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됨과 사역자의 정체성 (에베소서 4:1-16) – 3/12/2018
안녕하세요. 만나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소개해 주신대로 저는 고든콘웰 졸업생이고, 현재는 BU에서 기독교 교육과 실천 신학으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후배님들을 만나뵐 기회가 있다는 것이 참 좋고,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좋은 나눔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새벽 기도회 주제가 “Identity in Christ”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바로 떠올랐던 책이 에베소서였습니다. 예전에 비전 교회라는 Watertown 에 위치한 교회에서 섬길 때 에베소서에 대해서 나눌 일이 있었고, 그 때 에베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에 걸쳐 묵상하면서 가장 처음 발견했던 점이 에베소서 안에서 바울은 “In Christ” 라는 말을 끊임없이, 적어도 30회 이상 반복한다는 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이 책에서 그토록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일까. 가 제가 애초에 가졌던 의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을 던지면서 제가 깨닫게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는 말이 바울에게는 (에베소서의 저자가 바울이 아니라는 논쟁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만, 저는 일단 바울이 에베소서의 저자라고 가정하고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인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존재론적인 상태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내포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재규정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열심이 규정 짓는 관계로 이해했습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그 분을 섬기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그 분을 향한 열정과 노력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각의 열심과 노력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대우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는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읽느냐, 선행을 얼마나 베푸느냐가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우리의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특별히 우리 사역자들에게는 우리가 얼마나 큰 교회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목회하고 있느냐 또한 우리의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경향은 교회 안에도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거의 모두 이런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1) 우리의 노력으로, 2) 인정을 받고, 3) 그 결과 그 대가를 누리는 사회이고, 관계지요. 교회 안에서 혹 신앙을 처음 가지게 되신 분 중에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 왔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열심히 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가진 동기는 대부분 사회에서 맺어온 관계에서 자신들이 열심히 해왔기에 성공적이었고, 열매가 있었던 경험들에 기초합니다. 사역자인 우리들은 그 분들의 그런 열심을 더욱 부추겨서 교회 일을 맡기고, 소비할 인적 자원으로 파악하는 대신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분들이 사회에서 맺어왔던 관계의 원리와는 정반대임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관계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 맺음은 우리의 노력과 열심에 따라서 대가를 누리고 상을 받는 것에 기초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율법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즉 율법주의는 사실 단순히 종교적인 용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를 규정짓는 기본적 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복음을 믿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까닭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마치 물고기가 물을 느끼면서 살지 않듯이 우리가 맺어온 모든 관계의 원리 자체를 뒤집어서 맺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또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말이 가리키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선물을 주고, 좋은 것들을 나눠주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경험해 보시거나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우리들 대부분은 아마 굉장히 불편하게 느낄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려고 할 겁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노력해서 얻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불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가치를 여전히 우리의 노력과 열심에 두는 경향이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공짜로 받게 되면 그런 공짜로 받는 것들이 우리의 존재 가치를 낮출지도 모른다는 본능적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건 이런 불편함의 감정이, 이런 두려움이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받고 누리면서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진정으로 그 분의 사랑에 반응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즉 우리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 분께 대가를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정말로 느끼고 누리기 시작해서 거기에 대한 반응과 응답으로써 우리 자신이 가진 것들과,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드리고 싶어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 분과의 관계 맺음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이 근본적인 관계 맺음의 원리가 바뀌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디머 장로교회의 팀 켈러 목사는 우리는 모두 기본적으로 복음을 믿지 않는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맥락 속에서 특별히 “하나됨과 사역자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오늘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요. 자, 그렇다면 사역자의 정체성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저는 슬라이드에 나오는 이 그림이 오늘 제가 나눌 말씀의 핵심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Matthias Grunewald라는 화가가 1510년에서 1515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The Crucifixion이라는 그림입니다. 오른쪽에 손가락을 들어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여러분들은 조금 경계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 그림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 자신의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칼 바르트에 대해서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생각이나 감정과는 상관없이,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바르트의 말에 동의합니다. 즉 저는 사역자의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오늘 바울이 얘기하는 하나됨은 사역자들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에서 가능해진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에베소서 4:1-16을 함께 읽고 생각하면서 사역자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제가 나누고 싶은 것은 세가지 입니다. 첫번째는 사역자의 정체성의 근거로써의 부르심, 두번째는 사역자의 정체성의 내용으로써의 하나됨,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역자의 정체성의 불가능함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근거, 내용, 그리고 불가능함이 제가 나눌 내용들입니다.
첫번째로 사역자의 정체성의 근거가 되는 부르심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부르심의 근거는 그리스도이고, 그 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사역자인 우리들의 정체성은 바로 이 소망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11절에 가서야 여러가지 office에 대해서 언급하는데요. 사실 그 이유는 전체적인 그림을 먼저 보여 준 후에야 각각의 office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1절에서 3절 사이에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가지는 실천적인 측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처음으로 그 근거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서 4장 전체에서 처음 등장하는 말이 바로 소망입니다. 물론 에베소서 전체에서는 소망이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당장 1장 18절에서도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 언급하지요.
정말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아침 시간에 너무 많은 얘기를 해봤자 여러분 머리만 아프실 것 같고, 그래서 이 한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많은 정체성 이론가들이 정체성에 대한 여러가지 이해를 다루고 여러 이론 전통을 이야기하지만, 미래에 기초해서 정체성을 세우는 경우는 우리가 믿는 복음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정체성 이론에서는 현재의 내 모습에 기초해서 미래에 내가 되어가고 싶은 모습을 그려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현재에서 미래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체성의 근거는 그와는 반대로 미래에서 현재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이 정체성의 근거가 되니까요. 물론 이 소망은 과거의 사건, 즉 그리스도의 인격, 삶, 그리고 사역에 기반한 소망입니다. 8절에서 10절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에 대한 그런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소망을 “오래된 미래”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대학에서 자신들이 나아갈 바에 대해서 얘기할 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정체성의 근거는 더더군다나 확실한 “오래된 미래”입니다. 오래된 미래는 확실하며, 우리에게 안정감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한 일, 혹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가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일에 기초해서 불확실해 보이는 미래를 바라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오래된 미래를 붙잡을 때, 즉 부르심의 소망을 붙잡을 때 우리가 사역자로서 누리게 되는 안정감은 엄청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역자로서의 정체성의 근거가 현재 우리에게 맡겨진 직무나 역할에 있지도, 우리가 열심히 하는 그 열심에도, 우리가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가 하는 일에 있지 않고, 우리의 관계나 직무나 우리의 열심이나, 아무튼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안정감을 주는지는 복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안정감은 특별히 후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섬기게 될 사람들, 이미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마 더 크게 다가올 겁니다. 성공회 주교이자 신학자인 로완 윌리암스는 그의 책 “제자가 된다는 것”에서 후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한 정체성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개인의 정체성 위기는 오늘날 매우 특별한 형태를 띠며, ‘나는 이전의 나와 동일한 사람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구체적으로 연속성의 위기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동안 직업을 유지할 가능성도 줄어들고 또 안타깝게도 평생 동안 안정된 관계를 누릴 개연성조차도 점차 낮아지고 있는 문화 속에서, 정신과 마음을 뒤흔드는 다양하고 난감한 경험들을 하나로 묶어 줄 만한 것이 있을까요? 경력 단절과 관계 파괴가 일상의 일로 자리잡은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역자들이 먼저 이 질문에 대해서, 즉 우리가 가지는 정체성에 대해서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상,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에게 답을 주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윌리암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소망도 관계 속의 소망입니다. 우리를 떠나거나 포기하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 우리가 누구였으며 지금 누구인지 알고 이해하며 그대로 붙잡아주는 실재와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소망입니다. 여러분이 정체성을 지니는 까닭은 여러분 스스로 정체성을 고안해 내거나 또는 불변하고 견고한 자아를 중심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증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파악하거나 볼 수 없는 것들, 곧 하나로 엮어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다듬을 수 없는 자아의 단편들이 모두 사랑의 단일한 눈길 안에 포착됩니다. 여러분이 나서서 자신이 누구이며 또 누구였는지의 문제와 씨름하거나 확정지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역사나 이야기에 담긴 온전한 진리를 확인하고자 직접 나서서 수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코 떠나가지 않으시는 분의 눈으로 보면, 과거나 현재나 여러분의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 있으며 참된 것입니다. 이렇게 통합하시는 눈길 안에서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됩니다. 겉보기에 서로 단절되고 이질적인 단편들이 신성한 관찰자 곧 거룩하신 증인의 손길 안에서 돌연 하나로 통합되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역자로서의 정체성 또한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가 교회 안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나 우리가 가진 권위,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 우리의 열심, 우리가 사역하는 교회의 사이즈 등을 통해서 우리의 사역자로서의 정체성을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결국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가 이해하는 단편적인 관계나 역할, 우리에게 주어진 권위 안에 가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사역자들의 은사나 그들이 사역하는 교회의 사이즈, 혹은 그들이 가진 열심이나 은사들과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사역자됨을 비교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부르심의 소망이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을 제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유혹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내가 왜 고든콘웰에 왔으며, 왜 사역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가 우리를 사역자로 부르신 그 분께서 주시는 그 부르심의 소망을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힘든 순간, 견뎌야 하는 순간에 우리를 인내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내가 왜 여기에서 이 일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순간에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안정감을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의 사역자됨의 정체성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바로 그런 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의 근거를 찾을 때에 조차도, 그 분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이 사역자의 정체성을 이해할 때 중요합니다.
두번째로 사역자의 정체성의 내용으로써의 하나됨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본격적으로 사역자라는 office에 대해서 언급하는 11절 이후 구절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11절 이후에서 여러가지 office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마지막으로 목사와 교사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의 사역자를 가리킬 때에는 이 office를 주로 염두에 두고 말합니다. 사실 목사라는 말의 원어는 목자라고 보는 것이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목자-교사가 결국 공식적인 office의 명칭이 되지요. 특별히 우리가 목자-교사의 office가 가진 의미를 고려할 때 주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목자”라는 말이 가진 역사가 꽤나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문화 속에서 성경을 기록했고, 고대 근동 지역에서 목자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직업이었습니다. 바울이 목자-교사를 교회 내의 주요한 office로 언급한 것이 이런 맥락을 고려한 것이라는데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겁니다. 우리 학교의 교수이기도 한 Timothy Laniak 교수는 그의 책 Shepherds after My Own Heart에서 성경에서 그려내는 목자의 역할을 크게 세가지로 말합니다. 그 세가지는 첫째 양 무리들을 먹이는 것, 둘째 양 무리들을 이끄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 무리들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더 자세하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바울이 목자-교사로 불렀던 사람들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목자-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임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는 것, 이끄는 것, 보살피는 것입니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야 하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야 하며, 또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보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사역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얘기할 때 그 정체성의 구체적인 내용은 당연히 우리가 하는 일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사람들을 이끌며, 보살피는 일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이것이 절대 다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가지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의 주된 목적은 무엇이냐, 하면12절에서 언급하는대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바울은 이미 3절에서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됨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강조합니다. 이 하나됨은 결코 전체주의적이거나 공산주의적인, 모든 다양성과 다름을 무시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삶을 살도록 만드는 하나됨이 아닙니다. 이 하나됨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한 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에만 이루어지는 하나됨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은 쉽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합니다.
일단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릴 겁니다. 다시 정체성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보면, 우리 사역자들이 말씀을 먹이고, 이끌고, 보살펴야 할 사람들은 이미 세상 속에서 자신들 나름대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하나님이라는 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항상 타인을 배제함으로써 생성되고 규정된다는 것이 철학과 사회학, 문학 이론을 망라하는 정체성 이론가들의 공통된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규정짓기 위해서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규정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시안이라는 뜻은 저 사람은 백인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남자라는 말은 저 사람은 여자라는 말입니다. 인종 차별 주의나 여성 차별 주의는 언제 생길까요? 권력을 가진 강자에 속한 그룹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 짓기 위해서 권력을 덜 가진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우위에 점하고자 할 때 생깁니다.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저러한 정체성에의 경쟁과 투쟁 속에서 나름대로 무언가 붙잡아야 할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학력이 좋은 사람들은 학력이 나쁜 사람들과의 비교 우위를 통해서 자신들을 규정합니다. 부자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비교 우위를 통해서 자신들을 규정합니다. 잘 생긴 사람들은 못 생긴 사람들과의 비교 우위를 통해서 자신들을 규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은 이미 비교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이며, 나름대로 우월감과 열등감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게 정체성을 세우는 방식이라는 메세지를 끊임없이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에게 보내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을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에베소서 4장 1절로 6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요?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이미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정체성을 세우는데 익숙해진 상태에서 교회에 올 때, 우리 사역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면서 교회 안에서조차 자신들이 비교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정체성을 세우는 노력에서 자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와 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임무가 이미 언급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먹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또 보살피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사역자들의 정체성은 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세우려는 노력을 멈추고 하나됨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돕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사역자들의 정체성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그림이 다시 한 번 중요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의 구체적인 내용이란, 결국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그 분 안에서 그들이 서로를 받아주고 용납하며, 겸손과 온유 가운데서 오래 참음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복병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역자들인 우리 자신 또한 우리의 정체성을 우리가 비교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들로 세우려는 노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사역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에 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번째로 저는 사역자의 정체성의 불가능함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세상 속에서 살아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비교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들로 우리의 정체성을 세우려고 많이 시도해 왔습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정말로 솔직해진다면, 우리는 정말로 교묘하게 우리가 배운 신학 지식을 가지고, 그리고 우리가 가진 인간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혹은 우리가 경험한 영적 체험들을 가지고, 또는 우리가 태어난 집안이 목회자 집안이거나 장로 집안이라는 것을 가지고,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교회 안에서 우리의 비교 우위를 통해서 사역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갑니다. 이런 시도는 특별히 교회 안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 더욱 심해집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깊이 맺어갈수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약점이나 허점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은 그런 약점이나 허점을 파악하는데 아주 빠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추고 싶어하는 그런 면을 금방 간파하고, 상황이 무르익었을 때, 혹은 더 이상 그들이 우리를 신뢰하지 않게 될 때 그 부분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해서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워가려고 합니다. 당장 바울이 좋은 예가 됩니다. 고린도 후서 10장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는 이렇습니다. 10장 10절입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에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우리가 사역자로서 하는 일이, 혹은 우리의 사역자로서의 인격이 이렇게 공격 당하게 될 때에도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사역자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타의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 형성 과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체성 또한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 외에 붙잡게 된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붙잡고 그들의 공격이나 비난에 맞서려고 할 때 우리는 사역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인 그리스도를 가리킴으로서 교회 공동체가 하나될 수 있도록 돕는 것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개인적인 능력에 호소해서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지켜내려고 할 때,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대신, 우리 자신의 카리스마나 능력을 가리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교회 얘기: 어느 방송국 여직원과 그녀의 상사)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경험하는 사역자만이 용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경험한 사역자만이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 용납함, 오래 참음. 이런 것들이 하나됨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대하시기 위해서 낮아지셨다는 것,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 그리고 나를 끊임없이 지금도 용납해 주고 계시다는 것, 오래 참아주신다는 것을 사역자인 우리가 계속적으로 경험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만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