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라는 소명” (2021년 4월 18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교회를 좀 오래 다니신 분들은 모두 익숙하게 들어보셨고, 또 알고 계신 말씀입니다. 저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긴 했었지만, 본격적으로 아 나는 크리스챤이구나라는걸 의식하게 된 때는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매일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나면 학교 뒤에 있는 교회에 모여서 몇몇 친구들과 기도회를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그 때 친구들을 통해서 특히 대학 입시를 놓고 이 말씀을 종종 함께 나누면서 이 말씀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와 제 친구들이 이해했던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공부에 올인하는 대신,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또 교회에서 하는 모든 활동들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우리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거였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한다는 것은 당시의 우리들에게는 곧 교회 활동을 공부보다 우선 순위에 놓는 것이었고, 가끔씩 우리 학교에 계셨던 선생님들 중에서 우리 교회 집사님이시기도 하셨던 신앙이 좋다고 하시는 선생님들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교회 활동만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께서 너희 원하는 대학을 보내주지는 않는다고 얘기하시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었지요. 결국 교회 활동이나 공부나 둘 다 열심히 해야 하나님께서 너희를 도와주실 거라는게 그 당시 우리에게는 이 말씀, 마태복음 6장 33절이 뜻하는 바였습니다.
시간이 가고 저는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을 다니다가 졸업하지 못한 채 중간에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이 말씀을 간절하게 붙잡고 기도할 만한 일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라는 얘기도 이민 와서 어떻게 하면 먹고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보니 저 멀리 안드로메다 얘기가 되어버리기도 했었고요. 그러다가 제가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건 신학교에 들어가서였습니다. 한창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열심히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마태복음 6:33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라는게 도대체 뭘 가리키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 여기저기 찾아 보다가 좀 더 알게 된 것은 이 말의 의미를 알려면 성경이 말하는 “의롭다”는 말의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식으로 “의롭다”는 말을 쓰지 않더라구요. 우리가 흔히 누군가를 가리켜서 의롭다는 말을 쓸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완전무결하고, 흠잡을 데가 전혀 없다는 의미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은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바꾸자면 “이력” 혹은 “경력”하고 좀 더 가깝다는걸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은 그냥 단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한 말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훨씬 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말, 훨씬 더 우리 일상과 가까이 맞닿아 있는 말이라는걸 알게 됐지요. 어쩌면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은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섬기는 것보다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우리의 관계 맺음이나 마음가짐이 어떤 것이냐와 훨씬 더 관련이 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성경이 의로움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저는 저의 “이력” 혹은 “경력”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됐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도 성경이 누군가를 의롭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이력” 혹은 “경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좀 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로마서 10장 2절과 3절에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희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유대인들이 했던 것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은 것이었다고 바울 사도는 표현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가 서로 반대 관계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에 주목하면 좋겠고요. 여기서 유대인들이 세우려고 했던 “자기 의”라는 것이 하나님하고는 별 상관 없이, 굳이 하나님이 없어도 스스로에 대해서 괜찮게 생각하게 만드는 경력이나 이력이라고 보면 아마 바울 사도가 하려고 했던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좀 더 이해하기가 쉬우실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건, 우리가 “이력” 혹은 “경력”을 드러내야 할 때가 언제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언제 여러분의 “이력”이나 “경력”에 대해서 얘기하시나요? 우선 이력이나 경력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는 때는 일자리를 구해야 할 때, 그래서 잡 인터뷰를 해야 할 때가 있겠고요. 학교에 입학할 때, 또 어떤 경우든지, 내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얘기해야 할 때 우리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경력이나 이력, 즉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의로움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쉽게 풀자면 누군가가 우리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력이나 이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이런 경우는 너무나 흔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흔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집에서도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직장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래서 사실 굳이 이런 공식적인, 학교에 입학하거나 직장을 구해야 할 때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드러내야 할 때 우리의 이력이나 경력, 즉 우리의 의로움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거의 항상 살면서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 사도가 로마서 10장에서 얘기했던 “우리 스스로의 의로움”에 대해서 굉장히 집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식으로 말하자면, 세상과 사람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 존재인지를 쉬지 않고 계속해서 묻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자체가 누가 더 의로운지를 계속해서 묻고 따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의로운 사람, 조금이라도 더 존재 가치가 있는 사람이 더 인정 받고 더 사랑 받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넌 과연 어느 정도의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는 그 질문들의 세례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할 심각하게 강한 압박을 느낍니다. 일자리를 구해 보려고 고민하신 적이 있는 분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고민을 하셨던 분들, 혹은 지금도 그런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은 모두 그 압박이 어떤 건지 뼛속 깊이 체험해 보셨을 겁니다. 이 공간에 있는 분들 중에서 그런 압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그런 압박을 느껴 보았고, 지금도 그런 압박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런 압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는 공부와 일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우리가 일과 공부를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 즉 우리의 의로움을 발견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6장 33절이 말하는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선 이 구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신 것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0장 2-3절을 다시 인용합니다. “저희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흥미로운 점은 바울 사도는 같은 로마서 1장과 2장에서 이미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대신 자기의 의를 구하는데 시간을 쏟고 있고, 그게 바로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왜 죄의 본질적 현상일까요. (일단 로마서 1장과 2장은 너무 길어서 제가 여기서 직접 인용은 하지 않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후에 직접 찾아보시고요.)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존중하고 대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는데 집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 또한 있는 그대로 대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게 됩니다. 왜일까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로움,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우는 일은 항상 세상이 가치 있다고 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하기 마련인데, 결국 사람들을 그렇게 보기 시작하면 사람에 대한 줄세우기를 멈출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줄세우기는 우리가 누군가를 지나치게 우러러보게 만들기도 하고, 지나치게 얕잡아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줄세우기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으로 우리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계속해서 우리를 다그치고 비난하고 재촉합니다. 더 열심히 하라고, 더 너의 가치를 올리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인간으로서 가진 존엄한 가치를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무얼 잘하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지어졌다는 그 사실을 까먹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이나 재능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과는 상관없이 그들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고 존귀하게 대해야 할 이유를 까먹습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의로움과는 상관없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대하는 태도를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 또한 그들의 의로움과는 상관없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대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드라마 중에 TVN에서 2018년에 방송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보신 분들 계신가요? 안 보신 분들은 꼭 한 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연금술사라는 책의 저자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이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트위터에서 정말 놀라운 드라마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는데요. 어쨌거나 이 드라마는 가수 아이유로 잘 알려진 이지은 배우가 이지안이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홀로 인생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다가 삼안 E&C라는 회사에 심부름하는 파견직 말단 사원으로 들어가면서 드라마 커피 프린스하고 파스타로 잘 알려진 이선균 배우가 분했던 박동훈 부장을 만나면서 박동훈 부장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받아주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얘기가 시작되는데요. 그 전까지 이지안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없는 어린 소녀, 생각만 해도 그 소녀가 과연 사회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가 상상이 되는데요. 드라마의 거의 마지막에서 이지안은 회사의 고문들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배경으로 사람 파악하고 별 볼일 없다 싶으면 빠르게 왕따 시키는 직장 문화에서 스스로 알아서 투명인간으로 살아왔습니다 회식 자리에 같이 가자는 그 단순한 호의의 말을 박동훈 부장님한테 처음 들었습니다. 박동훈 부장님은 파견직이라고 부하 직원이라고 저한테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무시 천대에 익숙해져서 사람들한테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고 인정 받으려고 좋은 소리 들으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근데 이제는 잘하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오늘 잘린다고 해도 처음으로 사람 대접 받아봤고 어쩌면 내가 괜찮은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이 회사에, 박동훈 부장님께 감사할 겁니다. 여기서 일했던 3개월이 21년 제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습니다. 지나가다가 이 회사 건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고 평생 삼안 E&C가 잘 되길 바랄 겁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이지안은 우리에게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깊이 공감하는 까닭은 이지안이 말했듯이,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람 대접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 사람답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면서 사는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대접을 받고 살아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사람 대접 해줄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겠습니다. 사람 대접을 받고 살아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사람 대접해 줄 수 있습니다. 박동훈 부장은 이지안의 경력이나 이력을 보고 이지안을 사람 대접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지안이 스스로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박동훈 부장은 이지안을 사람 대접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이지안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는 자기가 왜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찾아낼 길이 없어서 자기의 의로움에 의지해야 했던, 아니 되려 자기의 의로움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어서, 뭔가 세상과 사람들 앞에서 의롭다고 내세울만한게 전혀 없어서 그런 것들을 통해서는 자기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서 결국 자기를 싫어하게 되었던 이지안에게, 박동훈 부장은 이지안이 스스로를 귀하게 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었고, 또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사람 대접해주어야 할 이유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이지안은 자신의 고백 속에서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입니다. “무시 천대에 익숙해져서 사람들한테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고 인정 받으려고 좋은 소리 들으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근데 이제는 잘하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오늘 잘린다고 해도 처음으로 사람 대접 받아봤고 어쩌면 내가 괜찮은 사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이 회사에, 박동훈 부장님께 감사할 겁니다.”
이지안은 박동훈을 통해서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아보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 대접을 받아보고 나니 자기가 사람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구나라는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하고 싶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천시할 때는 자기도 똑같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천시했지만, 그리고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사람 대접을 받고 나니 다른 사람들에게 잘하고 싶어집니다. 감사할 이유가 생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주고 있나요? 여러분이 스스로 내세울 만한 여러분의 의로움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뭔가 내세울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사람으로 대접해준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 또한 그들이 뭔가 내세울 만한 것이 있어야 사람으로 대접할 겁니다. 그건 스스로를 사람 대접하는게 아닙니다. 여전히 스스로의 의로움을 내세우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유대인들이 했듯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겁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뭔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세울 만한 것이 있어서 스스로에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들에게 스스로에게 안정감을 주는 그것, 여러분들의 의로움이 사라지는 그 순간에 여러분은 불안함을 느낄 겁니다.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줄 수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사람 대접해줄 수 없을 겁니다. 여러분이 스스로의 의로움에 기대서 여러분 스스로를 사람 대접하고 있다면, 그건 사실 스스로를 사람 대접하는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력이나 경력과는 상관없이, 여러분의 의로움과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주고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우리가 스스로의 의를 구하느라 바쁜 나머지 우리 스스로도 사람 대접해주지 못할 뿐더러, 다른 사람들도 사람 대접해주지 못하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났다고 선포합니다. 로마서 3장 21절과 22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여기서 율법은 그 당시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로움, 자신들의 경력, 자신들의 존재 가치의 근거로 삼았던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것과는 상관 없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세상 전체가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바치기까지 하면서 선포하신 의입니다. 그 의로움은 우리가 왜 사람 대접 받아야 하는지, 왜 우리가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주어야 하는지, 또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사람 대접해주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줄 수 있는 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력이나 이력, 우리의 존재 가치의 근거가 될만한 것들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주는 것은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없을 때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비하를 낳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비하로도 필연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람 대접 받을 만하게 태어났으며, 그건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너”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너”라고 해서 죄송합니다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건지, 그 분의 의로움이 어떤 것인지를 더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합니다. 너에게도, 너에게도, 너에게도, 너에게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나에게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났습니다. 그건 바로 내가 내 이력이나 경력과는 상관 없이, 내 존재 가치를 둘 만한 무엇과도 관계 없이, 나는 제대로 사람 대접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너도 사람 대접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절대로 그 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 힘은 항상 우리 외부로부터, 우리가 맺는 관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사람 대접해주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줄 수 있는 힘,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사람 대접해줄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우리 모두를 지으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 누구보다 우리 한 명 한 명의 흠과 부족함, 나약함과 약점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분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선포가 우리가 너무나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해서 그 분의 아들을 희생해서라도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는 것이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 우리 자신의 의를 구하는 대신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박동훈 부장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인정해주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것에 우리 삶의 정초를 세우는 것, 우리 삶의 근간을 그 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선포에 두는 일이 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무엇보다도 “먼저,” “먼저” 구하려면 그 의로움이 어떤 건지, 그 의로움이 얼마나 아름답고 달콤한 것인지 우선 알아야 합니다. 그 의로움이 얼마나 추구할 만한 것인지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귀에 들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 의로움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은 이런 겁니다. 심리학은 연구를 통해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사람일수록 사람은 안정감을 가지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모님의 안정적이고 변치 않는 사랑에 자신의 근간을 둔 사람, 거기서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 어려운 일을 겪게 되더라도 위축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주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들 합니다. 왜일까요.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의 근간으로 삼은, 자신의 삶의 정초로 삼은 것이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경험, 바로 사랑 받았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그 사람에게 삶을 살아갈 힘이 되어 줍니다. 여기서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상관 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부모님이 되어 주십니다. 시편 27:10은 말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먼저 추구하는 것은 여러분의 부모님 경험이 얼마나 좋았느냐 나빴느냐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부모님이 되어주셨고, 그 분의 사랑이 흔들리지 않고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랑하심에 자신의 삶의 근간을 두기로 결심하는 사람, 그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랑하심에서 자신의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의 삶의 정초를 둔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자기 삶을 시작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사람 대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람 대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의 사회적 배경에 상관없이, 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피부색이나 성별에 관계 없이, 나이나 장애 여부에 상관 없이, 누구나 다 사람 대접 해줄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모든 사람이 사람 대접 받으면서 살아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누구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란, 하나님의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 자신의 삶의 근간을 두었기에, 거기에서 삶을 시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람 대접하면서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태복음 6:33의 의미는 분명해집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변치 않는 사랑과 은혜를 먼저 경험한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고 너를 사람 대접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그 경험이 깊어지고 넓어져서 마침내 내 삶의 전체 근간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선포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소명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소명과 뗄래야 뗄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먼저 우리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사람 대접해주고, 다른 형제 자매들을 사람 대접하는 법을 배워가라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용납하며 받아주는 경험,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사람 대접해주는 경험이 늘어나면 그 사랑이 저절로 바깥으로 흘러 나갑니다.
요한 일서 4:8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우리 스스로의 의로움을 세우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미 사랑받았고 인정받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고 흔들리지 않으시는 그 사랑에 자기 정체성의 근원을 두고, 그걸 우리 삶의 뿌리이자 근간으로 삼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삶의 모든 관계를 맺어가고 일하고 살아간다는 뜻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삶을 살기 시작하면 모든게 다 달라집니다. 일하는 태도도, 삶을 바라보는 관점도,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모두다 바뀝니다. 이게 얼마나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지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부르심입니다. 그게 우리의 소명입니다. 소명은 어떤 직업이나 커리어의 성취 이전에, 목사나 선교사로 나가는 일 이전에, 새벽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하고 성경을 몇 번 통독하고 봉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 이전에,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삶의 근간을 두고, 거기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바로 거기서 삶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추구하는 일은 바로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며, 그래서 바로 그 일이 우리의 소명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그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우심을 경험하는 일이 시간이 지날수록 넓어지고 깊어지는 일이 충만하게 나타나서, 여러분 모두가 교회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모든 사람을 사람 답게 대하는 일에서 더 지혜가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방식이 되시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분은 아시다시피 저는 6월 20일부터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에 있는 재향 군인 병원에서 원목 생활을 시작하게 되어서 늘푸른 교회 여러분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릴 때가 다가옵니다. 전쟁은 사람에게 몸의 병 뿐만 아니라 항상 트라우마와 중독, 우울증 같은 여러 마음의 병을 남깁니다. 저는 항상 복음이 어떻게 사람의 아프고 힘든 부분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지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공부 또한 이제껏 그런 방향으로 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부해온 것들을 가지고 이제 실제로 사람을 돕고 살리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비록 늘푸른 교회 여러분들과는 이제 헤어지게 되지만, 어디에 있든지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바로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 모두를 지리적 위치에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또한, 그리고 저도, 하나님의 의를 삶에서 추구하면서, 그 분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함께 하기를 바라면서 설교를 마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