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우리 삶에 하는 일 (요한일서 4:8)
안녕하세요 한마음 교회 성도 여러분, 이렇게 제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저는 6월 21일부로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의 VA 병원, veterans affairs 병원이죠, 한국으로 따지면 보훈처인데요, 미국은 보훈처가 아니라 연방 정부에 속한 하나의 부서인데, 아무튼 그 연방 정부 부서에 속한 병원에서 원목으로 일하기 위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스턴에 왔을 때가 2003년이었는데, 벌써 거의 20년이 흘렀다는게 참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이 그 때의 저를 기억하실 정도로 한마음 교회에 오래 계신 분들이라는 사실도 너무나 감사한 점이기도 하고요. 2004년부터 한마음 교회에서 김세환 전도사님을 도와서 유스 그룹 교사로 섬기다가, 김세환 전도사님 졸업 이후에 제가 유스 전도사가 되어서 2008년까지 섬겼던 기억이 선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던 저를 분에 넘치게 사랑해주셨던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한이 없는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텍사스로 옮길 준비를 하면서 저는 제 신앙의 여정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그 덕분에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 신앙의 여정을 돌아볼 때 가장 핵심적으로 깨닫고 알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점인데요. 요한일서 4:8이지요. 제가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을 “사랑이 우리 삶에 하는 일”로 정해 보았습니다. 그 까닭은 지난 저의 신앙의 여정에서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제 삶에 하신 일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일을 통해서 제가 제 삶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 있어서 큰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가운데 한마음 교회와 여러분이 차지하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 중에서 누구를 짚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려는 건 아니고요. 다만 여러분께서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을 지나던 젊은 신학생에게 베풀어 주셨던 사랑이 이후에 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아는데 도움이 되어주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지금의 제가 있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하셨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지난 신앙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가장 강력하게 느낀 점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서 저의 감정이 변하고, 욕망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관계 맺는 방식이 변하고, 꿈꾸는 것이 변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그렇다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내 삶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좀 정리해봐야겠다, 그리고 그걸 여러분들하고 나눠야겠다는 생각으로 사랑이 사람들의 삶에 하시는 일을 크게 세가지로 정리해 보았고요. 그 세가지에 대해서 여러분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점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에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을 찾도록 촉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기보다는 다른 것에서 찾을 때가 많습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이신 분들의 경우 자신이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고 있다는 바로 그 열심에서 자신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사실 그런 사람 중 하나였는데요. 하나님의 사랑이 저로 하여금 오직 그 분의 사랑에서만 저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으라고 촉구하시는 소식이 복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신앙 여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왜 복음이 사람을 바꾸는 소식인지 아주 어렴풋하게 감을 잡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두번째로 제가 깨달은 점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오직 그 분의 사랑에서만 찾으라고 촉구하실 때, 그 분의 사랑은 그렇게 하는 일의 유익, 즉 복음을 믿는 일의 유익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유익은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의 내면은 더욱 튼튼해지고, 쉽게 다른 사람들의 우리를 향한 평가나 평판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히 여러분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세번째 일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오직 그 분의 사랑에서만 찾으라는 그 분의 촉구에 반응해서 그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 지속될 때, 그 결과 우리가 정말로 점점 더 오직 그 분의 사랑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발견하게 될 때, 그 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하는 일의 본질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본질상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일들이지요. 여러분이 비즈니스를 하시든, 회사를 다니시든, 학교에서 공부를 하시든, 그 모든 일들의 본질적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더 이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맞지요?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이렇게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성격을 가진 우리의 일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직장과 가정의 온갖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빨리 승진하려는 모략, 온갖 편먹기,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적 목적에 집중하는 대신, 그 일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을 찾으려고 할 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는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에 목 매는 대신, 우리가 운영하는 비즈니스가 한없이 커지는 것에 온 집중을 기울이는 대신, 직장에서 하는 일 자체가 가진 목적에 좀 더 충실할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를 통해서 우리가 파는 물건들이 어떻게 하면 소비자들에게 좀 더 도움이 될지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그럼 하나하나씩 자세히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에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을 찾도록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에서 우리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는 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비유에 나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큰 형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큰 형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29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형은 지금 아버지와 동생 모두에게 화가 나 있습니다. 왜일까요. 아버지에게는 자기가 아버지의 모든 명령을 다 지켰고, 항상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정작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주는 건 없는 것 같은데다가, 아버지의 말씀을 전혀 듣지도 않고, 심지어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을 떠나서 자기 몫의 재산을 탕진하고 돈이 없어지니 슬금슬금 집으로 돌아온 저 배은망덕한 동생에게는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어주니까 화가 나는 겁니다.
하지만 큰 형 얘기를 좀 더 하기 전에 잠시 탕자의 비유 전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형과 동생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나님과 나름대로 관계를 맺으려는 우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좋겠습니다. 동생의 경우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지 상당히 이해하기가 쉽지요.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것들은 다 하다가 나중에 잘못했다고 빌면서 아버지 앞에 돌아온 아들입니다. 이런 류의 사람은 교회 바깥에 많습니다. 범죄자로 살다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좇으면서 평생 살다가 갑자기 하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아마 이 비유에 나오는 동생과 같은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형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젊은 시절에 신앙을 가지게 되어 평생 교회 안에서 여러가지 봉사를 마다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 새벽 기도에 열심인 사람, 교회 내 소그룹을 항상 이끌면서 열심히 교회를 섬겨온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마 형과 같은 부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봉사 열심히 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살았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몇 년 동안은 그런 오해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기간 살다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의 관계에서 나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발견하려고 하기 보다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헌신적인지, 얼마나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는지에서 나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발견하려고 하더군요. 그러다보니 내 열심이나 헌신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 나쁘다를 저 스스로 평가하려고 하는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저는 저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미묘하고 교묘하게도 저의 종교적 열심과 헌신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이 두가지 있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변치 않는 사랑이고,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성경이 여러 곳에서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열심과 헌신, 노력 여하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바뀔 것 같아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불안합니다. 새벽 기도를 조금만 덜 해도, 성경을 조금만 덜 읽어도, 교회 봉사를 조금만 덜 해도 갑자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안 좋게 보시는 것 아닐지 두려워집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 사도가 “아무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게 정말인지 항상 불안합니다. 봉사를 조금만 안해도, 성경을 조금만 덜 읽어도, 기도를 조금만 덜 해도 불안합니다. 그 뿐입니까. 봉사를 열심히 하면,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기도를 열심히 하면, 우리는 금새 거기서 안정감을 찾고 우쭐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것처럼 느낍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형하고 똑같아 집니다. 큰 형이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15장 29절입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형은 지금 아버지와 동생에게 화가 나 있습니다. 왜일까요.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이제껏 그렇게 열심히 섬기고 헌신했는데도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아버지가 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화가 나 있고, 동생에게 화가 난 이유는 뭘까요. 동생이 자기만큼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동생을 사랑하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여기서 큰 형이 자기의 안정감을 찾고 있는 것, 자기의 자부심으로 삼고 있는 것, 그걸 들고 나와서 자신과 동생을 비교하면서 아버지에게 적어도 동생보다는 나를 더 사랑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건 바로 자신의 열심과 순종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열심과 헌신에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을 찾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우리 주변의 형제 자매들 중에서 우리보다 신앙적 열심이 적어 보이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신앙적 열심이 우리보다 못해 보인다고 해서 그들을 깔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우리의 깔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그 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그 사실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보니 주변의 형제 자매들을 깔보거나, 혹은 우리보다 신앙적으로 더 열심이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열등감을 느끼게 되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 안에만 있다면, 우리는 아무도 깔보지도, 누구에게도 지나치게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여러분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고 계십니까. 이건 너무 이상적인 얘기 아니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앙이라는 건 1)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아닌 다른 것들에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발견하고 있음을 성찰하고, 2)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발견하고자 경주하는 시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당장은 못 느끼더라도 앞으로 5년이고 10년이고 계속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는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산다고 해본다면, 우리의 삶에서 변화가 없을까요? 분명히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삶에 아주 유익한 변화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번째로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유익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유익을 끼치십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주시거나, 성공하게 해주시거나, 명예를 가지게 해주시거나, 우리 자녀를 잘되게 해주시거나 하는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에 가져다주시는 유익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 베풀어주시는 유익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는 일의 유익, 즉 복음을 믿는 일의 유익입니다. 그 유익은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의 내면은 더욱 튼튼해지고, 쉽게 다른 사람들의 우리를 향한 평가나 평판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대신에 다른 것들에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으려고 한다고 해 볼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며,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정체성의 안정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들, 예를 들면 돈이라든지, 좋은 집이라든지, 안정된 직업이라든지, 우리 자녀들이 잘되는 거라든지, 이 모든 것들은 변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흔들리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변하고 흔들리는 것들에서 찾으려고 하면,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은 그 변하는 것들, 그 흔들리는 것들이 변하고 흔들리는 만큼 약하고 무너지기 쉬워집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삼성 전자 부사장으로 계시다가 사장 승진 심사에서 떨어지신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서울대 전자 공학과를 나오시고, 삼성 전자에 입사해서,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이 계속해서 성공 가도를 달려온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걸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사장으로 승진이 될 줄 알았는데 승진에서 밀리면서 느끼게 된 패배감과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여러분, 이 분이 스스로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어디서 찾으셨을까요. 당연히 자신이 계속해서 성공할 것이고,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 왔기 때문에 원하는 인생길이 열리는 것, 성공하는 것이 아마 이 분에게는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이 되어주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렇게 자신이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던 것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 분이 어떻게 느끼셨을까요. 여러분, 우리에게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이 되어주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삶의 의미이자 이유가 됩니다. 그게 사라지는 경험은 우리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경험입니다. 왜 수능 시험을 망친 청소년들이 자살할까요. 자신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던 것, 자신들에게 삶의 의미가 되어주던 것이 사라진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굳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이 되어주는 것들이 사라질 때 극심한 절망에 빠집니다. 이것보다 좀 가벼운 예시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자녀를 대학에 보낸 부모님들이 자주 겪는 어려움 중에 소위 빈둥지 증후군이라는게 있습니다. 영어로는 empty nest syndrome이라고 합니다. 즉 둥지가 비어서, 즉 자녀들이 모두 떠나서 부모님들이 겪는 정신적 어려움입니다. 이 빈둥지 증후군은 부모님들이 자신들의 삶의 이유를 자녀를 잘 키우는 것에서 발견하려고 하다가 어느날 자녀들이 모두 대학에 가고 나면 마치 삶의 의미가 사라진 것처럼 멘붕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비슷한 예로 남자분들이 직장에서 은퇴하고 나면 마치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이제까지 자신의 직업에서 자기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 모두가 흔히 하는 경험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지가 명확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발견하라고 촉구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부터 우리의 직업 대신, 우리의 부모로서의 역할 대신, 우리의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의 역할에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기를 멈추겠다고 다짐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심각한 실패의 순간에 지나치게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실패해도 우리 삶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비록 한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게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변하는 것들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우리를 이런 사람들이 되도록 이끌어줍니다. 다른 이들의 평가에 민감해지지 않게 해줍니다. 그들의 평가가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냐가 그들의 우리를 향한 평가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안정적인 사람, 더 내면이 튼튼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우리 삶에 하는 두번째 일입니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세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서 하시는 일을 나눌 차례입니다. 이미 짧게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오직 그 사랑에서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누리는 유익이 작지 않습니다. 삶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풍파 속에서도 우리가 우리 마음의 닻을 하나님의 사랑에 내리고 인생이라는 항해를 헤쳐나간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크게 좌절하거나 인생이 무너지지 않고 넉넉하게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실상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 4:11-13에서 하는 말씀은 바로 그런 유익, 복음을 믿을 때 우리가 누리는 유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11-13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바로 정확히 우리가 우리의 변하는 상황 대신, 우리가 인생에서 더 가지고 더 누렸으면 하고 바라는 것 대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만족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익이 작지 않습니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인생의 안정감을 제공해 줍니다.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든 쉽게 흔들리지 않게 해줍니다. 내면이 튼튼한 사람이 되게 해줍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줍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분들은, 특히 청년들은 자기들의 직업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야 하는 동기가 사라지는 것 같다고 얘기하더군요. 바울처럼 자기 상황에 자족하고 만족한다면, 지금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뭐냐고 말이지요. 이렇게 반문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저도 그런 반문을 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던 때가 있었으니까요.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직업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는 일 이상이 되었습니다. 일단 우리의 직업이 생계 수단인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직업을 자아 실현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직업이 자아 실현의 수단이 된다는 말은 오늘 제가 나누고 있는 말씀 식으로 풀자면, 우리가 우리의 직업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자기 확인에 대한 욕구, 우리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욕구, 내가 이만큼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세상 앞에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모두 우리의 직업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그런데, 이미 말씀드린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직업 대신 그 분의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의 자아 실현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 분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찾을 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자족할 수 있게 되며, 또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닥쳐도 넉넉하게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우리의 직업은, 우리의 학업은, 우리가 가정에서 하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요. 만약 우리가 일을 통해서, 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을 발견하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해서 답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발견할 때 나타나는 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닮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당신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을 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돈이나 명예, 권력이나 자아 실현의 욕구를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당신을 무작정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우리가 당신만을 사랑할 때 어떤 유익이 있는지 보여주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가 정체성에서 안정감을 누리고 자족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겠고요.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서 서로를 닮아가듯이, 우리도 계속해서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하나님의 사랑에서만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죽기까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의 안정감의 근원을 하나님에서만 찾을 때 하나님을 닮아간다면, 우리의 직업에서도 동일한 일이 일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물건을 파는 분들은 어떻게 하면 물건을 팔아서 더 유익을 남길까를 고민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더 소비자들에게 좋은 물건을 공급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공부하고 연구하시는 분들은 내가 하는 연구와 공부를 통해서 어떤 이웃에 대한 섬김이 있을지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런 고민이 너무 먼 얘기라면, 적어도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려고 연구하려는 동기는 상당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하시는 분들도 그 서비스의 본질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는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일을 주신 그 목적 그대로, 우리의 일은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수단으로 자리하게 되고, 우리는 일이 가진 원래의 목적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복음을 믿는 삶을 추구하면서 제 삶이 점점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거창한 희생이나 큰 스케일의 이웃 사랑을 제가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에는 제 삶의 중심이 어떻게 하면 저 자신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고, 어떻게 하면 제 가치가 올라갈까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복음을 믿고 나서는 점점 더 저 자신에 대한 포커스가 다른 사람들을 향하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제 안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 뿐일까요. 여러분의 삶에서도 사랑이신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나 헌신 대신, 그 분의 사랑에서 우리 스스로를 발견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될 때 우리가 겪는 실패에 지나치게 좌절하지도, 우리의 성공에 지나치게 우쭐하지도 않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빈둥지 증후군이 오려고 하다가도 도망가게 될 것이며,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이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규정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자기 증명 욕구, 우리의 자아 실현 욕구를 채우는 수단이 되어 직장 동료들과 경쟁하고 그들을 짓밟고 올라서는데 집중하는 대신, 우리의 일 자체가 가진 이웃을 섬기는 그 본질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은 평생 따라갈 만한 분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좋은 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이 사랑으로 빚어질 때 가장 행복하며 가장 만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렇게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빚어갈 때 우리의 학업, 자녀 양육, 직업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수단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이런 일들을 하시며, 또 지금도 이런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비록 제가 이제 타주로 거처를 옮기지만, 한마음 교회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받은 사랑이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주시는 행복과 만족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