다. 스트링펠로우는 특별히 이 책에서 미국의 40대 대통령인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권이 미국을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로 띄우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레이건과 그 정권에 의하면, 미국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라이며, 특별한 은혜를 입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정작 레이건은 교회 문턱을 넘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53). 그러므로 레이건이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미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라는 주장이 성경 어디에서도 확증 받을 수 없는 주장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합니다.

스트링펠로우에 의하면 국가로서의 미국이 스스로를 이렇게 자화자찬하면서 하나님께서 언급하시지도 않은 축복을 자기 것으로 끌어다 쓰는 일은 신성모독(blasphemy)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은 한 국가의 존재와 행함에 있어서, 그 나라의 성격, 위치, 능력, 운명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점하거나 빼앗아 올 때 일어”(63)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적 대의의 의로움에 대한 섣부른 가정 자체가 신성모독이다”(63). 미국은 딱 그런 신성모독을 행하고 있으며,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국가로서의 미국이 신성모독을 행해 왔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을 통한 회개 뿐입니다. 하지만 국가 전체로서의 미국이 그렇게 회개할리는 만무합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말한대로,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는 도덕적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도덕적이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사실 하나님에 대항하는 괴수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마지막 장인 3장에서 스트링펠로우는 비로소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희망을 이야기하려면 하나님의 심판(the Judgment of God)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 심판은 아무도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없다는 심판이며, 그 심판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칭의와 정의(justification and justice)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은 이미 이전의 공부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만, 심판(the Judgment)이 칭의와 정의라는 실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스트링펠로우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각설하고, 현대 사회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 특별히 과학 기술과 폭력을 우상으로 삼고 있는 사회입니다. 폭력은 약자들에게 행해지며 (앞에서 나이든 이들을 사회의 한 구석으로 몰아넣듯이), 또한 과학 기술은 인간의 창의성을 말살시키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을 점점 더 줄어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술의 지배에 저항해야 하며, 기술의 모든 측면에서 재량(discretion)을 발휘해야 하고, 모든 기술적 능력의 이행에 있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83).

책은 고통에 대한 스트링펠로우의 묵상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스트링펠로우는 고질병이었던 당뇨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위기에 놓였었습니다. 그 때문에 진통제를 먹어야 했지만, 스트링펠로우는 진통제를 거부하고 온 몸으로 그 고통을 느끼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용감한 것으로도, 어리석은 것으로도 포장하지 않고, 담담히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맞이하기로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고통을 많이 겪을 때 그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정당화하기(=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의롭게 여기기) 쉽습니다. 흔히 이런 반응이 나오죠. “너희가 나만큼 고통을 겪어 봤어.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이.” 하지만 스트링펠로우는 그런 고통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하나님의 형벌로 받아들인 것도 아닙니다. 요약하자면, 고통은 그에게 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을 받을 만큼 의롭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타락한 피조계에 속한 일부로서 누구나 겪는, 누구나 겪어야 할 현실일 뿐입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 의미심장합니다. “I consider that this is enough to know if one does trust the Word of God in Judgment” (90).

이 책은 스트링펠로우의 “시민 불복종 3부작”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스트링펠로우는 진정한 성경적 영성은 국가가 전달하는 영성에 전적으로 반하며, 국가라는 실재가 회개하도록 촉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민 불복종과 저항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 스트링펠로우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피조계에 속해 있다면, 국가 또한 그럴 것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대항하여 일어난 영성은 그것이 국가의 것이든, 문화의 것이든, 사회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대적하고 대항하게 만듭니다. 다만 그러한 대적과 대항은 회개로의 촉구이며, 어떤 폭력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스트링펠로우의 치열한 현실 감각, 성령께서 그를 부르심에 최대한 민감하려는 자세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민감함이 모든 일에 수동적이 되고 신비주의적으로 흘러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음성을 듣지 않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치우친 영성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삶을 가장 인간답게 살아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에서 상당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 서평을 읽으시는 독자들에게도 스트링펠로우를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스트링펠로우의 책을 계속해서 읽어가면서 그의 사상을 탐구하고 추적할 계획입니다. 감사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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