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는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개신교 복음주의를 버리고 로마 카톨릭이나 동방 정교로 개종(?)했던 친구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명과 친해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분은 대만계 미국인으로 보스턴에서 치과 의사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갑자기 선교의 소명을 받고 제가 다녔던 고든콘웰 신학교로 오게 된 분이었는데요. 이 분은 고든콘웰에 다니다가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같은 보스턴에 위치한 동방 정교 신학교로 학교를 옮겼고, 또 동시에 복음주의에서 동방 정교로 개종을 감행했습니다. 왜 그래야 했는지 이유를 묻자, 그 분이 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개신교 복음주의는 어떻게 해야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어. 그냥 믿으면 다 된다고만 얘기할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성화를 이룰 수 있는건지 난 전혀 배울 수가 없었어. 하지만 동방 정교는 달랐어. 굉장히 구체적으로 성화의 길을 제시했고,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과 친밀함을 이루는 길을 내가 오랫동안 바랐던 방식으로 보여줬어. 그래서 옮겼어.”

그 말을 들은 저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비록 개신교 개혁주의 조직 신학에서 소위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라고 해서,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수양-성화-성도의 견인-영화라는 9단계의 구원의 과정을 가르치긴 하지만, 여기에도 구체적인 영성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해야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닮는 덕성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보다는 (말하자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같은 식의, 나를 차분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들고, 더 깊은 영성을 추구하게 만드는, 불붙은 논리를 담아낸 설명 말이죠), 여전히 상당히 메말라 보이고, 읽는 이에게 아무런 감흥을 끼치지 못하는, 단지 객관적 묘사에 그치는 정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신교 진영에 이런 불붙은 논리를 표현하는 저자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저자들은 대부분 상당히 대중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고, 구체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여정에 대해서 생생하고도 독자들이 체감할 수 있게 묘사하기 보다는, 그저 사람들의 종교성을 자극해서 더 기도하고 더 성경 읽고 더 헌신하라고 재촉하는데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게 약점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데이빗 포울리슨의 이 책이 반가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개신교 진영 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바로 그 질문,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울리슨이 신학자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심리학자이자 (목회학 석사(M.Div)를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마치긴 했습니다), 소위 성경적 상담으로 잘 알려진 CCEF(Christian Counseling & Educational Foundation)의 총 책임자로 수년간 일해온, 목회 상담 분야에서는 영향력이 깊은 인물입니다. 따라서 비록 포울리슨이 전문적 신학자는 아닐지라도, 첫번째로 신학에 대한 전반적 지식을 가지고, 또한 심리학적인 전문성을 바탕으로, 마지막으로 직접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성화를 깨우쳐가는 한 신앙인으로서의 고백이 돋보이는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성화에 대해서 궁금했던 일반 신앙인들이나, 신학에 관심이 있고 앞으로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시는 분들, 또 신학생이나 목회자로서 기독교 심리학자가 바라보는 성화에 대한 관점이 성화라는 삶의 경험을 어떻게 조명하는지 궁금하신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입니다.

책은 상당히 얇습니다. 영어로 총 120쪽이 약간 넘고, 전체 챕터는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여섯 챕터는 포울리슨 개인의 경험을 곁들여 가면서 스스로가 깨닫게 되고 정리한 성화의 기본 원리들을 정리합니다. 그 이후 7장과 8장은 포울리슨이 어떻게 회심에 이르게 됐고, 어떻게 성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지를 담담하지만 감동적으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그 이후 9장과 10장에서는 포울리슨 주변의 사람들 2명의 예를 들어서 그들이 어떻게 성화를 경험했는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11장에서 성화라는 여정을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에 대한 개인적 소회를 나누고 책을 마칩니다. 전체 구조를 보면 아시겠지만, 책은 전혀 무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에 관해서 중요한 관점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 세가지만 나눠보겠습니다.

우선 포울리슨이 바라보는 성화의 비전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포울리슨은 거룩해지는 것이 매번 말할 때마다 성경이나 기도 같은 종교적 단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지혜로운 인간이 되어간다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14). 거룩에서 자라간다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소망하는 바가 명확해지고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목적을 알게 되고, 목적이 지향하는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넓어지며,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가는 내적인 힘과 관계적인 힘에서 자라간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14). 저는 여기에 너무나 동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핵심적으로 가치관입니다. 가치관은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주장합니다. 생각, 느낌, 관계, 심지어 고난까지도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이 역사하는 가치관, 모든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하는게 사랑하는 일인지를 알고 배워가는게 바로 성화라고 저도 생각하기 때문에 포울리슨이 이렇게 얘기할 때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포울리슨은 책 전체를 통해서 성경이 바라보는 성화의 원리는 어느 한가지 통찰이나 개념을 핵심적으로 보지 않고, 각 사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그가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했던 성화의 경험에 비추어서 한가지 원리만을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있고, 그 원리를 통해서 성화를 경험하지 않으면 성화될 수 없다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주장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예수 안에서 새롭게 발견한 나의 정체성을 찾는 길만이 성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 성례를 통해서만 성화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공동체만이 성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울리슨은 그 모든 방식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합당하게, 그 사람의 인생의 시절을 따라서 활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방식에 열려 있어야 하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성화의 과정을 경험하는 방식에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것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게 포인트입니다.) 그 예로 포울리슨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동일하게 신명기 32장 10-12절을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지만, 그 은혜를 체험하는 방식도, 또 은혜의 내용도 달랐다는 점을 들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바로 이런 면에서 포울리슨은 성화에서 신학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강렬한 성화의 체험은 (사실 어떤 경험이든 강렬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그 경험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마치 신학생이나 목회자들 중에 어떤 특정한 훈련 방식이나 프로그램을 통해서 상당히 강렬한 교회 성장의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오직 그 훈련 방식과 프로그램만을 고집하면서, 어느 교회에 부임해서 가게 되더라도 오직 그 훈련 방식과 프로그램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포울리슨은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신학이며, 신학이 가져다주는 일반화, 추상화일 수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신학은 여러 관점과 여러 경험, 여러 통찰을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주는 힘이며, 그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경험과 체험에만 매몰되는 대신, 다른 경험이나 다른 체계에 열려 있을 수 있게 해줍니다. 물론 신학이 가져다주는 추상화나 일반화에만 매몰될 경우 제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메마른 체계를 살아 있는 경험이 대체하게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성화에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지적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서평을 마치기 전에 한가지, 실천 신학자인 저의 관점에서 포울리슨이 신학에 대해서 가진 전제가 보여주는 흠을 하나 지적하고 싶습니다. 포울리슨이 신학이 일반화, 추상화하는 힘이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우리의 성화 체험과 다양한 성화의 방식을 체계화시킬 필요를 역설했지만, 포울리슨은 신학 또한 특정한 맥락 속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가졌던 문제 의식만을 반영하는 체계라는 점을 미쳐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신학도 모든 경험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하지는 못하고, 항상 그 신학이 위치한 시대적, 상황적 한계 속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특정한 신학이 보지 못하는 부분, 그 맹점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포울리슨이 심리학자이고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한계는 심각하게 바라볼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신학의 힘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추상화나 일반화 대신,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상황 속에서 겪었던 성화 경험을 프로세스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우리의 경험을 체계화하는 것이 신학의 힘이지,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 신학의 힘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포울리슨의 책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읽어볼 만한, 그 얇기에 비하면 상당히 두터운 성찰을 담아내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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