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승리냐 소망이냐 (요한 계시록 7:15-17) – 12/08/2019
요한 계시록은 참 신비하고 어려운 책입니다. 난해한 코드처럼 보이는 이미지들과 상징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종교 개혁자이자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인 장로교 신학의 토대를 세운 신학자로 평가받는 쟝 칼뱅은 자신은 요한 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쓰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이 풀어내기엔 너무 어려운 책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상징이나 코드들은 굉장히 공포스럽습니다. 그래서 대중 문화, 특히 미국 대중 문화 안에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주제들을 소설로 만들고, 그 이후에 영화화 시켜서 성공한 작품들이 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Tim Lahaye와 Jerry Jenkins의 소설인 Left Behind 시리즈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 성도님들 중에 그 소설을 보신 분들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날 나와 친한 사람들, 내 주변 직장 동료들이 모두 휴거, 즉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땅에는 나만 남게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남아 있기는 하지요.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고,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닥칠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견뎌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나 소설의 재료가 될 수 있을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다가올 심판이 어떤 것일지에 대해서 두려움에 떨게 만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만약 저런 심판이 요한 계시록이 말하는 바가 맞다면, 그리고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나는 만약 휴거되지 못한다면, 즉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떨리게 만듭니다.
아울러서,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이야기 중에 우리의 공포심과 불안감을 자극하는 주제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바로 666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13장에 짐승의 이름이 새겨진 표라고 나와 있죠. 그래서 흔히 교회들에서 지금 모든 물건의 뒷면에 찍혀 있는 바코드가 바로 그 666이라고 하면서, 앞으로는 사람의 이마나 손목에 바코드를 새겨 넣어서 그걸로 물건을 사고 팔게 할 것이고, 그게 바로 요한 계시록이 말하는 666이라는 얘기가 굉장히 널리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 계시록이 이렇게 그 독자들에게 공포심과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일까요? 짐승의 수인 666은 바코드를 우리의 이마나 손목에 받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제 다음 주 설교 주제이자 제목이 666이니까 그 때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신뢰하는 이들에게 심판의 공포와 불안감을 조성해서 하나님을 억지로 따르도록 위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 중에 공포나 불안감 때문에 억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들 중 몇몇은 처음에 하나님을 믿게 될 때 그런 잘못된 감정적 동기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해서 마지못해 하나님을 따르게 되기도 합니다만, 시간이 가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게 되면 될수록, 자신 안에 있었던 그런 감정적 동기가 얼마나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 점점 더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걸 알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전혀 분노하시지도 않고 심판하시지도 않는, 항상 허허 웃으시기만 하는 KFC 할아버지같은 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히 사랑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분노하시며, 또 사랑이 아닌 것들을 끝까지 고집부리면서 추구하는 사람들을 결국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아닌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자기 욕심과 욕망으로 똘똘 뭉친 나머지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이나 배려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그 존재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내 목적을 위해서 이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느라 평생을 허비하면서 살다 가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시라면, 히틀러같은 인물을 심판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무고한 유대인들을 6백만명이나 가스실에 가둬놓고 죽인 그런 인물, 혹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처녀들을 데려다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부려먹어놓고도 지금도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그런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장담하건대,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않을실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들을 거부하고, 사랑이 아닌 것들을 끝끝내 추구하면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런 심판을 최대한 미루십니다. 디모데 전서 2:4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 맞으시다면, 그 분은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사랑이 아닌 길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계속해서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얘기한대로, 하나님이 사랑이 맞다면, 그 분은 사람에게 자신의 길을 강요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끊임없이 사람을 초대하시기만 할 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가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그 분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우신 분인지, 지혜가 넘치고 온화하시면서도 불의를 참지 못하시는 분인지 깨달아 갑니다. 그 분이 사람을 이끄시는 방식은 항상 사랑을 통해서라는 점을 배워갑니다. 그런 면에서 Left Behind는 소설이라는 차원에서 참 창의적이고 내용이 잘 짜여진 좋은 소설이고, 또 영화화가 되서 성공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Left Behind에 나오는 내용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책인 요한 계시록이 쓰여진 원래 의도를 잘 반영했거나, 혹은 계시록의 내용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성경으로 큐티를 하시는 분들은 혹시 매일 성경에 담긴 계시록을 소개하는 짧은 글을 읽어보셨나요? 백석대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치고 계시는 이우제 교수님의 글인데요. 요한 계시록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큐티를 해나가기 위해서 그 글을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대해서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통 받고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위로하시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삶. 본문이 말하는 그런 삶은 하나님께서 중심에 계시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행복한 삶에 하나님이 꼭 필요하다는데 동의하시나요? 하나님은 오히려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에 걸림돌이 되시는 분은 아닌가요? 휴일이나 주일에도 마음 편하게 좀 놀고 쉬고 싶은데, 교회 행사 참가해야 되고, 예배 섬겨야 되고, 뭔가 하려고 하면 교회가 걸리고, 하나님이 걸리고, 하나님은 혹시 여러분들의 행복을 막는 분, 쉬지도 못하게 하는 분이라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왜 우리의 삶이 행복해지는데 꼭 필요한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단 본문이 묘사하는 그림은 하나님과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묘사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그려지지요. 그게 어떤 이미지일까요? 그 이미지는 우리 각자에게 다른 느낌이나 감성을 전달합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고, 본문이 묘사하는 이미지가 과연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일단 오늘 본문이 어떤 이미지를 그려내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가진 삶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슬라이드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슬라이드는 행복한 가족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광고는 LG에서 나온 어떤 제품에 대한 광고인 것 같습니다. 아마 3-D 입체 안경으로 볼 수 있는 TV 같은 것에 대한 광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온가족이 함께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팝콘을 먹으면서 무언가를 봅니다.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고, 행복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아빠 엄마, 아이들까지 모두 함께 모여 있습니다. 심지어 키우는 강아지도 3-D 입체 안경을 쓰고 보고 있네요. 행복한 모습입니다. 다들 건강해 보이고, 서로 굉장히 사랑하고 아껴주는 듯이 보입니다. 이 광고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일단 이 광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행복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대다수가 이런 모습이 행복한 모습이라는데 동의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LG처럼 큰 회사가 이런 이미지를 자신들의 제품을 위한 광고에 사용하지 않겠지요. 이런 대기업의 마케팅 담당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광고를 보고 제품을 사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이 광고는 이렇게 행복한 삶의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게 행복한 삶이야’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런 행복한 삶의 그림에 자신들의 제품을 슬쩍 끼워 넣습니다. 그리고 이런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세요? 우리가 파는 제품을 구입하세요.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이런 메시지는 이미지로 전달되면서 더 강력해집니다. 그 까닭은, 이미 우리는 어떤게 행복한 삶인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다 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광고들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행복한 삶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의 공감을 얻어내고, 거기에 자신들이 만든 제품을 끼워넣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그 제품을 구입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무언가를 사는 것 그 자체로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우리가 구입한 그 제품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제품을 구입하겠지요. 이런 이미지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원동력을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복한 삶의 이미지는 우리 안에 ‘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게 만들거든요. 사실 LG에서 나오는 저런 광고들이 사람들에게 먹히는 까닭은, 저런 광고들이 사람들 안에 있는 행복한 삶에 대한 그림을 자극해서, 그들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려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합니다.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저런 행복한 삶의 그림을 실제 자기들의 삶이 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사실 그게 우리가 사는 삶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흔히 회자되는 “이게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지”라는 말에는 우리 삶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모두 먹고 사는 일과 상당히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요. 문제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입니다. 요는,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행복한 삶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있고, 그 그림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예전에 어릴 때에는, 몇 살에는 어떤 걸하고, 몇 살에는 어떤 걸하고, 몇 살까지는 이 정도 경제적 수준을 이룰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꿈 중에서 이루어진 것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또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로 하여금 이렇게 열심히 살게 만드는 욕구는 도대체 왜 생기는 걸까? 그냥 남들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열심히 사는 건가요? 부모님과 친구들이 다들 열심히 사는게 좋다고 하니까? 아니면 여러분 안에 어떤 삶이 좋은 삶이고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래서 그런 이미지를 실제로 우리 삶에서 이루고 싶어서 열심히 삽니까?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사는 이유가 하나님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살면서 이루려고 하는 목표는 하나님과 얼마나 관련이 있습니까? 또 이렇게 바꿔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꿈꾸고 그리는 행복한 삶의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고, 꿈꾸게 만들고, 무언가를 바라게 만드는 행복한 삶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주된 원동력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더더군다나 이런 삶의 이미지를 아는 것은 신앙에도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시기 때문입니다. “너가 꿈꾸는 행복한 삶은 내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삶이니? 그냥 너 혼자서 너만의 노력과 성취로 이룰 수 있는 삶이니? 그렇다면 너가 꿈꾸는 행복한 삶에서 너가 나를 믿는다는 말은 너에게 무슨 뜻이니?”
여러분,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바로 이런 질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꿈꾸는 행복한 삶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되는, 그런 분인가요? 아니면 그냥 내가 세워놓은 삶의 행복한 그림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내가 기도하고 그 분을 섬기면, 그 분은 그런 섬김에 대한 대가로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시는 분이신가요? 이 질문들은 지난 설교에서 얘기했던대로, 신앙은 내 삶의 판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여러분, 저는 고등학교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 정말 나름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제가 그 분을 열심히 섬긴 만큼, 수능 시험에서도 원하는 점수를 맞게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일에 하는 저녁 예배에 가느라 야간 자율 학습을 빼먹고, 다음 날 선생님께 불려 나가서 매를 맞는 일이 저에게는 아주 흔했습니다. 저는 그만큼 그 분을 잘 섬기고자 했고, 그 분을 섬기는데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섬김과 열정이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게 해준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열심히 섬겼으니 반드시 나에게 좋은 수능 점수를 받게 해주실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막상 수능 점수가 나왔을 때 그 결과는 제가 원하는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정말 망한 수준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 교회에 목요 찬양 예배가 있었는데, 저는 목요 찬양 예배에 가서 펑펑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 당신을 그렇게 열심히 섬겼는데 나에게 이런 수모를 주시느냐 하면서 따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저에게 여전히 하나님은 제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제가 그려놓은 그림이 잘 이루어질 수 있게 협조해주셔야 하는 분이었습니다. 비록 제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 분을 위해서 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나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내가 짠 판에서 내 뜻대로 움직이셔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내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그 분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 분이 짠 판에서 내가 살아가는게 아니라, 내가 짠 판에서 그 분이 내 계획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그 분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나의 계획과 내가 그려놓은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 그 분을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에 대한 저의 열정과 헌신은 정말 어느 때보다도 컸는데 말입니다. 그 이후,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저절로 그 분에 대한 사랑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내 삶의 판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더 이상 내가 짜 놓은 계획에 따라서 나만의 행복을 위해서 제때제때 움직여주는 지니 인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짜놓은 판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우리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그려놓은 행복한 삶에 대한 그림에 하나님을 끼워맞추려고 합니다. 물론 그 결과는 많은 경우 하나님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실망이고, 심할 경우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 스스로가 짜놓은 인생의 그림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는 겁니다.
자 여러분, 그러면 과연 하나님이 계신 행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그런 인생이 무엇인지 알려면, 우리는 앞에 얘기한 그 광고가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광고를 비롯해서 세상이 우리에게 주입하려고 하는 행복에 대한 그림은 삶의 어떤 부분을 애써 감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오늘 요한 계시록 본문은 그 광고가 감추려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요한 계시록 본문이 드러내는 것, 하지만 저 광고는 감추는 것, 그건 과연 무엇일까요?
단적으로 말하면, 거기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요한 계시록 본문은 삶의 고통과 고난의 현실을 드러내는 반면, 저 광고는 그런 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두번째로 요한 계시록 본문은,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의 행복에 대해서 말하지만, 저 광고는 행복은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저 광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더 가지라고 말하지만, 요한 계시록 본문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고난과 고통이 흔들어 놓을 수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관계 위에서 행복의 그림을 그리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요한 계시록이 말하는 삶의 행복은 고통과 고난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과 고난이 우리가 행복의 토대로 삼은 것들을 앗아갈 때, 그런 고통과 고난이 앗아갈 수 없는 관계에 우리 행복의 근간을 둠으로써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제 그 세가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각각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번째, 요한 계시록 본문은 삶의 고통과 고난의 현실을 드러내는 반면, 저 광고는 그런 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같은 계시록 7장 14절은 말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여기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신실하게 믿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큰 고난이 닥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겪는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이 그 분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벌이 아닙니다. 단지 피조계가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피조계 전체가 맞게 된 결과일 뿐입니다. 고통과 고난은 피조계가 하나님을 떠나면서 맞게 된 결과이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벌을 내리신다면, 로마서 8:1 은 왜 이렇게 얘기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우면서도 암울한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고통이나 고난을 많이 당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게 바로 디모데 후서 3:12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디모데 후서 3:12은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핍박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는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만나는 우리의 이웃들을 더 사랑하게 되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이웃을 더 사랑하느라 자신들의 유익을 침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를 핍박하고 괴롭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에서 몇 년 전에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서 수많은 아이들이 죽은 적이 있었습니다. 1994년 한국의 한 회사가 18억원을 투자해서 물에 첨가하면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완전히 살균해주는 일명 ‘가습기 메이트’를 개발했다고 발표합니다. 당시 그 회사는 국내 최초일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로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했다고 엄청나게 홍보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가습기가 필요한 가정에서, 특별히 건조한 환경이 좋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들이 가습기 살균제를 정말 많이 구입합니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굉장히 많은 아이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2018년 6월 기준, 총 피해자의 숫자는 4748명입니다. 그 가운데는 정말 완전히 삶을 망쳐버린 아이들도 꽤나 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신앙인인데 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금 밝혀지고 있는 것은, 가습기 살균제 회사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제품이 어떤 피해를 사람들에게 끼칠 것인지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신앙인으로서 이런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의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의미일까요? 회사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모든 직원들에게 돈으로 회유하거나, 아니면 가족, 특히 자녀에게 해를 가할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이런 상황이 저나 여러분에게 닥친다면, 과연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길로 쉽게 걸어갈 수 있을까요? 이런 일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우리가 속한 직장에서 방금 가습기 살균제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돈을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길로 가고자 할 때 거기서 쫓겨나거나 위협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길로 가는 겁니다. 이렇게 살려고 하면, 당연히 핍박이 따릅니다. 당연히 고난이 많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당연시되어버린 세상에서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의 생명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우선시한다는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입니다. 그 길을 걷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하려는 사람,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는 고난과 핍박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고난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런 고난과 핍박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눈물을 닦아주실 거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가습기 살균제 회사의 직원인데, 회사 기밀을 폭로해서 여러 피해자들이 제대로 보상을 받게 됐지만, 여러분은 피해를 입고 회사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가족도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의 삶은 사회적으로 보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때 그런 죽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길을 걸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고 일으키실 거라는 소망입니다. 그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피해를 입어야 하는 그 길을 흔들림없이 걸어갈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3:14은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39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두번째, 요한 계시록 본문은,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의 행복에 대해서 말하지만, 저 광고는 행복은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만약 저 광고가 얘기하는대로, 행복이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굉장히 불안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의 삶에서 고통이 닥치지 못하게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아무리 고통에서 피하고 도망치려고 해도, 고통과 고난은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때에 우리를 찾아옵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삶에 고통과 고난이 불시에 찾아온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은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통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통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을 하고 살면, 우리는 고통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고통이나 고난이 우리 삶에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저자들은 고통이나 고난에 대해서 두려워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이나 고난이 삶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4:22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 하고” 성경 어디에도 바울이 고통이나 고난을 두려워 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잃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4:11-12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어떻게 고통이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삶이 고통이나 고난 때문에 망하지도, 끝나지도 않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에게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 소망을 두면,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소망은 끊어집니다. 그리고 행여나 고통이나 고난이 우리가 소망을 두고 있는 것들을 앗아가기라도 할까봐 노심초사 합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4:18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러분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걸어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들에게 오늘 본문처럼 하십니다. 17절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마지막으로, 저 광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더 가지라고 말하지만, 요한 계시록 본문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고난과 고통이 흔들어 놓을 수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관계 위에서 행복의 그림을 그리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는 비록 고난과 고통이 많을지언정, 흔들리지 않는 행복이 자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17절이 말하듯이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뉴욕 리디머 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섬기셨던 팀 켈러 목사님은 당신의 책 “고통에 답하다”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에 인생의 의미를 둘 때만 고난을 견뎌 낼 수 있다. 이는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고난이 파괴할 수 없는 본질’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난은 사랑과 기쁨, 안전처럼 인간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토대들을 앗아가 버린다.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평정심, 더 나아가 평안하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에 정답이 숨어 있다.”
여기서 켈러 목사님이 말하는 ‘인생의 의미’나 ‘목적’같은 단어들을 ‘행복에 대한 그림’으로 바꾸기만 하면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요한 계시록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가 됩니다. 제가 그 단어들만 행복으로 바꿔서 읽어보겠습니다. “죽음이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에 행복에 대한 그림을 둘 때에만 고난을 견뎌낼 수 있다. 이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고난이 파괴할 수 없는 본질’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난은 사랑과 기쁨, 안전처럼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로 하는 것들을 앗아가 버린다.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평정심, 더 나아가 평안하고 행복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에 정답이 숨어 있다.” 그 정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켈러 목사님이 이미 말씀하신대로 고난과 고통이 파괴할 수 없는 것 위에, 그 관계 위에 우리 삶의 행복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행복한 삶에 대해서 가진 그림에 안전과 안정, 평안이나 풍요같은 것이 절대적이라고 한다면, 명심하십시오. 고난과 고통은 여러분이 그려놓은 행복한 삶에 대한 그림을 언제든지 앗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 위에 행복한 삶의 그림을 그리면, 우리는 고통과 고난이 우리의 삶에 찾아올 때, 행복을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안전과 안정, 풍요와 평안을 고난과 고통은 충분히 가져가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1) 첫째, 인생에는 고난과 고통이 일어나는 것이 흔한 일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2) 두번째, 인생에 고난과 고통이 많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니, 사실 정말로 현실에 기반을 둔 행복은 고난과 고통에 눈 가리고 귀 막은 상태로 어떻게 해서든지 내 삶에서 고난과 고통을 제거하려고 노력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고통이 나한테 오면 어떻게 하지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도행전 14:22에서 바울이 보여주는 자세, 즉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 하고”에서 볼 수 있는 자세처럼, “고난아, 고통아, 난 너희가 내 인생에 찾아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너희는 내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끝장낼 수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기는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그렇게 하려면, 인생의 변함없는 행복은 고난과 고통이 제거할 수 없고 앗아갈 수 없는 관계에 기반을 두어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고난과 고통은 종종 우리 자신이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고 있던 우리의 행복에 대한 그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근본적인 안전과 안정, 기쁨을 얻으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교활한 존재들입니다. 아니, 사실 우리 마음이 그만큼이나 교활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속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어쩌면 계속해서 내 인생에는 오직 기쁘고 즐거운 일들만 있을 거라고 스스로 거짓말하면서 나름대로 정신 승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는 사이에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돌아보는 마음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은 우리가 과거에 겪은 고난과 고통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은 우리가 앞으로 겪게 될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과 고통을 잘 프로세스하게 해주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여전히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행복의 기반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의 본모습을 보게 해주십니다. 사실 저는 “우리 모두 정신 승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살자”라는 식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저절로 되는게 아니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이 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지를 함께 묵상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 너비를 아는 것만이 우리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행복한 삶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 사랑을 함께 묵상합시다.