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과 수평 사이

수직과 수평 사이 (말라기 2:1-9) – 11/24/2019

오늘 본문은 우울하고 어둡습니다. 저주와 심판에 관한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내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3절은 얼굴에 똥을 발라버린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을 알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그걸 하나님의 저주로 이해하면 될까요? ‘하나님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으셔,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나를 봐도 전혀 사랑할 만하지 않고 못난 구석 투성이인데 뭐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 건 하나님의 저주 때문일거야’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이 말씀은 그런 얘기를 하는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아주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의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주시고, 우리가 그 분의 말씀을 잘 듣지 않으면 저주를 베푸시는 분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하나님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면 왜 그 분은 내가 그 분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시고, 그 분 말을 안 들으면 저주를 내리시나요? 내가 그 분 말씀을 잘 들으면 복을 주시고, 말씀을 잘 안 들으면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은 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 아닌가요? 너무나 헛갈립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들은 내가 그 분 말씀을 잘 들어서 일어나는 거라고 봐도 되나요? 반대로 내 삶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들은 내가 그 분 말씀을 잘 안들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라고 봐도 될까요?

사실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와 관계 맺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적어도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같은 본문을 만나면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약간은 흔들리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혹시 최근에 내 신앙 생활이 내 기준으로 보기에 만족할 만하지 않게 느껴지면, 그런 의심은 잠재적인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내 신앙 생활이 내 기준으로 보기에 만족할 만하게 느껴지면, 어쩌면 우리는 저건 내 얘기는 아냐라고 은연 중에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맞춰서 살면 하나님이 우릴 기뻐하실 것 같이 느껴지고, 그 기준을 못 지키면 하나님이 우릴 미워하실 것처럼 느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판 자체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 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야 그 판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건데,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거야 저렇게 하실거야, 이렇게 느끼실거야 저렇게 느끼실거야 하고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별 관계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 마음대로 상정해놓고 그 모습이 진짜 하나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마저도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여전히 우리는 자기 중심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또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본질적으로 그 질문에 대해서 본문이 어떻게 답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질문에 답하려면 세가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우선 하나님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누구에게 말씀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2) 두번째로는, 하나님이 무엇을 문제삼고 계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계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세가지를 이해하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듯 보이는지, 저주의 말씀인듯 보이는 말씀을 마다하지 않는지가 이해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우리가 잘하면 복을 주는 마술사 지니같은 존재로 보거나, 우리가 못하면 벌을 주는 학창 시절의 못된 선생님같은 분으로 보면서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감정이 널뛰기를 하기도 하고, 교회에 오면, 혹은 하나님 얘기만 나오면 왠지 모르게 눌리게 되거나, 하나님 앞에서 항상 죄송한 마음만을 가지고 살게 될 겁니다. 아니면 아예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끄고 살게 될 겁니다. 마음이 괴로운 것보다 그게 훨씬 나으니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든,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닌지 알아야 합니다. 그 점을 기억하면서 본문 이해를 위해서 알아야 할 세가지에 대해서 하나씩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일단 하나님이 본문에서 누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1절에 명확하게 나옵니다. 제사장들이죠. 제사장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양쪽을 중개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개자로서의 역할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변호사 역할과 메신저 역할입니다. 변호사 역할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을 어겼을 경우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는 역할입니다. 메신저 역할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7절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자”라는 말은 메신저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어서 8절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잘 하지 못했다고 고발합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결국 제사장들은 메신저 역할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변호사 역할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는 잘 드렸습니다. 형식을 잘 지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말라기 1장 7절은 그 부분을 잘 보여줍니다. 1장 7절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자, 종합하면 그 당시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백성들을 변호하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오늘 2장 7절이 보여주듯이 메신저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변호사 역할도, 메신저 역할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꾸짖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단지 그들이 변호사와 메신저 역할을 잘 하지 못했다고,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꾸짖으시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좀 더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 계십니다. 일단 메신저 역할을 잘하려면 자신이 전하는 메세지가 나오는 원저자(original author)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결국 제사장이 좋은 메신저가 되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아야 합니다. 또한 변호사 역할을 잘하려면 누구를 잘 알아야 할까요? 자신이 변호하는 대상이 되는 백성들의 사정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백성들을 변호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하나님도 잘 모르고, 사람도 잘 모른다고 꾸짖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환기하고 지나가야 할 점은, 신약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들의 소명, 부르심이 제사장이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이 그렇게 말합니다. 2장 9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건지에 대한 자세한 논리는 제가 올해 6월에 한 번 설교하면서 자세히 다뤘기 때문에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6월에 했던 설교가 제 유튜브에 올라와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서평 쓰는 남자를 치고 들어가시면 나옵니다. 뭐, 그건 그렇고요. 오늘 해야 할 중요한 얘기는 우리가 흔히 우리의 직업과 거의 동일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부르심, 소명 안에 제사장이 되는 일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이 어떻게 펼쳐져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봤나요? 제사장으로서 부르심 받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이에서 변호사와 메신저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을 향해서는 세상의 사정을 변호하고 세상을 위해서 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으로 부르심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도록 부르심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게 제사장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하는 일이 부르심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서 어떻게 변호사와 메신저의 역할을 잘 감당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게 더 중요한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사실 변호사와 메신저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여러분의 직업 영역에서도 불성실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업이나 공부에서 크게 성공하는게 제사장의 부르심하고 그렇게 깊은 상관 관계가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성공한다고 하나님을 잘 알게 되지는 않으니까요. 부러워는 하겠죠. 그리고 내가 나의 성공을 하나님께 돌린다면, 궁금해는 할 겁니다. 자신들도 성공하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말이죠. 그건 하나님에 대한 신앙하고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마음만 커지겠죠. 하지만 적어도 성실하게 맡은 일을 해내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죠? 그런 차원에서 직업이나 공부를 부르심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변호사이자 메신저로서, 제사장으로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건 무슨 뜻인지를 알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변호사와 메신저 역할을 잘하려면 하나님을 잘 아는 만큼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해와 인간 이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그게 우리가 가진 신앙의 핵심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뭐죠? “수직과 수평 사이” 입니다. 수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수평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뜻합니다. 둘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수직 관계가 좋다는 증거는 수평 관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수평 관계가 자꾸만 망가지고 힘들다면, 사실 수직 관계가 별로 좋지 않다는 뜻일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수직 관계에서 세워놓은 기준을 잘 충족시키고 있고, 아무리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이 정도면 기뻐하실 것 같아 보여도, 그 사이에 수평 관계가 망가지고 있다면? 사실 내 신앙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수평 관계가 좋다는 말은 단지 내가 모든 사람과 관계를 잘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수평 관계가 나쁘다는 말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안 좋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관계는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편에서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저주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생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람들을 향한 분노나 비난이 쌓여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건 저 사람 때문이야, 난 아무 잘못 없어라는 생각이 나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느냐는 겁니다. 사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초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게 사실 오늘 본문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그렇죠? 이제 두번째로 해야 할 얘기, 즉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어떤 것을 문제 삼으시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게 본문의 핵심 내용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즉 우리들에게 어떤 것을 문제 삼으시는 걸까요? 본문을 읽어보시면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하시는 얘기는 자명합니다. 7절과 8절을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정확히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잘 몰라서 사람들에게도 잘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수직 관계가 잘못 되면 수평 관계도 잘못된다는 말씀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 하나님은 저주가 내려질 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요한 일서 4장 8절 말씀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사랑이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더군다나 그 분이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도 제사장들에게 저주를 내리실 수 있는 걸까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저주를 내리시는 걸까요? 그게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어려워보이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말에 대해서, 그리고 그 분이 우리와 맺으신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서의 우리와 맺으신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은 본문의 4절과 5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언약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언약’이라는 말이 요새 잘 쓰지 않는 말이라서 잘 와닿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성경은 언약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쉽게 알려주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자주 표현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결혼 관계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언약은 관계입니다. 그것도 아주 친밀한 관계, 서로 헌신하기로 약속한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관계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 밖에 없는게, 하나님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스스로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의 신도 자신을 사랑 그 자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직 기독교의 신만이 스스로를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가 사랑의 본질이시면서도, 우리를 그 분과의 관계, 즉 사랑이신 그 분과 관계 맺는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의 본질이 사랑이라는걸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관계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랑이신 그 분과의 관계에서 멀어진 이들은 사랑이 아닌 것에 마음을 두기 시작합니다. 2절에 나오죠? 제가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만일 사랑이신 그 분을 듣지 않고, 그 분에게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그 말은 바꿔서 말하면 결국 우리가 다른 것들, 사랑이 아닌 것들을 듣고, 사랑이 아닌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아닌 것들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자기만 사랑하는” 자기 중심성이 사랑이 아닌 것들의 대표적인 예라고 말합니다. 디모데 후서 3장 2절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이 모든 것들은 다 자기만 사랑하는 자기 중심성에서 나옵니다. 그렇죠?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우리 중심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욕심이 생기지요. 성공하려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계획이 머릿 속에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를 서슴치 않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내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봅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가 어려워집니다. 모든 사람을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나에게 반대하면 모두 다 잠재적인 적으로 취급합니다. 나보다 뭔가를 조금만 더 잘하는 것 같으면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경쟁합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서로 박터지게 싸웁니다. 평생 갈등 관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뭔가 잘하는 사람들은 깎아 내리고 약점을 잡아서 무너지는 나의 자존감을 방어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똑같이 합니다.

이런게 말라기 2장에서 말하는 저주입니다. 야고보서도 똑같은 말씀을 합니다. 1장 14-15절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즉 말하자면, 죄는 사랑이신 그 분에게서 멀어진 결과, 자기 욕심으로 자기 중심성을 지켜내려는 모든 마음 자세와 행위, 관계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이런 저주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걸까요?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걸까요?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겁니다. 왜 그렇지요? 사랑은 본질상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지 못합니다. 그 분은 당신과의 관계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누리고 즐기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 분과의 관계를 즐기고 누리라고 초대하고 초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그 길로 이끌어지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걸어가게 되는 길이 바로 자기 중심성의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존재가 되면 될수록 우리와 부딪히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그러면 인생이 피곤해 집니다. 아니 그에 앞서서 우리 마음이 피곤해집니다. 계속 누군가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싸우지는 않더라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는 마음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게 저주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해결책에 대해서 살펴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결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3) 답은 의외로 간단하게 들립니다. 즉 하나님과 맺은 언약, 즉 그 분의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의 사랑을 누리는게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아닌 모습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사랑을 사랑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니 잠깐 접어두고요. 여러분, 신앙은 다른게 아닙니다.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는건지 배워가는게 신앙의 처음이자 끝입니다. 그냥 교회 나오고 종교 생활하는게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원동력 삼아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이미 말한대로, 수직 관계가 잘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수평 관계입니다. 그래서 본문 6절이 말이 됩니다.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6절이 하는 말은 하나님의 길을 잘 알게 되었더니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 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 맺는 이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삶이 우리의 삶이 되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생명과 평강입니다. 따라서 그 분과의 관계를 즐기는 것, 즉 그 사랑을 잘 누리는 것이 축복입니다. 사랑이신 그 분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랑을 잘 누리면 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갈수록 내 주변 사람들도 거기에 영향을 받겠지요? 우선은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친구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5절은 하나님과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분과의 관계 안에 머문다는 것은, 바꿔서 말하면 우리가 우리를 옭아매고 갉아먹는 자기 중심성에서 점점 더 자유로워진다는 말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아닌 모습을 더욱 더 명확하게 보게 됩니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마치 자식이 부모를 닮아가듯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닮아 가듯이, 하나님 자식이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배우자가 되어 갑니다. 사랑이 우리의 삶에 점점 더 스며들어 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믿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단 한가지 증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것만 보면 됩니다.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은 얼핏 들으면 좀 웃기게 들립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해 갈 수 있을까요? 그냥 사랑하면 되는거지, 무슨 성장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데, 우리는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태도 세가지를 지적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인생의 판을 바꾼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때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두번째로 사랑하는 일에 겸손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내 안에 사랑을 가로막는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 세가지는 사실 같은 얘기들입니다. 결국 내 안의 자기 중심성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인데, 이 자기 중심성이라는 괴물이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세가지로 표현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번째, 하나님의 사랑이 내 인생의 판을 바꾼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흔히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흔한 좌절 중 하나는 왜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것들을 별로 들어주시지 않는 걸까라는 실망감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실망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간절히 바랬는데, 하나님은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전혀 들어주지 않으셔!”라는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미움과 오해를 낳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인생의 실패 속에서 하나님께 세번째 손가락을 세워들고 흔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런 질문과 물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한가지는 신앙이 내 인생의 판을 바꾸는 놀라운 관계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라고 할 때 그 분이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면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계시는게 뭘까요?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다 들어주시는 걸까요? 이렇게 얘기해 보죠. 여러분들 중에 아이가 있으신 분들도 있고, 없으신 분들도 있는데, 여러분들이 아이가 원하는 것들을 다 해주면 그 아이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갈까요? 아니면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갈까요?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갈 확률이 더 높겠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부모가 모두 들어주면 그 아이는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갈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들어주실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여러분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들어주는데 있지 않고, 여러분이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어가도록 여러분을 바꾸어 가시는데 있다는 점을 이해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많이는 아니어도 조금은 풀립니다. 더군다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화가 나 있거나, 삐져 있거나, 혹은 의기소침해 있거나 하는 그 모든 모습들이 여전히 우리의 지독한 자기 중심성의 증거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생의 판이 우리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여전히 우리 중심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며, 저울질합니다.

그런데, 신앙이라는 관계는 인생의 판이 바뀌었다는 점을 철저히 알고 깨달아 가는 관계입니다. 더 이상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내 기준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때 반사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시 누그러 뜨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상황과 관계를 통해서 나를 더 당신의 사랑을 닮은 사람으로 바꾸어 가실지를 기대합니다. 내 욕망과 어젠다, 내 계획과 바라는 바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심하게 삐지지 않습니다. 물론 조금 삐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삐짐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알아가도록 이끕니다. 왜 그러셨느냐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묻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우리 인생이 더 이상 우리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원하고 바라며 간절히 기도했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섣불리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구나 하고 자기 비하를 일삼지 않습니다. 인생의 판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이시고, 우리는 그냥 그 분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목표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시는데 있지 않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분처럼 사랑하는 존재들이 되어갈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이 점을 명심하고 신앙 생활을 하신다면, 좌절스러운 일들이 터져도, 설사 잠시 동안 하나님께 분노하고 실망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그 중심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랑 그 자체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오래 참고 기다리는 일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가 나 중심의 세상에서 벗어나도록 이끕니다. 사랑은 내가 나 중심으로 짜놓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판이 바뀌었습니다.

두번째, 사랑하는 일에 겸손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문학가인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rue humility is not thinking less of yourself, but thinking of yourself less.” 한국어로는 이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낮춰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전보다) 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은 우리 자신을 낮춰서 생각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남이 우리를 칭찬해줄 때 “아니예요. 제가 한 것도 아닌데요 뭘”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일을 뜻합니다. 그건 사실 겸손한 척일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진정 겸손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잣대는 되지 못합니다. 사실 진정 낮아질 수 있으려면 내가 낮아져도 괜찮을 정도로 나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어서 낮아지는 일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가치가 그것밖에 안되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면 분노가 생기기도 하고, 더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 내 가치가 더 떨어지겠구나 하는 두려움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는 결국 오직 나를 인정해주고 받아주며 내 가치를 높게 보아주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충분히 누릴 때에만 극복 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인정해주시고, 받아주시며, 우리의 가치를 높게 보아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 그 분과의 관계에 여러분 인생의 기초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평가가 좋지 않게 나와도 쉽사리 실망하거나 자기를 비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경우에도 나를 인정해주고 받아주며 내 가치를 높게 보아주는 그 분이 계시다는 사실은 점점 더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의심하는 식으로, 혹은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일이 줄어들게 만듭니다. 이 말은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가치를 낮춰서 평가하는 것을 들었을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감히 나를 저런 식으로 대접해? 내가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겠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 생각의 방향성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까요? 나를 향하고 있죠? 나를 저런 식으로 대접하다니! 내가 어떤 인간인지, 본때를 보여주마!라는 생각은 철저히 자기 중심성을 띤 생각입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나에 대해서 신경 쓸 경우는 다른 이들이 나에 대해서 충분히 신경써주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 다른 이들이 나의 존재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느낄 때 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우리의 자기 중심성은 그 절정을 칩니다. 모든 생각의 방향이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증명하고 말겠어”라는 방향으로 기울면, 사랑하는 일에서는 저절로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 중심성의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해 되시나요? 아울러서 이런 자기 중심성은 겸손과도 정반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겸손이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별로 신경쓰지 않는 마음, 내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으로 남들에게 비춰지든 그렇지 않든, 별 신경쓰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나 스스로의 reputation에 대해서 별 신경을 쓰지 않으려면 그만큼 내 영혼이 닻을 내리고 있는 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든든하고 묵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기뻐하시리라” 우리가 이 말씀에 우리 인생의 닻을 내리면 내릴수록 우리는 자기 중심성에서 멀어지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신경쓰기 보다는, 다른 이들을 더 신경쓰고 사랑하면서 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우리 스스로에게 다른 어떤 관계보다 중요해지고 있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신경 쓰는 일에서 자유로워지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데 신경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여러분 인생의 닻이 되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면, 그 닻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는 다른 이들의 평가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는 지겨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안에 사랑을 가로막는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사랑하는 일에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 안에는 사랑이 아닌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막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은 신기하게도 우리가 남들을 판단하는 바로 그 기준이 됩니다. 내가 사람을 볼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내가 누군가와 가까워져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저 사람하고는 친해지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여러분들 중에 무언가가 굉장히 중요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 혹은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심하게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분이 계신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서,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인간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시간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게 과연 사람을 지독하게 혐오하게 만들 정도로 중요한 일일까요?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시간을 잘 지키라고 말하면 될 일이지 그게 사람을 지나치게 싫어하고 혐오하게 만들 근거가 될까요? 저희 아버지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직하라는 가르침을 항상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비록 제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진 않았지만, 여러분은 모두 스스로에게서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영어로는 pet peeve라고 하죠. 우리가 어떤 기준을 지나치게 강하게 세워놓고 그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다보면, 우리는 그 사람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물론 시간을 지켜야 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지적해야 하고요. 하지만 그게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을 아예 친구로도 지낼 가치도 없는 존재로 낙인찍게 만든다면, 여러분은 사랑이 아닌 자기 중심성의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내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에는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5장 7-8절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지독하게 자기 중심적인 존재이고, 하나님은 자기 중심성을 가장 혐오하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주셨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한다면, 우리가 극도로 혐오하는 무언가를 행하는 사람이 단지 우리가 혐오하는 일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일을 멈출 수 있습니다.

여러분, 수직과 수평 사이의 간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 이 두 관계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직 관계는 보이지 않는 관계이기에 섣불리 알 수도, 판단할 수도 없지만, 수직 관계를 우리가 잘 즐기고 누리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우리가 맺는 수평 관계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사랑이 아닌 것들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겸손하지 않은 존재인지 얼마나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우리는 신앙이 우리 인생의 판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아름다우심을 더욱 더 보게 되고 깊이 알게 될 때에만 우리의 수평 관계 또한 사랑으로 점점 더 채워져 갈 수 있습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서평 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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