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 종말론 비평적으로 읽기

이 짧은 감상문은 저의 세대주의 종말론, 특히 천년왕국의 의미(The Meaning of the Millennium)라는 책에 실린 Herman A. Hoyt의 글을 바탕으로 적은 것임을 밝힙니다. Hoyt의 글에 대한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 premillennialism) 지지자인 George Eldon Ladd의 짧은 비평에서도 알 수 있듯이(94), Hoyt의 견해가 전형적인 세대주의 종말론 이해를 모두 다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기에, 또 세대주의 종말론에 관해서 이제껏 나온 글들만 해도 엄청날 것을 알기에 제가 쓰는 이 짧은 글은 절대로 전체에 대한 완벽한 그림을 다 가지고 쓴다고 할 수는 없겠고요. 다만, 이 책 자체가 가진 특징 중 한가지가 한 견해를 가진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쓰고 난 후에, 여타의 견해를 가진 저자들이 반박하는 짧은 비평을 달도록 전개되고 있기에, 전체적인 논쟁점 정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 글을 쓰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각설하고, 이 감상문에서는 세대주의 종말론의 성경 해석에 관해서 제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부분에 관한 한 Hoyt의 주장이 일반적인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책의 다른 저자들이 이야기하고 있기에, 또 제가 해석학이라는 분야가 그래도 개인적으로 제가 가장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부분이라고 판단되어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제가 문제 삼을 부분은 크게 두가지인데, 두가지 모두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자기 성찰의 부족 때문에 자신들의 성경 읽기를 절대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 저의 진단입니다. 즉, 자신들이 처한 시대적, 정치적 맥락에 대한 성찰이 소홀한 나머지 그러한 상대적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죠. 첫번째 이슈는 일반적인 성경 읽기의 원리에 관한 것이며, 두번째는 교회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

Hoyt는 자신의 성경 읽기, 더 나아가서 세대주의자들의 성경 읽기가 문자적인 것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합니다. Hoyt의 글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오게 될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나라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속사포식으로 열거합니다. 그래서 왠만큼 성경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그의 글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Hoyt가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견해 사이에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Hoyt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시편 10:16의 경우 그 나라를 항상 있어왔던 것으로 말하지만, 다니엘 2:44의 경우 그 나라는 특정한 시작이 있었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시편 103:19의 경우 그 나라가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라고 주장하는 듯이 보이는 반면, 이사야 24:23의 경우 그 나라는 세상 속에서 특정 지역에 대한 다스림을 말하는 듯 보인다고 합니다. Hoyt의 말대로라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여기에 대한 Hoyt의 해결책은 하나님 나라에는 두 측면이 있다고 가정하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왜 그렇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별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Hoyt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보편적인 측면과 중재적인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둘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중재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방식을, 그리고 보편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범위에 대한 이해입니다. 중재적인 측면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Hoyt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나라는 계속해서 특정 중재자를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고 주장합니다. 일견 말이 되는 측면이 있지요. 그런데 왜 아담은 빼먹는 걸까요. 신약 성경, 특별히 바울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마서 5장의 아담-그리스도의 대조를 보아도 말이죠.) 최초의 중재자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 아니었을까요. 특히나 아담 또한 여러 명의 최초의 인류 중에서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말이죠 (아벨을 죽인 가인이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아담 시대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그런데 Hoyt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자의적으로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중재라는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다가 족장 시대 이후부터 그런 식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문자적 읽기라고 이름 붙입니다. 글쎄요. 일단 저의 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Hoyt가 언급한 구절들 사이에 충돌이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각 구절들의 장르를 먼저 생각하고, 그 구절들이 쓰여진 시대적, 문맥적 상황을 고려할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측면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각 저자들이 했던 말인지를 고려한다면, 굳이 각각의 구절들 사이에 충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이런 식의 읽기를 문자적인 읽기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사실 억지가 있을 뿐더러,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읽기, 장르와 맥락을 고려해서, 그리고 시대적이고 문예적인 배경을 고려해서 읽는 것이 오히려 가장 제대로 된 성경 읽기 아닐까요.

또 하나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문자적이라는 말이 세대주의 등장 당시에 (그리고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가진 호소력입니다. 세대주의가 등장했던 시기는 한창 현대주의와 세속주의로 인해서 전통적인 성경 읽기 방식이 공격을 당하던 시기였고, 세대주의의 등장은, 이러한 현대주의와 세속주의의 공격에 대한 전통 기독교의 방어라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물론 그것이 지배적인 요소라고는 볼 수 없겠죠.). 그렇게 볼 때, 세대주의가 자신들의 성경 읽기를 문자적인 읽기라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세대주의자들이 자신들만의 성경 읽기가 가진 시대적이고 상황적인 요소들을 간과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세대주의의 성경 읽기는 전통적 개신교의 성경 읽기와도 다르고, 중세나 초대 기독교인들의 성경 읽기와도 다르며, 또 현대의 세대주의자가 아닌 복음주의자들의 성경 읽기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성경 읽기만이 문자적이라고 부른다면, 여타의 성경 읽기는 모두 문자적이지 않은, 어딘가 모자란 읽기가 되는 동시에, 자신들의 성경 읽기가 상황적이고 시대적인 산물이라는 측면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세대주의 성경 읽기는 우선 자신들에 대한 성찰, 자신들의 성경 읽기에 대한 상황적 성찰을 먼저 하는 것이 시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러 종류의 합리적인 성경 읽기 중에 한가지 읽기로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 이스라엘과 교회에 각각 다른 경륜이 주어졌다?

두번째로 제가 세대주의 종말론의 성경 읽기가 시대적이고 상황적인 성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세대주의 종말론이 이스라엘과 교회에 각각 다른 경륜이 주어졌다고 가정하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이스라엘과 교회에 각각 다른 하나님의 경륜이 주어졌다는 명백한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백번 양보해서, 정황적으로 세대주의자들이 그렇게 읽을 만한 근거는 존재합니다. 그것은 개신교회도 그렇고, 카톨릭이나 동방 교회도 그렇고, 기독교는 아주 초기부터 유대인들과의 분리 속에서 자라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분리는 사실이었지만, 권장할 만한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역사적 현실이 그렇게 굳어지면서 애초부터 기독교는 마치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어느 정도 공부하신 분들은 아시다시피, 기독교는 초기에는 당시 사람들에게 제 2 성전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이해되었으나, 점점 더 교세가 커지면서, 그리고 그 당시의 유대교와는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기독교는 점점 유대교와 유대인들에게서 분리되어 갔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안타까운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문서들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분리를 전혀 당연시하지 않으니까요. 예를 들면,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한 경륜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2장). 또한 더 나아가서, 사실 접붙임을 받은 것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엡 3:6).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기독교 안에는 역사적인 상황을 통해서 고착되어버린 고질적인 반유대주의가 자리잡게 되었고, 세대주의의 성경 읽기는 이런 상황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채 성경을 읽고 있기에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 다른 경륜이 있다고 가정하고 성경을 읽고 있다는 것이죠. 이런 식의 성경 읽기는 Hoyt가 보여주고 있다시피 이스라엘이라는 물리적 땅에 물리적인 구약의 제사 제도와 물리적인 성전이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본 정신을 완전히 놓쳐버린 해석을 낳았습니다. 땅 자체에 대한 회복이 그런 식으로 일어나야 한다면, 왜 예수께서는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 5:5)라고 말씀하셨던 걸까요. 물리적인 예루살렘이 회복되어야 한다면, 왜 요한 계시록은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21:2). 제사 제도와 성전이 물리적으로 모두 회복되어야 한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 성전을 허물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걸까요 (요 2:19). 세대주의의 성경 읽기는 자신들이 보여주는 성경 이해가 가장 올바르고 가장 유일한 방식의 읽기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식으로 읽는 것이 유일하게 올바른 이해라고 말한다면, 세대주의 등장 이전에 성경을 읽었던 모든 신앙의 선조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물론 세대주의의 성경 읽기는 이전 신앙인들이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 로마서 11:26)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2등 시민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기에, 교회가 원래는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모태로 했고, 이방인들이 이후에 들어오게 된 것이지, 교회 자체를 이방인들의 모임인 것처럼 보게 만들었다는데 그 책임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성경 읽기가 상황적이고 시대적인 산물이지, 절대적이고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 아님을 확실히 자각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다음 주 초에는 마이클 고먼의 요한 계시록 책임 있게 읽기(Reading Revelation Responsibly)에 대해서 서평합니다. 감사합니다.

LIKEELL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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